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의 좌표와 방향 / 김학성
김학성 성균관대 교수


1. 현대시조의 좌표

먼저 노산 선생 탄신 100주년을 맞은 뜻깊은 기념행사에 부족한 저를 초청해 주신 데 대해 감사를 드린다. 강연의 논지는 현대시조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데 두고자 한다. 미래의 발전을 위해서는 현대시조의 현재적 좌표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필요하고 그것을 토대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해 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 경남시조단이 낳은 우리 문학사의 거봉 노산 선생의 작품과 이번에 경남시조문학상의 영광을 안은 수상작을 대상으로 논의를 전개해 보겠다.

현대시조는 현대+시조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현대성과 시조성을 동시에 충족해야 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즉, 현대성을 충족해야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사라진 고시조의 빈 공간을 메꿀 수 있는 존재이유가 되고, 시조성을 확고히 해야 자유시와의 경쟁관계에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
현대성을 무시하고 시조성만 추구한다면 현대인의 까다로운 미의식에 걸맞는 공감대를 획득하기 어려워 시대착오적인 복고주의 혹은 국수주의로 매도되어도 할 말이 없고, 반대로 시조성을 무시하고 현대성으로 과도하게 기울면 자유시와 경계선이 무너져 그러려면 차라리 자유시 쪽으로 나오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처럼 양쪽으로부터 경계와 비판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하는 것이 현대시조가 위치한 문학사적 위상이고 좌표다.

그렇지만 현대시조는 고시조가 갖지 못한 현대성을 갖기에 현대에 존립해야 할 명백한 이유를 가지며 자유시가 갖지 못한 시조성을 갖기에 자유시와 당당하게 맞서 경쟁관계를 가지고 존립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므로 미래에 대해 비관적으로 생각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고시조가 조선시대 5백년 간을 그러했듯이 문학사에서 다시 꽃피울 수 있느냐다. 이의 실마리를 노산 선생의 시조론(〈시조단형추이〉)에서 찾아보자.

세간(世間)에서 시조의 창작을 논할 때 그 근거를 ‘음창(吟唱)문제’에다 주는 것은 그 표준의 상위(相違)가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한 까닭이라 생각하거니와…… 금일의 민중에게는 그다지 필요한 것도 아닌 이상…… 민중일반으로 보아서는 ‘낭독구조(朗讀口調)’를 표준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고시조의 가곡, 우조·평조·계면조와 중대엽·후정화·초수대엽·이수대엽·삼수대엽·소용·편소용·만횡·낙시조·편락시조·편수대엽·농가 기타 노래의 풍도형용(風度形容)의 구별 여하도 신창작(新創作)에 있어서는 하등의 의의가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니, 요컨대 거기에 실려 있는 고시조 전부를 통고(統考)하여 일반에게 필요한 ‘형식’만을 건안(建案)시키면 그것으로 족하다 할 것이다.

이의 요지는 고시조의 경우 가곡의 여러 악조와 다양한 풍도형용을 가진 악곡에 실려 음창(吟唱)으로 실현되는 ‘노래하는 시’였지만, 오늘날의 대중일반이 향유하는 신창작의 현대시조에서는 입으로 낭독하는 ‘읽는 시’여서 그러한 악곡은 아무런 의의를 갖지 못하며 다만 필요한 것은 시적 형식이라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지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먼저 노래에 실은 곡목이 중요했던 고시조의 경우를 보자.

