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0일 미주중앙일보 '이 아침에'

      나를 찾아 떠나는 계절

                                                조옥동/시인

가을은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꼼짝 못하고 붙어있던 내 자리를, 일터를 한 번쯤 떨치고 어디론지 날아가 자유롭고 싶다. 소중하고 정다웠던 것들이 때로는 짐스럽고 버거워 내려놓고 싶다. 혼자가 돼보고 싶다.

길목에는 가을 잎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저들도 천연스럽게 고운 얼굴로 줄기에 꼬옥 매달려 지나는 바람이나 조롱하듯 산들거렸다. 이미 나무 가지나 머물던 자리를 떠나버렸지만 흘러갈 향방을 정하려 머뭇거리고 있다. 방금 떨어진 낙엽을 주워 잎자루를 살펴보니 이미 떨어질 때를 준비하고 있었다. 접촉부위는 다듬은 듯 매끄럽다.

며칠 전, 과일 따러 오라는 친구의 연락을 받고 달려갔다. 뒤뜰에는 사과와 감, 아보카도 등 여러 종류의 과일 나무들이 인심 좋은 집주인을 닮아 농익은 열매를 가지가 휘도록 매달고 있었다. 잘 익은 과일을 손에 잡고 조금만 당겨도 쉽게 딸 수 있었다. 이제껏 붙어있던 자리에서 체념이나 한 듯 아무 저항 없이 꼭지가 분리 되었다.
성숙이란 저절로 낙하하는 것들처럼 떠날 때를 알고 있다는 의미일 것 같다.

자연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때를 찾아서 오기도 하고 떠나기도 한다. 떠나야 할 때,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말한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실제로 말은 쉽지만 그때를 꼭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적이 떠난 늦가을 해변을 찾아갔다. 차분히 식은 모래밭에 긴 그림자를 끌고 고목처럼 서 있노라면 어디서 조용히 찾아 온 나를 만난다.
생성과 소멸, 결합과 분리, 존재와 비존재 그리고 빛과 어둠이 차가운 가슴으로 하늘과 바다와 땅의 끝에서 함께 만나고 있다. 거친 파도는 멀리서 달려오다 시원하게 가슴을 치며 결국 수많은 수포로 부서져 버린다. 산더미처럼 해변으로 밀려 와선 작은 거품으로 잘게 부서지는 작업을 반복함으로 바다는 살아있다고 외치는 듯 물보라를 친다.

하늘을 덮으며 몰려온 두터운 뭉게구름이 빗방울을 뚝뚝 떨군다. 결코 흩어지지 않을 것 같다가 비가 되어 떨어지니 파란 하늘이 보인다. 저 눈부신 햇빛도 7가지 색으로 뭉쳐 있지만 각각 다른 굴절각도에 따라 분리되고 반사할 때 천지만물에게 서로 다른 색을 입혀준다.

혼자가 되어 보아야 안다. 군중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은 복잡한 현대생활에 잘 적응을 못하는 데서 오는 현대인의 병이라 하겠지만, 멀리 떠나 온 이의 외로움은 반대로 회복성이 있어 치유력이 있다.

떠나옴은 그리움을 배태하고 그리움은 사랑을, 사랑은 나의 부족함을 깨우치고 피로를 녹여내며 미래에 대한 꿈을 잉태하고 내일의 준비를 생각한다. 스스로도 알지 못한 나를 만나 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방법이다.

이만큼 물러서면 산 전체를 잘 볼 수 있다. 사람도 사물도 좀 떨어져 거리를 두고 바라 볼 때 새롭게 발견되며 잠자던 감성을 깨운다. 용기를 내어 떠나는 일은 내가 잃은 나를 찾아나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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