믿음이 만날 때
2005.04.22 20:03
믿음이 만날 때
조만연
그 사람의 절박한 사정은 생면부지인 나에게 전화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필자의 큰딸이 일하는 회사 바로 옆 건물에서 샌드위치샵을 운영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후 딸에게 자기의 처지를 말했더니 아빠에게 도움을 청하면 잘 될 것이라고 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하였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좀 더 듣고 보니 렌트비가 오래 밀려있어서 주말까지 내지 않으면 가게를 뺏길 형편이라 부족한 3천불을 빌려 달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딸이 어떤 이유로 아빠가 해결해 줄 것이라고 말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약속했다니 딸의 얼굴을 보아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딸은 당시 미술용품 회사의 파사데나 지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을 때였는데 가끔씩 들리는 그 식당의 한인 주인부부가 렌트비 때문에 몹시 고민하고 있어서 회계사인 아빠에게 이 문제를 상의해 보면 혹시 좋은 방도가 생기지 않을까 해서 그렇게 말해 줬다는 것이다.
아내는 “한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에게 뭘 믿고 빌려주느냐?”, “당신 또 쓸 데 없는 짓 하는구려”하면서 못 마땅한 반응을 나타냈지만 아빠에 대한 딸의 기대감과 딸에게 갖는 나의 믿음 그리고 그 돈으로 가게를 잃지 않는다면 설사 되돌려 받지 못한다 해도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빌려주기로 결정하였다. 다음 날 사무실로 찾아 온 그 사람은 나와 비슷한 연배로 매우 젊잖고 성실하게 보여 한결 마음이 놓였는데 1개월 후에 갚겠다고 했으나 여유를 주기 위해 두 달까지 말미를 미루면서 이자는 면제하되 차용증서는 받아두었다. 그 분은 2년 전 남미에서 왔으며 두 딸이 있는데 큰딸은 북가주의 명문대학에, 작은딸은 이곳 고등학교에 재학 중으로 두 번째 정착지인 미국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매우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2개월 후, 상환일을 이틀 앞두고 그 분은 전화로 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며칠만 기다려 달라고 요청해 왔다. 직업 경험상 이런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연락을 받고 보니 역시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그 돈을 빌려줄 때부터 이미 절반은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분은 빌린 돈 전액과 과일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그 때의 기쁨, 서로의 신뢰가 만나는 그 순간의 희열은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 분은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반복하고 돌아갔지만 정작 감사한 마음은 가진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그 일이 있는지 벌써 10년 넘은 세월이 흘렀다. 그 분은 몇 달을 더 버티다가 결국 사업장소를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고 들었는데 딸이 다른 지점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이후의 소식은 이제껏 끊겨진 상태이다. 딸은 그 회사에서 인정을 받아 승진을 거듭, 엘에이와 뉴욕지점장을 거쳐 현재 본부가 있는 보스턴에서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면식도 없던 사람의 전화만 받고 선뜻 승낙한 나의 행동도 무모했지만 그 보다는 전혀 알지도 못하던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고 추측 건대 매우 힘들었을 경제적 곤란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한 그 분의 순수한 인간미와 훌륭한 성품이 내내 잊혀지지 않고 있다. 얼마 전 딸이 근무했던 그 지점 옆을 지나자니 문득 그 분과 가졌던 좋은 관계가 떠오르면서 이민 100주년을 넘긴 한인사회가 아직도 가짜가 판을 치고 남을 속이는 불신의 시대에 남아있음을 생각하니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조만연
그 사람의 절박한 사정은 생면부지인 나에게 전화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필자의 큰딸이 일하는 회사 바로 옆 건물에서 샌드위치샵을 운영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후 딸에게 자기의 처지를 말했더니 아빠에게 도움을 청하면 잘 될 것이라고 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하였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좀 더 듣고 보니 렌트비가 오래 밀려있어서 주말까지 내지 않으면 가게를 뺏길 형편이라 부족한 3천불을 빌려 달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딸이 어떤 이유로 아빠가 해결해 줄 것이라고 말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약속했다니 딸의 얼굴을 보아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딸은 당시 미술용품 회사의 파사데나 지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을 때였는데 가끔씩 들리는 그 식당의 한인 주인부부가 렌트비 때문에 몹시 고민하고 있어서 회계사인 아빠에게 이 문제를 상의해 보면 혹시 좋은 방도가 생기지 않을까 해서 그렇게 말해 줬다는 것이다.
아내는 “한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에게 뭘 믿고 빌려주느냐?”, “당신 또 쓸 데 없는 짓 하는구려”하면서 못 마땅한 반응을 나타냈지만 아빠에 대한 딸의 기대감과 딸에게 갖는 나의 믿음 그리고 그 돈으로 가게를 잃지 않는다면 설사 되돌려 받지 못한다 해도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빌려주기로 결정하였다. 다음 날 사무실로 찾아 온 그 사람은 나와 비슷한 연배로 매우 젊잖고 성실하게 보여 한결 마음이 놓였는데 1개월 후에 갚겠다고 했으나 여유를 주기 위해 두 달까지 말미를 미루면서 이자는 면제하되 차용증서는 받아두었다. 그 분은 2년 전 남미에서 왔으며 두 딸이 있는데 큰딸은 북가주의 명문대학에, 작은딸은 이곳 고등학교에 재학 중으로 두 번째 정착지인 미국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매우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2개월 후, 상환일을 이틀 앞두고 그 분은 전화로 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며칠만 기다려 달라고 요청해 왔다. 직업 경험상 이런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연락을 받고 보니 역시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그 돈을 빌려줄 때부터 이미 절반은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분은 빌린 돈 전액과 과일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그 때의 기쁨, 서로의 신뢰가 만나는 그 순간의 희열은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 분은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반복하고 돌아갔지만 정작 감사한 마음은 가진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그 일이 있는지 벌써 10년 넘은 세월이 흘렀다. 그 분은 몇 달을 더 버티다가 결국 사업장소를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고 들었는데 딸이 다른 지점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이후의 소식은 이제껏 끊겨진 상태이다. 딸은 그 회사에서 인정을 받아 승진을 거듭, 엘에이와 뉴욕지점장을 거쳐 현재 본부가 있는 보스턴에서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면식도 없던 사람의 전화만 받고 선뜻 승낙한 나의 행동도 무모했지만 그 보다는 전혀 알지도 못하던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고 추측 건대 매우 힘들었을 경제적 곤란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한 그 분의 순수한 인간미와 훌륭한 성품이 내내 잊혀지지 않고 있다. 얼마 전 딸이 근무했던 그 지점 옆을 지나자니 문득 그 분과 가졌던 좋은 관계가 떠오르면서 이민 100주년을 넘긴 한인사회가 아직도 가짜가 판을 치고 남을 속이는 불신의 시대에 남아있음을 생각하니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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