나비야 청산가자 범나비 너도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서나 자고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가자

이 작품에 얹어 부른 악곡을 무시한 채로 사설의 의미만을 놓고 보면 어느 한량이 나비에 기탁하여 꽃과도 어울려 보려 하고 잎과도 어울려 보려 하는 탕아적 기질을 호탕하게 노래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작품이 실린 육당본 《청구영언》에 ‘계(界)이삭대엽’으로 악곡 표지가 되어 있어 그런 의미와는 상관없음이 확인된다. 즉 계면조라는 악조에 이삭대엽의 악곡으로 부른다는 것이므로 그런 호탕한 의미지향과는 거리가 멀다. 계면조는 슬프고 처연한 정서를 자아내는 ‘애원처창’한 악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계면조에 여실히 부합되는 작품적 의미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작품의 의미지향은 나비와 함께 가는 길이 순탄치 않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면 꽃에게 지친 몸을 의탁해야 하고 거기서 박대를 받으면 잎에라도 의탁해야 하는, 미래의 전망이 불투명한 고단하고 암울한 행로를 노래하고 있다. 계면조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분위기이자 목소리인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중심의미는 ‘슬프고 원망스럽고 허무한 느낌’을 주는 계면조의 분위기에 함몰하지 않는다. ‘공자가 행단(杏壇)에서 제자에게 강학(講學)을 하듯, 비가 알맞게 내리고 바람이 고르게 불 듯’ 노래하는 이삭대엽에 실어 부르기 때문이다. 그만큼 유장하고 안정적이며, 조화롭고 아정(雅正)한 곡이다. 그러므로 계면조에 실리는 슬픔과 원망의 정감은 애이불비(哀而不悲 : 슬프지만 비참으로 치닫지 않음)와 원이불노(怨而不怒 : 원망하나 분노로 치닫지 않음)로 다스려 생각의 깊이와 절제된 품위를 잃지 않는다.

따라서 꽃이 푸대접하더라도 비참해 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그런 마음을 내면으로 다스린다. 이런 마음은 사물(혹은 타자)을 점유하고 이용하려는 자아의 욕구를 버리고 빈 마음으로 사물을 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 혼자 청산을 독점하려 홀로 가지 않고 나비와 더불어 가며, 또 내가 친숙한 나비만 고집하지 않고 색깔이 다른 범나비와도 함께 간다. 가다가 저물면 자고 가고, 꽃을 만나면 그와 함께 자고, 그가 거부하면 잎과 함께 잔다. 잠자리는 꼭 꽃이라야 하는 것이 아니므로 꽃을 내 것으로 소유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갈등’을 야기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연의 운행에 순응하고 우주적 원리에 귀의함으로써 ‘주객합일(主客合一)’ ‘물아일체(物我一體)’, 나아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이른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는 시인의 마음은 ‘우주의 마음’이 된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무의미한 존재도 우주에 버금가는 가치를 내재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시인의 마음이 우주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여기엔 시적 화자인 나와 나비, 범나비, 꽃, 잎이 모두 함께 어우러져 ‘청산’이라는 ‘소우주’에서 조화와 질서를 이룬다. 경험세계에의 혼돈과 갈등으로부터 상생과 화해의 세계가 창조된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개체들은 상호소통하면서 공존하는 관계를 이룬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관계를 꿈꾸고 이러한 세계를 창조한다. 이럴 때의 시적 자아는 개인 주체의 욕망으로 일그러진 마음이 아니라, 갈고 닦은 마음이며, 자연이나 우주와 같은 마음이라야 가능하다. 이렇게 갈고 닦은 깊은 생각을 담은 것이 이 시조의 궁극적 ‘의미’이며, 이러한 시적 의미가 ‘이삭대엽’이란 고아한 품격의 아정한 악곡에 실려 완벽하게 부합된 하나의 작품으로 태어난 것이다.

시가 ‘음성과 의미의 조화적 통일체’란 말이 여기서 확인된다. 노산 선생이 언급한 중대엽과 삭대엽의 여러 변주곡도, 거기에 담는 시조의 작품적 의미가 달라짐에 따라 그 의미 지향에 부합하는 조화적 통일체를 이루기 위한 곡목 계발로 나타나 음악 양식화된 것임은 물론이다.

