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011 미주중앙일보 ‘이 아침에’

설날에 떠나는 마음의 고향

                                           조옥동/시인

민족고유의 명절인 설날이 돌아 왔다. 고향 생각이 간절하다. 동물은 원래 타고난 장소를 잊지 않고 돌아가려는 본성이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도 귀소본능이 있다. 세월을 뛰어넘어 벌써 나는 고향에 가 있다. 아직도 돌아 갈 고향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민 후 10년 만에 처음 고국 방문길에 맨 먼저 초등학교 졸업 후 떠나 온 시골 내 고향마을을 찾았다. 조부모님은 오래전 돌아가시고 가족은 살지 않는데도 그 옛집을 찾았다.

동래 입구의 밤나무도 그대로이고 대문 밖의 감나무들은 옛 주인집 외동딸을 아는지 모르는지 많이 늙은 모습으로 맞아주었다. 집 앞 모시밭은 돼지 양육단지로 변하여 코를 자극하는 냄새가 온 마을을 덮고 있었다.

묻고 물어 오직 친척 아주머니 한 분을 땅거미가 내리고 어둠이 눕고 있는 논둑까지 찾아가 만날 수 있었다. 구부러진 허리를 끌며 볏단을 혼자 옮기고 계셨다. 아들네 식구는 서울로 떠나고 남편은 앓아누워 노인 아주머니가 농사일을 해야만 했다. 이미 떠날만한 젊은이는 도시로 가고 농촌은 노인들에게 맡겨졌다. 쓸쓸하고 냄새나는 모습으로 변한 농촌 풍경은 모처럼 고향 찾은 나그네를 슬프게 했다.

또 다시 10년이 흐르고 두 번째 고국방문에도 고향을 찾아갔다. 그때는 10년 전과 판이하게 달라진 고향마을, 이미 고향 맛을 상실한 지방 도시로 변모되어 있었다.    언덕에는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고 좁은 지방도로는 넓혀지고 골목까지 포장이 되어 몇 시간 걸리던  읍내까지는 반시간이면 닿을 수 있었다. 놀랍고 반가우면서도 한 편 무엇인가 아까운 것을 빼앗긴 듯 아쉬움과 서운함이 밀려왔다.

남이 살고 있는 옛집을 들르는 대신 어릴 적 뛰놀던 골목길과 개천물이 흐르던 돌다리를 건너보며 또 저녁연기가 오르면 신비하게 가물거리던 물방앗간 아랫동네를 바라보며 옛날로 돌아가고 있었다. 시를 쓰고 문장을 써 내려 갈 때마다 내 작품을 만들어 준 것은 언제나 가슴에 숨 쉬고 머리에 기억된 고향의 체취와 아름다운 정경들이었다.

붉게 번지던 부엉산 골짜기의 진달래가 아니었으면, 먹바위의 오랜 침묵과 산그늘 맑은 시냇물 속 귀여운 송사리 떼의 원무를 몰랐다면, 들국화 흐드러진 가을 논둑길에 서서 삼태기로 쏟아지던 저녁놀을 바라본 기억이 없었다면, 콩밭 고랑마다 영글던 옥수수 누런 빛깔과 빨갛게 익은 고추밭이 만든 하모니와 그 마른 잎의 슬픈 노래를 잊었다면, 가을 황금벌판에서 자연의 풍요함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시골 닷새장터에서 만난 사람들의 구수한 인심과 각양각색 삶의 모습을 구경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시 한 줄도 제대로 못 쓰는 매 마른 정서의 소유자가 되었을 것 같다.

마음 속 고향은 영원히 변치 않고 고스란히 존재하는 그리움이고 사랑이다. 아무리 좋은 이상향을 이룬 사람일지라도 옛 고향 가난한 시절, 얻어먹던 밀개떡의 꿀맛을 부인하며, 밤새워 울던 무논의 개구리 울음소리를 다시는 듣기 싫다 하겠는가.

곤궁했어도 멍멍이가 토방을 지키고 부엌 살강에서는 생쥐들이 달강달강 살림을 하고 텃밭에는 오이와 호박, 가지가 무럭무럭 자라서 울타리 밑 개구멍 속으로 밀어 수북이 소쿠리채로 이웃과 나눠먹었다. 인심이 천심이었던 그 시절을 그리며 생각은 귀향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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