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22일 '이 아침에'/ 미주중앙일보

              8월을 닮고 싶다.
                                           조옥동

  8월은 세상을 넉넉하게 만든다. 뜨거운 햇볕아래 몸이 자라고 수염도 자라고 씨앗과 열매가 자라고 있다. 8월은 살찌는 달이다. 마음껏 속살을 찌우며 영글어간다. 땅속의 뿌리는 힘차게 지층을 뚫고나가 사방을 점령한다.

  두려움이나 망설임조차 없는 듯 8월은 넘치도록 힘찬 달이다. 의기소침 할 줄 모르는 8월은 바다보다 깊고 너른 녹색의 바다다. 8월은 겉과 속이, 위와 아래가 꽉 차오는 달이다. 좌우로 달고 있는 수많은 8월의 주머니는 불룩하고 탐스럽다. 8월의 소매 자락은 무엇이든 감싸 안을 듯 여유롭다

  8월은 장년의 달이다. 호기 있고 장엄하다 곧 중후함으로 이어진다. 먼 하늘을 바라보는 어깨는 넓고 바르고 단단해 보인다. 8월의 밤하늘은 한층 광대하여 별빛마저 부드럽다. 8월의 바람은 시원하여 같이 세상을 날고 싶다.

  8월은 깨끗하고 허투루 속을 내비치지 않는 단정함이 으뜸인 달이다. 고집과 아집으로 하나만을 주장치 않고 개성을 존중하여 각양각색으로 생명에 특성을 입힌다.
붉은 것을 붉게 노란 것은 노랗게 푸른 것은 푸르게, 단맛은 달게 쓴 것을 쓴 그대로 제 색과 맛과 멋을 확실히 분별케 한다. 8월이 없으면 옹색한 살림집의 채우지 못한 헛간 같이 가을은 단조롭고 허전할 것이다.

  8월이 없으면 7월은 여물다 말고 떨어진 아쉬운 꿈 그것이다. 대추알이 반들거리고 밤톨이 익어가는 8월은 그리운 것들이 하나씩 내속에 들어와 집을 짓는다.
숲의 짙은 그림자를 밟고 가노라면 보폭을 줄이고 간간이 걸음을 멈춰서 봄부터 쌓아온 얘기를 듣고 싶다.

  지구라는 곳간을 채우려 봄부터 흘린 땀이 모자란 양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소나기를 퍼붓고 허리를 내리쳤다.
숫한 벌레들이 달려들어 날카로운 손톱 발톱으로 물고 할퀸 상체기가 온전히 아물지 않았어도 8월의 생기는 호기롭다. 저녁 하늘에 떠있는 구름 몇 조각 스러져가면 속옷에 배인 땀까지 사라져 8월은 후줄근 거리지 않는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가을이 더 성숙한 계절로 다가오도록 준비하는 달이다. 의연한 모습이 속이 깊은 맏며느리의 후덕함을 보여주는 달이다. 질끈 두른 8월의 허리를 팔을 들어 안아보고 싶다.

  저녁나절 호랑나비 한 마리 어디서 날아와 쉴 곳을 찾을 때 우리 집 뒷들에서 8월이 조용히 퇴진을 준비한다. 여름의 마지막, 8월은 숨어서 눈물 글썽거림을 오는 가을은 짐작이나 하려는가.

  가슴 한구석 깊게 뭉개진 하연달이 새벽이 되도록 건너온 세상을 내려다본다. 철이 든 이후 장년기를 넘기며, 자연의 섭리를 따라 자신의 자리를 지키느라 뜨거운 눈물을 흘려 본 삶만이 8월이란 커다란 품속에 품은 것은 희망도 실망도 아닌 겸손임을 알리라.

  부족한 곳을 더욱 충만하게 채운 후에 떠나려는 계절, 온전히 피우지 못한 생명 때문에 속이 타느라 8월은 노염(老炎)을 토한다. 목청을 다해 뽑아내는 매미소리는 8월의 송가인가. 아직 등을 보이지 않은 8월을 향해 나는 머리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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