이처럼 고시조가 우주적 마음과 통하는 사려 깊은 ‘의미’를 유장하고 아정한 ‘악곡’에 담아 ‘음성과 의미의 조화적 통일체’를 이루는 데 성공하여 수백 년을 향유했다면, 현대시조는 고시조의 소멸과 함께 이러한 악곡적 음율을 모두 상실하고 노래하는 시에서 읽는 시로 전환하게 됨에 따라 남은 것은 시조 사설이 갖는 ‘형식장치’뿐이게 되었다. 앞에 인용한 노산 선생의 언급은 바로 이러한 현대시조의 좌표에 대한 인식이었던 것이다.

2. 현대시조의 고전적 절창: 〈가고파〉

이제 현대시조는 고시조처럼 가곡창이나 시조창의 여러 변주곡에 담아 시적 의미와 정취를 심오하게 하는 수단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으므로, 악곡적 음율(吟唱)이 사라진 공백을 언어의 음성적 자질로 감당하여 음성과 의미의 조화적 통일체를 실현해야 하게 되었다. 그런 만큼 시어 하나의 선택과 배치에서도 음악적 자질을 활용해야 하고, 듣는 시에서 읽는 시로의 전환으로 시각적 조형미까지 고려해야 한다. 언어의 내적 질서를 바탕으로 고시조의 선율적 기능에 버금가는 율동적 실현과 공간적 조형미를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언어의 음성적 질서에서 구해야 하므로 그만큼 ‘언어를 대상화’하게 된 것이다.

노래하는 시에서 읽는 시로의 전환은 음악적 율동에서 언어의 음성 자원을 통한 율동으로 바뀌게 되고 이에 따라 시적 표출에서 ‘언어를 대상화’하게 된 사정은 현대시조나 현대시가 동일한 좌표에 서게 된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지향점은 정반대였으니 현대시는 이전의 전통시가였던 고시조의 엄정한 형식장치에 대한 반발과 거부의 시정신으로 나아가고, 현대시조는 그것을 적극 수용하여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현대시가 전통적 율격으로부터의 해방을 바탕이념으로 삼아 개성적 율동을 지향하면서 과격하고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주요한의 〈불놀이〉 같은 자유시로 나아가게 된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하게 된 것이다.

현대시의 이러한 자유율적 행로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또 그것이 중심 장르로 군림하고 있지만 전통율격에 대한 이탈과 거부는 늘 불안하고 우리의 미의식에 어긋나는 부분이 많아 대중의 공감을 얻는 절창으로 상승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소월, 만해, 영랑, 미당 등이 절창을 내었지만 그들도 전통율격을 철저히 배제하고 외면한 데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창조적으로 수용하고 변용하는 데서 오히려 가능했다. 소월시 〈진달래꽃〉에 얽힌 다음의 일화가 그러한 사정을 잘 반영한다.

