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쓴다

                                                       조옥동


전화도 있고 이메일도 문자 메시지도 있다. 이 같은 신속한 의사전달 수단이 생기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 허나 아직도 많은 사람은 진심으로 감사와 사랑과 용서를 고백하고 싶을 때, 축의나 슬픔을 나누고 싶을 때엔 육필로 쓴 편지를 보낸다. 비록 예쁜 카드를 샀을 때에도 이미 인쇄된 문장이 아름답지만 전하고 싶은 뜻을 친필로 보태어 쓰게 된다. 컴퓨터에서 프린트로 뽑아낸 공문서 같은 편지보단 비록 달필은 아니어도 때로는 눈물이 혹시 묻어 온 편지를 쓰고 받는 일은 서로 행복을 주고받는 방법이며 냉냉하게 식어가는 현대인의 가슴을 덥혀 주는 멋이다. 편지가 오고가는 동안은 서로의 그리움을 숙성시키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 진 자리에 잎 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 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生) 풍화되었다.

(천양희의 시“너에게 쓴다”에서)

너에게 쓴 마음이 길이 되어 길 위에서 신발이 다 닳아지도록 편지를 쓸 친구가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꽃이 피었다고 쓰고 꽃이 졌다고 쓰고 싶은 친구가 있다면.  L.A.엔 자카랜다 꽃이 피었다고 편지를 써 나는 친구에게 향기를 부쳐준다.  단풍이 몸서리치도록 곱다고 뉴욕의 가을빛을 부쳐주는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고국의 친구가 서울엔 첫눈이 내렸다며 그리움이란 소포를 보내 주면 방금 전화를 시시콜콜 하고 나서 못다 한 얘기를 또 편지로 쓴다.
편지는 너와 나 사이에 매 놓은 사랑과 이해의 다리이기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또 쓰다가 마침내는 우리의 인생이 풍화되어 버린다 해도 행복한 일이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바람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 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 을 믿는다.

( 황동규 시 "즐거운 편지")

사랑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끝나고 말 것이고 그 고통을 극복하려면 영원히 변치 않는 기다림뿐이라고. 그대를 향한 변함없는 사랑을 잔잔하게 노래하는 시로 사랑의 고백을 편지라는 말로 메타포하였다.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을, 기다림의 자세를 그림처럼 그려내고 있다. 왜냐하면 편지는 안타까운 기다림이기에……
사랑을 그려 쓴 시조 한 편을 또 읽고 싶다.

차마, 사랑은 여윈 네 얼굴 바라보다 일어서는 것,
묻고 싶은 맘 접어 두는 것,
말 못하고 돌아서는 것 하필, 동짓밤 빈 가지 사이 어둠별에서, 손톱달에서 가슴 저리게 너를 보는 것, 문득 삿갓등 아래 함박눈 오는 밤 창문 활짝 열고 서 서 그립다, 네가 그립다, 눈에게만 고하는 것 끝내, 사랑한다는 말따윈 끝끝내 참아내는 것
숫눈길,
따뜻한 슬픔이
딛고 오던
그 저녁

(홍성란의 시조 “따뜻한 슬픔”에서)

사랑은 차라리 슬픔이요 슬품중에도 따뜻한 슬픔이라. 글이 아니면 시가 아니면 이보다 아름답게 사랑을 그릴 수 있겠는가 싶다. 사랑하는 너에게 동짓밤, 어둠별, 손톱달, 삿갓등, 숫눈길 등의 언어들로 끝내 사랑한다는 말을 감추고 홀로 슬픔을 안는다 따뜻한 가슴에. 그렇다 사랑을 보고도 말하지 못하고 참고 참아내다 슬픔이 딛고 오는 그저녁 너에게 쓴다.

뭐니뭐니해도 사랑을 표현할 때 시만큼 살뜰하고 절절한 방법은 없다. 오페라의 애절한 아리아도 시가 없으면 작곡할 수 없다. 사랑은 시이며, 애간장을 태운 편지이다.

사랑은 언제나 좀 서운함이어라
내가 찾을 때 네가 없고
네가 찾을 때 내가 없음이여

후회는 모든 것이 지나간 뒤에
일어나는 바람이려니
그리움은 더욱 더 사라진 뒤에
오는 빈 세월이려니

사랑은 좀 더 서운함이려니
그리움은 아프게 더 더 긴 세월이려니

아, 인생이 이러함이려니
사람이 사랑하는 곳은 더 더 이러함이려니

오, 사랑아. (조병화의 시 “사랑”에서)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신기루를 어찌 잡을 수 있으리 “사랑은 어쩌면 다가서면 멀어지는 신기루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마실수록 갈증이 나는 물일지도 모릅니다.”라고 누구는 말한다. 그러다간 후회하고 더욱 더 긴 세월 그리워하는 아픔일지도 모릅니다. '아, 인생이 이러함이려니' 남녀 간의 사랑만이 아니고 부모와 자녀, 형제 친구간의 사랑도 다하지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이리라.

이제 물로도 쓰는 편지를 읽어 보자.

강원도 태백 너덜샘 펑펑 솟는 물 위로 그대에게 사랑의 편지 쓰나니 그 물 흘러 낙동강 일천 삼백 리 물길 따라 흐르고 흘러 그대의 수도꼭지 끝에 가슴 두근두근 거리며 닿는다면
그대 수도꼭지 틀어 한 잔의 물을 받다가 혹은 세숫물을 받아 놓다가 물위에 빼곡하게 떠 있는 편지 읽으며 내 이름 떠올린다면 내 이름 떠올리다 귓불 빨갛게 타오른다면

(정일근 시 “사랑-이름 1”에서)

시인은 조그만 너덜샘물로도 사랑의 편지를 쓰고 싶다. 長江의 물줄기를 이루어 일천 삼백 리 멀고 먼 거리를 흐르다가 사랑하는 이의 삶이 있는 그 곳에 도달하여 읽혀지기를 바란다. 한잔의 수돗물을 받다가 세숫물을 받아 놓다가 이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 시상이 신선하다. 세속적인 사랑도 장강처럼 이렇게 흘러야 하는 것을…

세상에 편지라는 수단이 없다면 아무리 가슴이 뜨거워도 사랑을 주고받는 로맨스는 덜 할 것이다. 모든 생물은 더욱 인간은 사랑을 표현하고 싶고 받고 싶어 하는 착한 본성이 있다. 건조한 대화보다 눈물로 적은 편지는 상대편의 굳은 마음을 녹여 흐르게 하는 호소력이 있다. 수줍고 부끄러워 말로는 표현치 못한 속마음을 편지로는 전할 수 있어 다행이 아닌가. 오늘도 너에게 쓴다. 이 늦은 밤 가슴 속 촛불을 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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