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탑

2012.09.14 13:21

이주희 조회 수:1259 추천:192


돌탑 / 이주희


**와르르, 또 무너졌다. 옆구리 터진 김밥처럼 기어 나온 돌멩이가 담벼락 밑으로 굴러간다. 이번만은 제대로 쌓겠다고 공도 많이 들였건만, 마무리 단계에서 그만 쐐기 박은 것을 건드렸나 보다. 움찔하며 중심의 축이 흔들리더니 맨 꼭대기에 올렸던 돌이 마치 전쟁영화에서 잘린 적장의 목처럼 굴러 아슬아슬하게 발등을 비켜나갔다. 뒤이어, 우르르하는 소리와 함께 탑 전체가 폭삭 내려앉고 만 것이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한참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니 눈이 자꾸 침침해서 마당으로 나와 푸른 잔디나 보며 잡초나 조금 뽑아주고 집안으로 들어가야지 했다. 시선이 마당 한 귀퉁이로 갔다. 그곳에는 분갈이나 채소 모종을 할 때 파헤친 흙에서 나온 돌을 모아놓은 돌무더기가 있었다. 전부터 저 돌들을 가지런히 쌓아둬야지 하였기에 쉽게 생각하고 덤벼든 일이다. 첫 번 쌓았을 때는 화단에서 나온 돌이라서 자잘하고 양도 적어 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았다. 그저 차곡차곡 올려놓다 보니 물통만 한 덩치가 되었는데, 며칠이 지나 나가보니 어째 좀 작다 싶었다. 조금 크게 만들어볼까 해서 장독대로 가서 된장 항아리 밑에서 코를 막고 있었을 짱돌도 들어내고, 미나리 자라는 물 뿌리게 옆에 세운 돌도 빼내고, 흙바닥에 듬성듬성 박아놓은 돌도 몇 개 파내서 대추나무 밑으로 가져다 놓았다. 먼저 흙에 덮여 있던 나무껍질을 모두 걷어낸 다음, 한쪽 팔 너비로 둥그렇게 터를 잡아 고루 바닥을 펼치고 돌을 하나씩 올려 쌓았다. 대부분 내 집 마당에 있는 돌들은 모난 부분이 물살에 깎인 개울 돌이다. 사이좋게 겹쳐 주려 해도 둥글둥글하다 보니 서로 밀치며 나둥그러진다. 그래도 어찌어찌하게 어깨동무를 시켜 자잘한 것으로 공간을 채우며 허리만큼 쌓아올렸는데 그만, 윗부분에 가서 쓸 잔 돌멩이가 거덜이 났다. 한참을 커다란 돌 여러 개를 들었다 놨다 해서인지 허리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해서 “에구구, 사서 고생이로구나!”라고 중얼대며 집안으로 들어와 며칠을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 또다시 마당으로 나온 것은, 한밤중에 들짐승의 수선스런 발걸음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나와 살펴보니, 서리꾼들은 잘 익은 복숭아만을 따서 무너진 돌탑에 앉아 먹은 흔적을 남겼다. 모나고 각진 돌이 서로 맞물리기에 수월할지도 모른다. 나의 시원치 않은 돌 쌓는 솜씨를 돌 탓으로 돌리다가 중국의 만리장성을 생각하니 다시 쌓아야 한다는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다. 우선 헐린 탑에서 큰 돌과 작은 돌을 각각 나눠놓고 쌓기에 편한 납작한 것은 아껴 쓰게끔 따로 두었다. 흙 묻은 장갑을 탈탈 털어 다시 끼고 땅거죽을 평평하게 다져준 다음, 거북등처럼 생기고 힘도 엄청나게 셀 것 같은 돌을 납죽 엎디어 놓았다. 각진 돌은 서로 어깨를 보듬도록 맞물려놓고, 모양새 다른 돌은 어우러지게 얽히고설키게 해주었다. 유난히 별난 돌은 선을 따라 껴 붙이고, 빈 여백은 잔돌이 모자라지 않게 상황을 봐가며 자근자근 하게 채워나갔다. 어쩌다 개미 몇 마리가 와서 따끔따끔 팔뚝을 깨물고 달아나도 나 몰라라 땀 흘리며 윗부분까지 쌓아 올린 끝에 우두머리 돌이 꼭대기에 올라앉게 되었다. 그런데 어쩌랴! 가까이서는 몰랐는데 댓 걸음 뒤로 물러나서 보니 삐딱한 것이 어째,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좌측 쐐기를 높게 박아줬나 싶어 보기 거슬린 돌을 뽑는다는 것이 그만 중심축을 건드렸나 보다. 윗돌이 내 발등을 찧으려 달려 내려오고, 탑 무너지는 소리도 컸던지 집안에 있던 개가 듣고는 자기 목소리보다 더 큰 저 소리는 뭐냐는 듯 짖어댔다. 나는 여름은 여름다워야 한다고 이곳 더위를 그렇게 인정하며 지내지만, 어젯밤은 참으로 무더웠다. 잠을 청하려 누워도 무너진 채로 있는 돌무더기가 눈에 선해서인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닳고 닳은 개울가의 돌멩이나, 볼품없이 작고 자잘한 돌멩이나, 자연 그대로의 거칠거칠한 돌멩이나 모두 자기 몫의 자리가 있었던 것처럼, 사람도 제 나름대로 탑을 쌓으며 살아갈 것이다. 내일은 날이 더워지기 전에 아침 일찍 일어나야겠다. 저 무너져버린 탑처럼 지치고 힘들던 기억을 말끔히 헐어내자. 머리 위 뙤약볕에서 가을을 흠뻑 물들여가는 대추도 따 먹으며 튼튼한 주춧돌을 깔리라. 그리곤 그리운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사랑의 돌을 얹으리라. 내 삶에 행복이란 탑을 쌓을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창조문예 2010년 2월(북미주동포 문단 특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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