서울의 모대학 영문학 교수가 미국의 어떤 대학에 객원교수로 가서 8년째 지내던 어느 날, 평소 친하게 지내던 미국인 교수의 생일 초대를 받아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축하 케익을 자르기 전에 그 주인공이 생일 축하의 기도를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당신은 한국인이니, 특별히 한국말로 하는 게 의미가 있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미국에 온 이후로 단 한번도 한국말을 해본 적이 없어 막상 기도를 하려니 단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말을 다 잊어 할 줄 모른다고 하면 체면이 말이 아니므로 몹시 당황하고 난감해 하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소월시 〈진달래꽃〉이어서 눈을 감고 기도하기를,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아-멘” 해서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그 미국인은 한국말을 모르니 전통율조에 실린 소월시를 듣고는 한국말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고 오히려 칭찬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한국어를 까맣게 잊은 사람이 어찌해서 소월시는 암송할 수 있었냐는 것이다. 이미 짐작하겠지만 소월시가 4음3보격이라는 전통율격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율격이란 우리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말의 율동적 아름다움을 가꾸어온 경험적 미의식의 결정체로서 우리 모두의 심미적 공감에 의해 공유하던 율동형이 양식화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므로, 전통율격 양식의 리듬을 타고 실현된 시는 외국인이 듣기에도 감미로운 미적 호소력을 가질 수 있고, 또 쉽게 암기되어 우리 의식의 심층에 내장될 수 있다는 사례를 이 일화에서 소월시가 실증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소월시 〈진달래꽃〉이 우리 민족의 대표적 전통율격 양식인 4음3보격이 낳은 빼어난 절창이라면, 또 하나의 대표양식인 4음4보격의 빼어난 절창으로 노산의 〈가고파〉를 들 수 있다. 만약 내가 앞의 영문학 교수와 똑같은 난감한 처지에 있었다면 〈가고파〉 몇 연을 암송하여 위기를 모면했으리라. 어릴 때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무작정 상경해서 모진 삶의 신산을 맛보아야 했던 시절, 낯선 서울거리를 방황하면서 〈가고파〉를 웅얼대며 눈물지은 적이 수없이 많았던 추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노래가 현대 가곡에 실려 유행한 탓도 있겠지만 그 음악적 선율이 주는 호소력은 접어두고라도 4음4보격이라는 안정된 구조 위에 명상적으로 펼쳐지는 고향에 대한 그 깊은 갈구의 염원이 그토록 심금을 울렸던 탓일 것이다.

내고향 남쪽바다 그,파란물 눈에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물새들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첫 연)
거기 아침은오고 거기 석양은저도
찬얼음 센바람은 들지못하는 그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살거나 깨끗이도 깨끗이 (끝 연)

일찍이 이 작품에 대해 피천득은 “영시(英詩)에서 여수(旅愁)를 읊어 절찬을 받은 바 있는 〈The South Country〉도 〈가고파〉에 비길 것이 못된다.”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괜한 말은 아닐 것이다. 우선 이 작품의 서정적 호소력은 〈진달래꽃〉이 ‘이별의 정한’이란 보편적 주제에 기반한 것처럼, ‘고향에의 그리움’이란 보편적 주제를 노래한 데서 일차적으로 찾을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고향을 떠나 뿌리뽑힌 삶을 그것도 고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어릴 때 세상의 모진 풍파를 모른 채로 순진무구하게 뛰놀던 고향의 그 시절을 그리워함은 인지상정일 터이기 때문이다. 작게는 일상에서 흔하게 이루어지는 타향살이의 설움에서부터 크게는 남북분단이란 이산의 슬픔이나 나라를 빼앗기고 고국을 떠나 살아야 하는 망국의 비통함에 이르기까지 그 공감대는 무한하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는 현실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절절해질 수밖에 없다. 그 절절한 감정이 첫연의 “가고파라 가고파”에서부터, “보고파라 보고파” “돌아갈까 돌아가” “찾아가자 찾아가” “그리워라 그리워” 등 무려 10연에 걸쳐 ‘갈구의 정서’를 반복적 어법으로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 절절한 그리움의 정서는 감정적 통어가 이루어지기 어려워 자칫 감상적으로 흐르거나 직정적 혹은 호소적 어조로 되기 십상이어서(이런 정감의 표출은 3보격의 율격장치가 어울림) 값싼 동정심이나 선정성을 환기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빼어난 절창이 될 수 있었음은 고향을 그리는 갈구의 정서를, 그리하여 자칫 감상적이고 직정적인 토로가 되기 쉬운 정감을 안정적이고 명상적인 4음4보격의 시조양식에 추호의 흐트러짐 없이 담아냄으로써 절제되고 엄정한 율격장치로 다스리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의 언어적 표현이 인간적 품격과 분리되지 않고, 나아가 인간의 전인적(全人的) 완성을 추구한 작품이라는 데 있다.

