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어루만지는 섬
      
                                                           조옥동

작지도 않고 그리 크지도 않은 예쁜 상자 하나를 얻었다. 혹시 묻어 온 먼지가 있나 싶어 빈 상자를 털고 털었다. 꼭 넣어두고픈 사물을 찾다가 눈에 띄지 않게 한 구석으로 밀어 놓고 열린 입구를 꼭 눌렀는데도 두터운 상자는 입을 열고 있다. 입은 닫아야 하는지 열어두는 것인지 생각하다 내 입 언저리를 만져보다.
                
보톡스를 맞았나? 유난히 반들거리는 피부, 짙게 심은 반달보양의 눈썹, 성형을 한 듯 불룩한 두개의 유방 덩어리, 짙은 속눈썹 아래 깊은 볼우물, 빨강머리 단발을 한 인형 같은 여자를 건널목에 세워두고 차들이 바삐 지나간다. 여름의 땡볕이 유난히 빛나는데 20초 시간의 짧은 밧줄은 붉은 신호등 앞의 두 발 가진 동물을 꼭 묶어 놓다. 갈 길이 바쁜데 잠시 멈춤이 짜증스럽다가 이것저것 너무도 많이 풀려 있어 현대 사람들 지나치게 자유를 오용하는 세상이라 이렇게 의외의 밧줄에 잠간씩 묶여지는 일, 때로는 잠시 멈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스치다.

가까운 발보아 파크에는 언제나 하얀 물줄기를 쏟아 내리는 작은 폭포가 시원한 물소리를 내며 흐른다. 아무도 물소리엔 관심이 없고 열심히 앞만 보고 걷고 있다.  호수 주변을 생동시키는 활력의 주인공들은 거위와 오리들, 파랑파랑 날아다니는 텃새와 철새들인 양 싶지만 실상은 호수의 수면 밑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이 있다. 수면 밖의 세상엔 아랑곳없이 열심히 아가미를 열고 닫으며 매끄럽게 헤엄치고, 물고기를 낚으려는 짓궂은 인간들 찌 끝에 온 신경을 걸고 있으나 이를 비웃듯 수면아래 자신들의 세상을 바쁘게 움직여 즐겁게 보인다. 언덕 위의 크고 작은 나무들과 풀잎까지 식물은 오직 하늘을 우러러 뉘의 눈치코치 안보고 계절의 시계를 연속 바꿔 다는 손길이 바쁘고.
가을 철새가 떼를 지어 본향으로 날아간 후엔 호숫가 언덕의 초목들은 겉옷까지 벗어 내리고 조용히 바로 서 묵상의 계절을 맞는다. 겨울나무의 처연한 모습을 비추려 빨리 찾아온 하루의 석양빛에 저녁 하늘은 지나치리만큼 붉어서 보는 이의 마음도 붉게 물들인다. 고추도 익으면 붉고, 부끄러움을 당하면 우리 얼굴은 저절로 붉어지며, 붉은 피는 정렬 곧 젊음을 의미한다고, 내 속엔 붉은 빛이 어디 좀 숨어 있을가. 인생의 늦은 오후, 염치를 잃어가는 반열에 서서 거울이 두렵다.    

거실엔 TV가 열심히 오늘의 뉴스를 전하고 있다. 부엌 찬장의 그릇들은 질서 정연히 엎드려 찬장유리문 너머 불 위에서 생선찌게가 끓든 밥솥에선 김이 푹푹 오르며 뜸이 드느라 구수한 냄새가 나든 전혀 미동을 않는다. 수저와 포크 냅킨이 물 컵과 나란히 놓여 가족들의 식사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식탁위의 정경은 매일 바라보아도 싫증나지 않는다나. 내려와 달가닥거리며 설거지라도 해주면 더 좋을 터인데…  

이층 서재엔 서가를 빈 틈 없이 채운 책들이 시도 때도 없이 자신들의 얘기를 쏟아 내느라 목이 쉬어 조용키만 한데, 코끼리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각색 피부를 두른 크고 작은 목각인형들이 사이좋게 모여 웃고 있다. 찌푸리거나 우는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미래의 글로벌 세상이 밝을 것만 같다.”는 우리들의 염원을 그 나무 인형들은 알고 있기나 하는지. 아주 깜직스럽고 귀여운 백인 소녀인형이 놀러와 낯가림도 없이 두 손을 모으고 얼굴을 치켜들고 얘기하고 있을 때, 나는 그 옆에 놓인 우리 아이들의 어릴 때 사진에 시선이 저절로 가 닿는다.

사람새끼가 자라면 부모를 닮은 어른, 사람 즉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는 사실은 가장 귀하고 보람된 일이고 우리들의 바람이리라. 나는 얼른 옆에 놓인 핸드폰을 들어 번호를 차례로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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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깨진 유리창이 웃는다 ---- <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6년 9-10월호 조만연.조옥동 2006.09.16 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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