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웨이 인생

2004.10.23 16:11

조만연.조옥동 조회 수:581 추천:48

                      프리웨이 인생

                                                                                                                               조만연

   수년 전 프리웨이에서 예기치 못했던 일을 경험한 후 내 차의 트렁크에는 준비물 하나가 추가되었다.   자신의 차에 전화번호부나 점프·케이불을 넣고 다니는 사람은 더러 있겠고 준비성이 강한 사람은 개스가 떨어졌을 때를 염려해 1 갤런짜리 빈 통을, 운동을 즐기는 사람은 골프채나 볼링백을 가지고 다닐 것이다.   어떤 사람은 위급한 사태를 대비해서 호신용 무기를, 급작스런 조문을 위하여 검정색 양복을 싣고 다니는 용의주도함을 보이기도 한다.  모두가 유비무환(有備無患)을 위한 것인 만큼 나무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트렁크 속에 준비해 가지고 다니는 것은 밝히기 좀 곤란한 물건인데 바로 요강(尿綱)이다.
그렇다고 재래식 한국요강은 아니고 옛날 미 서부 개척민들이 멜빵을 해서 둘러매고 다녔던 수세미 모양의 가죽물통과 비슷한 프라스틱 통(筒)이다.   관광뻐스나 비행기 같은 장거리 교통수단에는 따로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으나 개인이 자신의 차에다 요강을 준비해 놓고 다니는 사람은 아마 흔치 않을 것이다.

   문제의 그날, 나는 아내와 함께 무슨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저녘 어둑해질 무렵 밸리를 출발해서 할리웃·프리웨이로 들어섰다.   처음에는 별 문제 없이 제 속력으로 달렸으나 유니버살·스튜디오 근처에 가까워지면서 점차 차들이 밀리기 시작하더니 얼마 후 아예 나가질 않았다.   마침 주말이라 체증이 더 심할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시간이 한참 흘러도 차들은 도무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 급하지 않은 우리는 여유를 갖고 기다려 보기로 했는데 불현 듯 소피(所避)를 보고 왔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10분, 30분 그리고 1시간이 지나도 차들은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 때쯤 나는 긴박한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동안 참고 견디던 볼 일이 거의 한계점에 도달한 것이다.   아내는 안감힘을 쓰고 있는 나를 보다 못해 안면 몰수하고 길옆 숲에다 실례하라고 권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그냥 옷에다 해결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더 이상 자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 모든 노력을 포기하려는 순간 차들의 엔진소리가 들려왔고 서둘러 운전해 가니 곧 램프가 나타났다.  마침내 나는 두시간 만에 지옥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날의 해프닝이 있은 후 나는 곧 휴대용 요강을 우편주문하였다.  

   나는 그런 황당한 경험 때문만이 아니라 평소 프리웨이는 우리의 삶과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늘 다니는 프리웨이지만 운전할 때마다 환경이 변하고 기분도 달라진다.   날씨가 화창한가 하면 궂은 날도 있으며 즐거울 때가 있는가 하면 화날 때도 있다.   또한 급할 때나 위험할 때도 생긴다.   잘 달리고 있는데 다른 차가 돌연 새치기해 들어오고 앞차가 방해가 된다 싶은데 옆 레인으로 비켜주기도 한다.  다른 차 때문에 서행을 강요 당하기도 하고 모르는 사이 내가 다른 차의 진로를 방해하기도 한다.   성능이 좋고 운전기술이 뛰어나다고 늘 앞 서가는 것도 아니고 고물차라고 뒤지지만도 않는다.   레인을 잘못 선택하면 줄 곳 쳐지게 되고 레인에 잘못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오히려 잘 뚫려 다른 차보다 더 빨리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레인을 우리는 미리 알아낼 수도 없고


단지 가다보니 그런 레인에 들어왔을 뿐이다.   아무리 운 좋은 레인이라도 과속으로 달리거나 너무 천천히 운전하다가는 티켓을 받게 되며 잘못 운전하다가는 치명상을 입게된다.  
자유로울 것 같지만 결코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길이 프리웨이이다.   레인은 바꿀 수 있지만 쇼울더(갓길)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아무 때나 다른 레인으로 쉽게 들어가지 못하는 길이 프리웨이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 갈 수 없는 길.  정지할 수 없고 계속 앞으로만 가야하는 길.  좋다고 정착할 수도 쉴 수도 없는 길.  프리웨이는 우리 인생이 그렇듯이 나그네 길이다.   나그네에게 짐이 많으면 그만큼 버겁겠지만 몇몇 준비물은 꼭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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