5연에서 “물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다름질하고, 물들면 뱃장에 누어 별헤다 잠들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끝연의 종장을 “돌아가 알몸으로 살거나 깨끗이도 깨끗이”라고 하여 전체 작품을 총결 지음으로써 그토록 열망하는 갈구의 최종 귀착점이 ‘순진무구’의 동심의 세계, 곧 도덕적 순결성을 추구하는 전인적 인격의 완성에 있음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려 10연에 걸쳐 시종일관 엄격한 시조의 정형율을 따르면서도 율동의 효과가 단조롭다거나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잔잔한 감동의 파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은 시인의 녹녹지 않은 시적 역량에 달려 있는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참신한 시어의 선택과 언어를 구사하는 시적 조사(措辭)의 방법이 독특하고 위에 인용한 첫연과 끝연에서도 보듯이 한 음보의 음지속량이 5음절인 과음보와 2음절에 불과한 소음보의 적절한 사용이 생동감과 긴장감을 불어넣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 첫연에서 마지막 연에 이르기까지 “∼고파라 ∼고파”라는 어법과 유사한 어법으로 반복적으로 마무리함으로써 연 내부질서의 완결과 함께 연과 연 사이의 내밀한 긴장관계를 수수하고 결속시키는 효과를 가져와 10연이라는 적지 않은 길이에도 지속적인 탄력과 긴밀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현대시조의 방향: 수상작 〈니나〉를 통해

같은 근·현대라 하지만 〈가고파〉가 지어지던 1930년대만 해도 오늘날처럼 사회문화가 복잡성을 띠지는 않았다. 그에 따라 미감도 비교적 단조로워 유행가의 경우 ‘트롯트’ 하나로도 충분히 시대에 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수시로 변하는 까탈스러운 감수성과 혼란스러울 정도의 다양한 미감의 변화를 경험하는 중이어서 트롯트 하나로 만족하던 시대는 저 멀리로 가버리고 온갖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편력 중에 있음은 잘 아는 바와 같다.

이렇게 복잡하고 까다로운 미감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가고파〉는 이제 하나의 고전이 되어 버렸다. 이런 시점에서 〈가고파〉처럼 고시가의 형식과 정형율을 시종일관 엄격하게 준수하면서 현대의 까다로운 독자층의 미감을 충족하기는 지난한 일일 것이다.

시어 선택과 조사(措辭) 면에서 노산 선생과 같은 탁월한 시적 역량을 보이거나 현실의 삶을 날카롭게 투시하는 ‘혜안’이나 불교 같은 종교적 수양의 깊이를 담지하는 ‘통찰’이 뒷받침되어야 시조의 정형 형식이 불러일으키는 진부함과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현대성을 충족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흘러간 노래로서 트롯트의 선호 정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현대시조가 트롯트 수준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작시(作詩) 면에서 ‘시행(詩行) 배분의 묘(妙)’와 ‘연(聯)의 운용방식’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현대시조가 현대 서정시의 한 양식으로서 현대시에 경쟁력을 갖는 서정적 울림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 점에 특히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서정시는 ‘시행발화’이고, ‘율문의 문학적 사용’이므로 시행에서 율문을 어떻게 문학적으로 효과 있게 활용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시행이 ‘도식적인 운율화’가 아니라 ‘의미생산적 율동화’로 나아가야 서정적 미감을 자극할 수 있는 당위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현대시조는 현대시와 정반대의 시작(詩作) 과정을 밟는다. 현대시는 특정한 시상이나 의미의 선택에 따라 시의 율동을 나중에 선택함에 비해 현대시조는 전통시조 양식에 따른 특정한 율동 모형(模型)이 선행되고 이에 따라 이미지나 어휘가 선택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현대시는 의미생산적 율동화로 나아가기가 훨씬 자연스러우며 그래서 개성적 율동 충동과 속성에 따라 조성된 자유로운 율동현상이 중심을 이룸에 비해(그래서 자유시라 함), 현대시조는 이미 시조 양식이라는 주어진 율동모형을 따라야 하므로 자칫 도식적인 운율화로 되어 의미생산적인 율동화로 나아가기가 그만큼 어려워진다.

