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1> 2010년 가을호 원고

사랑이 고픈 사람들

                                                     조옥동
                                        
우리에게 정해진 목적지나 또 가는 길은 즐거움도 슬픔이 아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구도적인 삶을 살다 간 19세기 미국 최고의 시인 롱펠로우의 말이다.

두 번씩이나 사랑하는 아내를 병마와 사고로 잃은 상처를 가슴에 묻고 난 후에 그가 쓴 유명한 시 ‘인생찬가’에서 그는 슬픈 사연으로 나에게 말하지 말라고 시작한다. 즐거움도 슬픔도 아니라면 이 시인이 말한 인생길은 무엇일가? 즐거움과 슬픔의 중간 아니면 슬픔과 즐거움을 모두 합한 것일지 모른다.

뉴욕의 막내딸이 아버지날 선물로 LA다운타운 뮤직센터 내 어맨슨 씨어터의 공연 티켓을 사줘 남편과 모처럼 데이트를 했다. 1945년부터 5년간 브로드웨이에서 1900번 이상 공연되고 1958년 영화로 만든 것을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감명 깊게 보았던 뮤지컬 <남태평양>을 아주 오랜만에 다시 관람했다.
같은 작품을 링컨센터 씨어터가 60여년 만에 2007년 새로 리메이크하여 2008년 베스트 리바이벌 뮤지컬부문 7개의 토니상을 수상한 작품을 이곳에서 보게 된다니 우리는 마음이 상기되었다.

목요일, 주중인데도 지하 5층까지 파킹 장은 꽉 차있어 겨우 차를 주차하고 지상으로 오르니 하늘엔 상현달의 도톰한 얼굴이 광장을 굽어보고 있고 노천카페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한 여름 밤의 뮤지컬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대만원을 이루고 있다. LA다운타운과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시원한 바람을 감촉하는 맑은 여름밤이 아름답고 사람들의 담소하는 모습이 평화스러웠다.

세상일에 찌든 피곤한 사람들로 가득한 바로 아래 복잡한 도심에서 겨우 몇 십 미터 높은 이곳은 별천지같이 보였다. 혼자인 사람보다는 친구들과 또는 쌍쌍으로 행복한 표정들이다.
매표소 앞에 줄을 서 딸이 알려준 예매번호와 맞바꾼 입장권 두 장을 받아들고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출연자의 호흡까지도 볼 수 있을 만큼 오케스트라박스 바로 앞좌석에서 뒤를 돌아보니 2000석이나 되는 자리가 꽉 차 있었다.

오래 계속되는 경제 불황은 생활의 균형이 깨질 만큼 개인이나 국가의 살림을 바짝 졸라매도 회복이 느려 사람들의 가슴과 어깨를 위축시키는데 의외로 이곳 뮤직센터의 한여름 밤은 너무도 다른 세상같이 느꼈다. 무엇이 이 많은 사람들을 비싼 관람석에 앉도록 밀어 넣었을까 생각하게 했다.

브로드웨이의 영원한 클래식 뮤지컬<남태평양>은 세계 2차 대전을 치루는 암울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두 쌍의 서로 다른 사랑을 주제로 만든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의 작품으로 아름다운 남태평양의 풍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흥겨운 멜로디와 뮤지컬 코미디가 훌륭한 연기로 더욱 빛이 났다.

미 해병 소위 케이블과 원주민 소녀와의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은 케이블의 전사로 미완의 로맨스로 끝이나 더욱 애틋하다. 인종간의 갈등과 차별이란 깊은 주제를 코믹하면서도 신선하게 다루고 있다. 어쩌다 살인자로 프랑스에서 이주한 농장주 에밀과 사랑에 빠진 간호장교 넬리는 사별한 폴리네시아 아내와의 사이에 어린 남매를 둔 이 홀아비와의 로맨스로 울다 웃다 고민하는 모습이 귀엽고도 안타깝다. ‘나는 당장 그 사람을 씻어버리겠다. 내 머리 밖으로.’ 머리를 감으며 울부짖는다. 결국은 ‘그 멋있는 남자’를 못 잊어 미 해군들이 떠난 섬에 홀로 남은 넬리의 사랑은 해피엔드로 ‘어느 황홀한 저녁’ 노래만큼 3시간동안 청중을 매료시켰다.

뮤지컬에서 절반의 해피엔딩으로 끝난 로맨스는 즐거움도 또는 슬픔만도 아닌 사랑 그것이었다. 15일간 공연되는 동안 이 뮤지컬을 보려는 사람들로 끝나는 날까지 좌석은 매진될 정도라니 현대는 어떤 결핍보다도 사랑이 고픈 사람들의 세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영웅심과 고독, 인종갈등 그리고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자연환경의 위력도 사랑이란 두 글자 속에 웃음과 눈물로 녹아지며 역사는 계속되고 인간은 성숙해 감을 롱펠로우는 깨달은 것이다.

경제적인 불황조차도 근본적으로 선량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희구하는 인간 본연의 심성을 지우거나 잃게 할 수는 없다. 인생길이 즐거움도 슬픔이 아닌 것은 사랑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행복이 전부가 아님은 슬픔을 이기는 용기와 희생이 있을 때 아름다운 사랑으로 발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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