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산의 이쪽과 저쪽

                                               조옥동 趙玉東

오늘은 음력 설날, 구정으로 마침 일요일이다. 오후예배를 마친 후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묘소를 찾았다. 겨울 해는 겨우 몇 뼘을 남겨놓고 할리우드산의 서쪽자락에 기우러 있는 시간, 의외로 숲속 잔디 언덕의 드넓은 묘지는 적막이 감돌고 있다.  바로 위 묘지에서 향불을 사르는 엷은 연기가 오르고 향 내음이 퍼지고 있다.
30세도 못 살고 가버린 아들을 수시로 찾아와 그 아버지는 어루만지듯 묘비를 닦고 있다. 눈앞의 그 정경이 내 마음을 아릿하게 만든다.  

L. A. 다운타운에서 할리우드산을 옆에 끼고 좌우 어느 방향이나 북쪽으로 10여 마일 만 운전하면 완만한 산허리를 따라 푸른 모자이크 판의 드넓은 공원묘지가 펼쳐진다. 완만하게 다듬어진 몇 개의 등성이 위에 관리가 잘 된 수많은 묘지에는 가족들이 놓고 간 화분과 꽃과 색색의 풍선들이 미풍에 흔들리고 있다. 어느 때  찾아오든지 할리우드 공원묘지는 꽃무늬의 치마폭을 넓게 펼치고 조용히 앉아있다. 날이 갈수록 묘지를 장식하는 가족들의 정성이나 방법도 개발되어 고요한 밤 별빛만 쏟아지던 어둠속 묘지에는 수많은 작은 태양등이 꽂히고 먼 곳에서 바라보면 마치 반딧불이 날고 있듯 조명이 은근하다. 특히 미국의 특별한 절기, 크리스마스나 메모리얼데이 때엔 묘지는 꽃밭으로 변한다.
나지막한 담이 둘러있고 로마 궁정에서나 봄직한 아름다운 석고상이 주위에 세워 진 곳도 있어 주검이 누워있는 장소라기보다는 산 사람들이 기거하는 장소로 혼동할 만큼 아름답게 가꾸어 진 묘지도 많다. 이곳은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묘지로 이름이 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할리우드산은 세상의 치열한 생존 전장의 소음과 희로애락이 계속 진행 중인 거대한 도시 L. A와 엄숙한 주검들의 마을을 남쪽과 북쪽 곧 이쪽과 저쪽으로 나누어 놓은 두터운 벽이다. 저쪽 세상은 시작이 있고 이쪽엔 끝이 있을 뿐, 저쪽엔 세상의 환락이 넘치는 할리우드 거리가 있고 이쪽은 영원한 수면만이 허락된 골짜기가 있다. 저쪽엔 세상의 부를 상징하는 부촌 베벌리 힐스가 있고 이쪽엔 죽은 자의 베벌리 힐스가 있다. 저쪽 언덕엔 우주공간을 관측하는 그리피스 천체관측소를 세워 놓았고 이쪽엔 똑같은 크기로 빚어 낸 콘크리트 관이 줄지어 깊은 땅속에 묻혀 있다. 죽은 자의 베벌리 힐스라 할 만큼 이 할리우드 숲속 공원묘지에 유명 남녀 배우들과 언론인들 그리고 가수와 코미디언들의 유택이 수십 개나 있다. “아이 러브 루시.” 의 코믹여배우 루시 볼의 무덤도 있고 안창호 선생의 아들인 필립 안과 그리고 알렌 스티브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연예인들, 세계의 별들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살아 있을 때 그들은 그 명성을 산 저쪽 할리우드 거리에 손과 발의 흔

적으로 남겨 변함없이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데, 정작 화려하게 장식하던 그들의 육체는 돌같이 굳어 이쪽 냉랭한 땅속에 묻힌 채 찾는 이도 드물어 한적하기만 하다. 이 땅은 죽은 자들에게도 평등이 적용되는지 생전의 지위나 빈부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묘지의 크기와 묘지위에 놓여 진 동판까지 모양과 크기가 일률적으로 같다. 동판위엔 누구의 묘인지 명확하게 이름이 빠짐없이 새겨 있기에 “너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자는 없다. 죽어 누워 있는 자마다 틀림없이 묘지까지 가지고 온 것은 오직 하나 이름 뿐 이다. 저쪽 세상에서 누렸던 부와 명예와 권력과 치욕과 분노까지도 이곳 묘지까지는 가져 올 수 없었기에 영욕이 묻혀 진 이 묘지의 세상은 평화롭고 고요함으로 숙연케 만든다.

공원묘지 바로 앞의 조그만 개울과 그 넘어 134번 고속도로를 건너면 할리우드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영화 제작사들과 월트 디즈니사를 비롯하여 미국 유명 방송사들이 자리 잡고 있다. 왼쪽 어깨쯤에는 유명한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있어 세계 도처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밤까지 휘황찬란하다. 사방이 복잡한 도시로 둘러싸여 있는데도 온전히 별다른 세상에 온 듯 착각을 일으킬 만큼 판이한 세상, 공원묘지가 세상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사실은 죽은 자를 찾아오는 산 사람들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많다.  

묘비의 동판 표면을 닦고 주변을 정리한 후에 준비해 온 화분을 깨끗이 고른 후 물을 흠씬 적셔 묘 앞에 놓았다. 어머니는 이미 고인과 인사를 나누고 그 간의 소식들을 전하시는 듯 미동도 없이 서 계신 어깨 위를 어느새 노을빛이 감싸고 있다. 서울에서 유골이나마 이곳에 가져 와 집과 가까운 할리우드산 숲속 이 공원묘지에 유택을 마련한 일은 참 잘 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동판엔 이름을 한자로, 1916-2004 향년을 그리고 충남 부여 출생임을 한글로 새겨놓았다. 누가 보아도 이 묘지의 주인공은 한국 사람인 것을 금방 알 수 있게 했다. 처음 묘를 썼을 때만 해도 주위에는 외국인들의 묘지만 보여 사후에 외국에 오셔서 영혼마저 외로우시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요즈음엔 한국인들의 한글 묘비가 하나 둘 늘고 있음을 발견한다.
한글 판 묘비를 보아도 반가워하는 “나는 누구인가?”를 자문하며 묘지를 떠나는 나에게 “너는 누구인가?” 묻는 수많은 소리가 또한 내 등을 잡아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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