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의 방

2010.07.28 13:17

이주희 조회 수:2306 추천:317


엄마의 방 / 이주희

**바람이 건물 벽을 떠밀다 빌딩 숲 사이로 빠져나간다. 오늘도 어머니가 사는 고층 아파트는 보수공사를 한다. 자투리카펫이 건물 입구에서부터 좌측 엘리베이터까지 너저분하게 깔렸다. 그것들은 오래전에 벗은 뱀의 허물처럼 낡아 보이고, 군데군데 흘려 있는 시멘트 가루는 메줏덩이에 핀 푸른곰팡이 같다. Notice 종이 하단에 그려진 화살표가 허리를 꺾고 가리키는 곳은 우측 엘리베이터다. 문이 막 닫히려 하기에 서둘러 발하나를 들여놓는다. 엘리베이터는 한 사람을 태우고도 힘에 겨운 듯 삐꺽 대며 올라간다. 마치 무릎관절을 앓는 어머니가 일어설 때 흘리는 신음 같다. 보수공사는 내가 내려서는 00층에 벌어져 있어 기계소음이 벽을 뚫고 나올 것처럼 시끄럽다. 미세한 먼지로 말미암아 알레르기가 예민 반응하며 재채기를 일으킨다. 대다수 건물이 그러하듯, 이 아파트도 엘리베이터 중심으로 통로가 나 있으며 입주자의 90%가 한국노인이다. 복도는 스물네 시간 전등불로 밝혀져 있다. 점심때 미처 환기통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내 나라 특유의 반찬냄새가 미지근한 공기를 타고 코끝에 와 닿는다. 이제 삼십여 걸음 하면 다다르는 어머니의 집 현관문은 짙은 밤색으로, 중앙에는 밖을 내다보는 외눈박이가 있다. 어머니는 조금 전처럼 문을 조금만 열고, 그 틈새로 밖을 내다보기 때문에 외눈박이 사용을 한 번도 안 했을 것이다. "엄마, 나야!" 하고 문을 활짝 열고 들어서면 붙박이 신발장이 잠시 문 뒤로 숨어버린다. 밟고 선 발판깔개 옆에는 납작한 종이상자가 놓여 있다. 나도 어머니가 외출에서 돌아오면 하는 것처럼 신을 벗어들어 상자 안에 나란히 집어넣는다. 주방 수도꼭지 옆 소쿠리 선반에는 한의원 이름이 새겨진 물컵 두 개가 세워져 있다. 싱크대 서랍 첫 번째 칸에는 수저가, 폭폭 삶아 말린 행주는 두 번째 칸에, 냉장고 근처 쓰레기통 옆에는 두툼한 전화번호 책이 여러 권 쌓여 있다. 어머니는 마켓에서 식품을 담아왔던 플라스틱 봉지를 입 벌려 쓰레기통 안에 겹겹 집어넣는다. 봉지에 쓰레기가 어느 정도 차오르면 호박 속 파내듯 한 겹씩 들어내고, 곁에 있는 전화번호 책에서 몇 페이지를 쭉 찢는다. '엄마! 공용의 책을 그렇게 찢으면 어떡해?' 싫은 소리를 하면 "에구!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전화번호 바뀐 지가 옛날 고리짝이다.’라며 복도 끝에 자리 잡은 쓰레기장으로 간다. 그리곤 던진 쓰레기봉지가 곤두박질하며 내려가는 타이밍에 맞춰 손잡이를 감싸 쥐었던 종이를 후딱 집어넣는다. 찜찜한 것을 떨쳐낸 듯. 두 손을 탈탈 털며 개운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오다 뒤따라온 나를 보고 '눈이나 좀 붙이지. 뭣 하러 나와? 한참 운전하고 집으로 돌아갈 텐데.'라고 걱정의 말을 한다. 거실의 선반에는 공기를 정화한다는 숯 그릇, 선인장, 숫자가 커다랗게 새겨진 전화기, 구형 TV, 순간이 박제된 몇몇 사진 등이 나열돼 있다. 모조품이지만 벽에는 ‘최후의 만찬’ 그림도 걸려 있고, 코너에는 내가 만든 실크 벚꽃 나무도 있다. 조화가 많아져 장례식장 같다고 해도 눈에 예쁘게 보이는 것도 괜찮다며 그대로 두는 어머니는 두 개의 침대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무릎 수술할 때 들여놓은 병실용으로, 동쪽 창가에 놓고 그 위에서 성경책도 읽고 TV도 보면서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지나간 세월을 꿈속에서 그렸다 지웠다 하는 침실. 고동 속같이 깊은 곳에 자리한 또 하나의 침대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자동차가 빌딩 숲을 헤치며 끌고 오는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버리지 못하고 이민 짐에 넣어온 빨래판처럼, 우툴두툴한 삶이 잠꼬대로 퍼 올려지는 공간. 툭하면 막혀버리는 하수관 파이프같이 얽히고설킨 기억들이 서성거리는 방안.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자식에겐 제 살 베어 잘근잘근 씹어 먹이고, 옷장 안 태극기 밑에 넣어둔 연분홍 수의壽衣를 가엾게 어루만지는 여인. 눈감아도 손에 잡힐 듯 선연히 떠오르는 달팽이 집 같은 방에서, 도대체 어머니는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기에 전화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보청기를 엉뚱한 곳에서 찾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중앙일보. 2011.1.31) (미주문학. 2011. 수필동인.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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