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의 타임머신

2012.10.30 11:54

이주희 조회 수:1326 추천:165


엄마의 타임머신 / 이주희




**휴일을 제외한 로스앤젤레스의 거리는 늘 복잡하?�. 다른 주에 사는 가족이 교통위반티켓을 받고 갔다는 브로드웨이를 지나, 구석진 곳에 몸을 낙엽처럼 떨치고 있는 무숙자 옆을 네 차례나 돌아왔어도 기다리는 사람은 나타나질 않는다. 같은 길을 빙빙 돌다 보니 정작 아끼려던 주차비보다 가솔린값이 더 들게 생겼다. "맛있는 것 먹으러 갈 거니까 내려와 계세요.”라고 미리 전화로 약속했지만, 슬슬 불안해졌다. 아무래도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핸들을 공용주차장으로 돌리려는데 낯익은 분홍빛 스웨터가 보였다. 엄마다.


비가 오려는지 도시의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하다. 한 점 바람이 때에 찌든 휴지를 구석으로 내몰고 가로수로 달려가 갈퀴질 한다. 우수수, 마른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나뭇잎들.

도로는 점심시간에 이르러 더욱 혼잡해졌다. 나는 여러 자동차와 함께 일렬종대로 선 옥수수 알처럼 신호대기를 하고 섰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둘러 Loading zone을 벗어났기에 제대로 못 봤던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이마에 앞 머리카락을 깻잎처럼 붙여 빗고 거기에 커다란 꽃핀을 꽂고 소녀처럼 앉아있다.

“ㅎㅎ~ 머리 손질하느라 늦게 나왔우?"

"그래. 너하고 데이트하려고. 우리 중국식당에 가자.”


불경기라 해도 식당은 북적거려 보였다. 나는 차를 세우고 “이런 꽃핀은 여기 있어야 더 예뻐.”라고 둘러대며 우스꽝스럽게 보였던 엄마의 머리핀을 빼서 정수리 뒤로 옮겼다. 식당 안에 들어서자 종업원은 우리를 이제 막 행주질을 끝낸 테이블로 안내했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냅킨으로 엄마의 턱받이를 해주고 녹차를 마시는데 엄마가 무언가를 주머니에서 꺼내 식탁 위에 펼쳤다. 노인센터에 나가 학습지에 그린 그림 낱장을 뜯어온 것이다.


"엄마, 하늘에서 뭉게구름이 내려와 산 위에 걸쳐있네."

"아니야. 하늘에서 구름이 내려온 게 아니라 산에서 구름이 뿜어져 나오는 거야."

"구름은 공기 가운데 수증기가 물방울이나 얼음알갱이로 변해 희거나 검게 뭉쳐 공중에 떠다니는 거예요."

"아니야! 그게 아니라 산에서 빠져나오는 거라니까 그러네. 내가 그린 건데 내가 몰라?”

몇 마디 말이 오가다 세상에나! 엄마의 입에서 불쑥, 중국 욕이 튀어나왔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데, 못난 딸이 노령의 미술가 기분을 망쳐놓은 것이다. 나는 중국어를 모르지만, 살아생전의 외할머니로부터 욕 몇 개를 귓속말로 배워 둔 게 있었다. 얼굴을 찡그리며 국물을 떠먹던 숟가락을 내려놓자 엄마는 “맛이 뭐 이래? 다음엔 절대 이거 시키지 마.”라고 하면서 더는 젓가락을 잡지 않았다. 하필 오늘 점심이 울면과 잡탕이라니.


오래전 한국에서 어린이 미술대회가 있었다. 그림의 제목은 '어머니'였다. 000 선생은 심사과정에서 떨어트린 작품이 마음에 걸렸다. 커다랗게 가운데 자리한 어머니의 얼굴을 새빨갛게 칠해놔서다. 혹시 이들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여 담임선생을 앞세워 그 어린이의 집을 찾아갔다. 마당을 들어서니 그림배경에 있던 것처럼 누렁이 개 한 마리와 분꽃 그리고 절구통이 보였다.

000 선생이 홀로 집을 지키고 있던 어린이에게 빨간 얼굴에 대해서 물었?�.

"우리 엄마는요. 절구질할 때 너무나, 너-무나 힘들어서 얼굴이 빨개져요.”

어린이의 어머니는 떡 장사였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그림이 있다 한 들, 어린 자식이 어머니의 고생을 그려낸 것에 비할 수 있겠는가! 000 선생은 자신의 마음에 티눈이 있다는 것을 알고 무척 부끄러웠다고 한다.


내 엄마가 칠십 대 나이에 꿨던 꿈 대부분은 어린 자식들과 함께 배곯던 시절에 가 있었다고 했다. 팔십 중반을 넘기고부터는 마치 연어가 태어난 곳을 찾아 거슬러가듯, 자신이 출생하여 시집가도록 성장한 중국 땅에 가 있다고 했다. 걸림돌에 차이면 아픔을 참지 않아도 되는 비명도 지르고, 꽃밭에선 꽃도 따며 놀다가 돌아가신 부모도 만나고 잊어버린 동무들도 만난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곳에서 현재로 돌아오는 시간은 존재와 부재가 느껴지는 순간이 아닐까? 앞으로 엄마는 더 빈번하게 시간여행을 떠날 것이며 그곳에 머물게 되는 시간도 점점 길어지리라.


우리는 함께 창 밖에 내리는 겨울비를 바라보았다. 비를 피해 뛰어 들어오고 나가는 식당의 손님이 줄어들지 않는다. 조금 전 일은 다 잊어버린 엄마가 어리광 섞인 혀 짧은 말을 한다.

"얘, 어서 비닐봉지를 달라고 해”

"왜요? 음식 투고해 가려고?”

"아니. 너 머리에 쓰고 차 있는데 까지 가라고. 나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게."

아! 나는 몰라도 너무 모르고 산다. 엄마의 마음을....... 맞다. 푸른 하늘 은하수에 하얀 쪽배가 떠가듯, 엄마의 산에선 구름이 나온다.


식품점에서 산 찬거리를 달팽이 집 같은 엄마의 집에 내려놓고, 비가 쏟아지는 프리웨이를 달려간다.
휴대전화가 울린다.
엄마의 염려가 빗물처럼 들어있다.


-(재미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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