〈가고파〉처럼 시조의 주어진 모형을 그대로 따라 도식적 율격시행으로 일관한다면 복고취향 혹은 진부한 인상을 지우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작품의 율격은 그대로 시조의 정형율을 따르되 시행의 배분은 시적 율동으로서의 새로운 내적 질서 곧 ‘의미 질서’에 따라 율동을 조성해 나감으로써 의미 생산적 율동화가 실현되도록 하는 방법을 자율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따라서 현대시조의 시작과정은 주어진 정형율을 의미율(시행 배분과 연의 짜임에 의한)로 재편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시인의 역량은 바로 이러한 의미율에 의한 시적 억양과 시어의 전경화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발현되었느냐에 달리게 된다. 이런 점에서 고시조는 정형시라 할 수 있고, 현대시는 자유시라 할 수 있으며, 현대시조는 ‘자율적 정형시’라 할 수 있다.

도식적 운율화가 아닌 의미생산적 율동화로 나아가기 위해 시행배분과 연의 짜임만은 자율적 운용이 가능한 것이 현대시조의 형식적 좌표이자 방향이라는 것이다. 시행배분이나 연의 운용 면에서 시조 양식이라는 정형적 질서에 따라 선택 배열하기 보다 시상의 의미 전개와 표출하려는 정감의 질량에 따라 자율적으로 배열·선택함으로써 시에 활력과 긴장을 불어넣고, 시상의 흐름 속에서 미세한 감정의 추이를 생생하게 묘파해 내는 것이다.

이제 수상작 〈니나〉(《경남시조》 20집)를 통해 현대시조의 나아갈 방향을 짚어 보자.

천근 무게의/ 신발 끌고/ 한국에 온/ 소녀 니나/
비스켓처럼 바스라진/ 육신보다 더 슬픈 건/
열 식구 생계를 위한/ 칼끝 같은 시간의 압박.//
축축한 지하에서 죽도록 일하고도
←손에 쥐는 건 몇 장의 지폐뿐/
그것도 몇 달을 걸러/ 인심쓰듯 던져준.//
그리움에 서러움에 야위어간 육신/
뼈마디 그 마디마다 피멍바람 파고들지만/
비명도 복에 겹다고/ 가슴깊이 묻어온 밤.//
날 세운 결핵균/ 끝내 활화산 되어/
생솔가지 꺾이듯 명줄 놓아버렸다/
길떠날/ 노자도 없이/ 유기된 죽음이여.///

   ( /표는 원작에서 행 갈이를, ←표는 행 붙이기를 가리킴)

이해를 돕기 위해 원작의 시행배열을 일단 무시하고 전통시조형에 따라 필자가 환원해 본 것이다. 작품의 주제가 비정한 우리 현실에 대한 냉엄한 고발이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선명하게 담고 있는 것이어서 심미적 공감을 자아내기에 쉽지 않은 작품이다.

이러한 무겁기만 한 정치성 짙은 주제를 위에 환원해 보인 것처럼 전통시조형에 맞춰 도식적으로 작품화했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숨막히는 것이었을까를 상상해 보라(자연언어의 일상적 통사 의미 구조를 깨뜨리는 명사형 종결 기법의 빈번한 사용과 5음절의 과음보를 자주 활용함이 숨통을 틔워 주고 있음에도). 작품 곳곳에 내비치는 관념어와 상투적인 묘사까지 감안한다면 더욱 그러한 면을 떨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이 정형율 그대로 따르지 않고 생각이나 감정의 추이를 따라 의미율로 재편함으로써 주제의 무거움과 무미건조함을 벗어난 시도는 일단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시도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실현되었느냐가 관건이다.

정형율을 의미율(시어가 표상하는 의미와 형식이 갖는 의미를 포괄함)로 재편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따르기’와 ‘쪼개기’ ‘붙이기’가 그것이다. ‘따르기’는 작품의 시행을 시조의 정형율에 맞춰 4음보로 실현함으로써 전통시형의 안정적 호흡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고, ‘쪼개기’는 4음보의 율격시행을 2개 이상으로 쪼개어(분할 단위는 구, 음보, 단어에 이름) 작품시행을 실현함으로써 짧은 호흡으로 재편하는 것이고, ‘붙이기’는 율격시행보다 작품시행을 크게 하기 위해 다음에 이어지는 율격시행의 일부 혹은 전부를 붙임으로써 긴 호흡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따르기’는 낯익고 안정된 율동형에 호흡을 맞추어 나감으로써 정감의 평형을 유지하는 데 적합하고, ‘쪼개기’는 짧은 호흡을 통해 내면의 미묘한 감정추이를 섬세하게 드러내는 데 적합하고, ‘붙이기’는 긴 호흡을 통해 깊은 생각이나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끈끈한 감정을 장중하게 드러내는 데 적합하다.

이러한 재편의 방법은 주어진 율격모형을 따라 진행하려는 구심력과 그것에 제동을 걸어 진행의 기대를 차단함으로써 모형에서 벗어나려는 원심력 사이의 밀고 당기는 팽팽한 긴장감을 최대한 활용하는 세공의 기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율격적 진행을 이탈하려는 원심력은 함부로 작동시켜서는 작품의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시상의 전개와 표출하려는 정서의 질량에 따라 필연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율동 표현의 필연성은 작품적 의미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작품 〈니나〉는 1연+2연을 음보 단위의 ‘쪼개기’에서 출발하여 초장과 중장을 ‘붙이기’하는 데까지 나아감으로써 짧은 호흡에서 긴 호흡으로의 상승구조를 이루게 하고, 3연+4연은 그와 반대로 ‘따르기’라는 비교적 안정된 긴 호흡으로 출발하여 구(句) 단위 혹은 음보 단위의 ‘쪼개기’로 율동적 양감을 축소해 나가는 하강구조를 이루게 함으로써 고조된 감정을 추슬러 마무리하는 연 운용의 묘를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구도는 시각적으로도 역대칭 구조의 공간적 조형미를 구축해 보인다.

이렇게 〈니나〉는 ‘쪼개기’와 ‘붙이기’ 및 ‘따르기’를 모두 구사하여 의미의 생산적 율동화를 다양하게 시도함으로써 연 운용면에서 잘 짜여진 구도를 보이고 무미건조한 주제를 참신한 시적 발화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작품을 세부적으로 검토해 보면, 왜 그 행을 특별히 음보 단위로 쪼개어 호흡을 짧게 해야 하는지, 왜 그 행은 초·중장의 경계를 넘어 강제적으로 ‘붙이기’해서 특별히 긴 호흡으로 끌어가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일정한 질서 아래 율동적 양감의 조정을 보이지 않고 왜 그렇게 비균형의 혼란스런 율동변화를 보여야 하는지에 대한 필연성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는 의미율로의 재편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하기 어려운 점이 아닌가 한다. 이를테면 첫 연에서 둘째 연으로 이어지는 율동적 양감의 상승적 변화는 외국인 노동자 니나가 한국에 올 때는 너무나 절박한 상황에서 어렵게 왔음에도 그에게 돌아오는 반대 급부는 “인심 쓰듯 던져 준 몇장의 지폐뿐”이라는, 감정의 내적 미묘함에 이은 비정한 현실의 고발이라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끈끈한 감정과 조화를 이루어 의미의 생산적 율동화로 나아가는 데 성공하고 있지만, 셋째 연과 마지막 연으로 이어지는 율동적 양감의 하강적 변화는 니나의 “유기된 죽음”에 대한 정서적 질량과 의미의 강도에 맞는 적정한 조정을 했다고 하기 어려워 보인다.

시행의 배분은 느낌대로 자의적으로 해서는 혼란을 가져올 뿐이다. 시상 전개에 따라 ‘자연발화의 율동’과 ‘의미의 강도’ ‘정서적 질량’ 및 ‘시각적 공간미’라는 네 가지 요소의 적정한 조화와 질서에 의해 배분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나만 예를 들면 마지막 연에서 작품의 종결을 “유기된/죽음이여”라고 음보단위로 ‘쪼개기’를 했더라면, 첫 연의 시작과 마지막 연의 끝남이 수미쌍관을 이루어 시각적 조형미를 창출했을 터이고 “유기된”을 독자적 시행으로 배열함으로써 행말휴지에 의한 여백의 활용으로 니나의 죽음이 한국에서 “유기된” 죽음이었다는 점에 정서적 질량의 무게가 실리고 의미가 강화되어 작품의 주제가 더욱 살아났을 것이다. 그만큼 행 배열에 대한 면밀한 세공이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나〉가 갖는 강점은 어느 외국인 노동자의 유기된 죽음―“몇 장의 지폐”로 표상된 욕망으로 일그러진 비정한 우리 현실에 대한 엄정한 고발정신과, 외국인 노동자도 우리와 다른 타자가 아님을, 그리하여 다시는 그런 비정하게 유기된 죽음이 일어나지 않기를 갈구하는 그 따뜻한 ‘인간애’(저승 갈 노자까지 걱정하는)에 놓여 있다. 이는 범나비를 색깔이 다르다고 배제하지 않고 청산에 함께 가고자 하는 앞의 고시조로부터 면면히 이어오는 ‘상생과 조화’의 미학에 바탕한 소중한 전통정신의 현대적 발현이 아니겠는가!

※ 附記

본 논의에서 분석 대상으로 삼은 수상작 〈니나〉는 《경남시조》 20집에 발표된 것으로, 최근에 수상자가 작품을 다듬어 수정한 텍스트를 미처 입수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졌음을 밝혀 둡니다. 강연원고를 송부한 뒤에 수정본을 보게 되었는데, 상당부분 다듬어져 작품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따라서 수상작은 수정본으로 일단 정하고, 본고에서는 논지 전개상 수정 이전의 텍스트가 더 적절하기에 강연원고는 일단 그대로 두기로 했으니 이 점 착오 없으시기 바라며 아울러 양해를 구합니다. 원본에서는 정서적 미감 중심 혹은 미묘한 심리적 변화를 담은 작품이 아님에도 시행 배분의 변화가 혼란스러울 정도로 진폭이 컸었는데, 수정본에는 현실고발 성격의 무거운 주제에 걸맞게 차분하고 안정된 율동변화를 보여주어 작품의 격을 상승시켰습니다.
거기다 설명적 어휘와 군더더기 지시어, 생경한 관념어와 상투적 표현구 등을 상당부분 제거하거나 정감적 언어로 치환함으로써 작품의 응집력을 높이고, 서정적 미감과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한 듯 보입니다. 천재시인 소월도 문학지에 실었던 작품을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여 시집으로 출간했듯이 수상자도 자신의 작품을 끝없이 조탁해 가려는 태도는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격려와 찬사를 보냅니다. ■

■제7회 경남시조문학상 수상작품

니나

서일옥

천근 신발 끌고 한국에 온 소녀 니나
비스켓처럼 바스라진 육신보다 더 슬픈 건
열 식구 생계를 위해
지녔던 꿈의 실종……
축축한 지하에서 죽도록 일하고도, 손에 쥐는 건 몇 장의 지폐뿐
그것도 몇 달을 걸러
인심 쓰듯 던져주는,
그리움에 서러움에 야위어간 육신
뼈마디 마디마다 피멍바람 파고들지만
비명도 복에 겹다고 가슴깊이 묻어두었다.
뿌리 깊은 결핵균 끝내 활화산 되어
생솔가지 꺾이듯 명줄 놓아버렸다
길 떠날 노자가 없어
더 목 타는 죽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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