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추 흰 나비

2010.09.22 13:50

이주희 조회 수:1821 추천:296


배추 흰 나비 <범죄소설> / 이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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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5월. 한창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 홍제 천(川)이다. 말라버린 내에 굴착기가 들어가 바닥을 파헤치고 있다. 택시 기사는 신호등과 개울을 번갈아 살피며 그 상황에 대해 설명해준다. 지금 징검다리를 놓고 있으며, 머지않아 인공적으로 퍼 올린 물이 흘러내릴 것이라고. 정규는 건천의 먼지가 도로를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고, 내렸던 차창을 올렸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머뭇거리던 흙먼지를 끌어다 버스정류장 지붕 위에서 흩뜨린다. 어디선가 개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정류장의 쓰레기통을 뒤엎고 뒤적거린다. 무엇을 찾는 것일까? 먹을 것이라면 식당주변이 더 나으련만, 때에 찌든 털이 뭉치고 갈라져 밀대 끝에 달린 걸레처럼 보인다. 
“저기 앞에서 세워주십시오” 
말하는 사이에도 차바퀴는 굴러 등기소 앞을 지나치고 말았다. 
"어? 손님, 내리시게요? 백련사에 거의 다 왔는데······."
"제가 찾아볼 것이 있어 그렇습니다. 여기서 내려주십시오.” 
택시는 승객의 등을 등받이에 털썩하니 부딪치고서야 멈추었다.
“손님! 저기 세 사람 걸어가는 것이 보이시죠? 그리로 쭉 400여 미터 올라가시면 백련사가 나올 겁니다.” 
백련(白蓮)산은 서울시 은평구와 서대문구 사이에 있는, 높이 215.5m의 산이다. 마치 한 마리 매가 날갯죽지를 양 방향으로 펼친 형상을 하고 있다. 동쪽의 길 흐름이 서쪽길보다 가파른 것은, 오래전 홍제천의 물이 산 밑자락을 깎으며 흘러서일 것이다. 
정규는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걸었다. 고국의 봄은 참으로 화사하다. 개나리, 진달래꽃이 연달아 피고 지더니 이제는 아카시아 꽃이 향기를 내뿜는다. 홍연초등학교를 지나자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헉헉 소리를 내며 자전거로 산길을 오르는 사람들. 여섯인가 했더니 등 뒤에서 다섯 명이 뒤따라간다. 모두 검정 바탕에 노란 줄이 들어간 옷을 입었다. 그들 못지않게 숨이 슬슬 차오른다. 잠바를 벗어 허리에 동여맸더니 한결 편하고 시원하다. 정상둘레에는 철책이 둘려있고, 팔각정자가 세워져 있다. 사진 찍어달라는 청춘남녀의 청을 들어주고 정자에 올랐다. 서울근교가 시원스레 펼쳐졌다. 남산 타워와 안산도 보이고, 형무소자리에 들어선 독립문공원도 보인다. 세월은 머릿속에 저장된 그림을 사뭇 다르게 바꿔 놨다. 고층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들어찬 독박골과 개여울, 사격연습을 하고 돌아올 때면 들렀던 홍어 횟집, 진관사 계곡 초입에 자리한 짱구네 식당, 수많은 황금 부채를 펼쳐 들던 서오릉의 은행나무 등등. 
사진을 찍어 줬던 청춘남녀가 시야에 들어온다. 남자가 가리키는 손가락 방향을 여자가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저들은 전(全)씨 부자(父子)사건에 대해 모르는 세대다. 그들이 서 있는 저 뒤 내리막은 뒤엉킨 칡넝쿨과 나무들로 밝은 대낮도 저문 저녁 같은 곳이었다. 
 *1975. 7월 3일. 00파출소에 엽기적인 사건이 접수되었다. 신고자는 새벽 산행을 마치고 하산하던 중년의 부부였다. 그들이 올랐던 길로 가지 않고 후미진 곳으로 내려간 것은, 지난번처럼 영지버섯을 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다. 장마를 치러낸 산은 더욱 푸르렀으며, 무성해진 숲에선 짝을 찾는 매미들이 맹렬히 울어댔다. 남자는 여자에게 뱀이 나올지 모르니 조심하라며 앞서 나갔다. 중턱을 지날 즈음, 꽃처럼 고운 버섯이 보이기 시작했다. 독버섯일수록 찬란한 색깔을 지녔다기에 그냥 지나치려는 발길을 고약한 냄새가 붙잡았다. 어디에서 나는 냄새일까? 둘러보니 댓 걸음 옆으로 들어선 곳에 썩은 나무둥치가 넘어져 있고, 그 너머로 수많은 날것이 드나들고 있었다. 왠지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조심스레 거리를 두며 다가갔다. 바글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무엇인가에 잔뜩 달라붙어 있는 금파리 떼였다. 인기척을 느껴서인지 일제히 자세를 바꿔 잡으며 금속광택을 번뜩였다. 윙윙, 기분 나쁜 날갯짓 소리. 때마침, 뒤따라오던 여자가 남자 곁으로 다가와 오싹한 광경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날아오른 금파리 밑으로 드러난 것은 상아색 구더기에게 눈, 코, 입을 갉아 먹히고 있는 시체였다. 거기에도 먹이 사슬은 있어 딱정벌레가 구더기를 잡아먹으려고 이리저리 기어 다녔다. 으악! 그들은 동시에 뒤로 나자빠지며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지른 비명에 놀란 매미들이 울음소리를 뚝 끊었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숲 속에 매미란 매미는 모두 몰려나온 듯,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혼비백산해서 달아나는 그들 뒤를 따라가며 귀청이 떨어져라, 울어댔다. 맴맴 맴······.
 “어찌 인간이 이토록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담당파출소(지구대) 직원이 현장에서 내뱉은 말이다. 사건을 인계받은 감식반과 강력계 형사팀도 훼손된 주검을 보고 간담이 서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범인의 흔적이 빗물에 씻겨나가서인지 감식반원들의 지문감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제는 국과수(국립과학연구소)에서 고체, 기체, 용액 등의 기법으로 잠재지문을 살피게 된다. 그들은 시체에 번호를 매겨가며 조심스레 종이에 싸서 상자에 담았다. 뒤이어 강력계 형사팀이 범인의 실수를 찾아 나섰다. 현장의 내리막 풀 섶에서 부러진 나뭇가지와 나뭇가지에 걸린 비닐조각이 발견됐다. 왜? 애써 시신을 끌고 여기로 왔을까? 코앞 낭떠러지기를 피해 오른 것을 보면 이곳이 외지다는 것을 아는 자다. 산을 거의 다 내려온 곳에서 날짐승에게 잡아먹힌 것으로 보이는 닭털이 보였다. 젖어있었는지 오그라진 채 말라있었다.
 
 *장 형사가 강 수정(姜琇廷)을 처음 본 것은 72년 1월, 新新商社 윤재철(尹在哲) 사장의 장례식에서였다. 그녀의 남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논밭을 팔아 서대문 안에 삼 층 건물을 지었다. 맨 위층은 살림집, 일이 층은 공장이었다. 스웨터를 짜서 수를 놓고 다듬질한 옷은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 공장 사람들은 윤 사장이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71년 12월 초, 제일 먼저 경찰 직원에게 떡값을 보낸 이도 그였다. 당시만 해도 공공연한 관행으로, 직원들은 여기저기에서 들어온 성금을 모아 고루 분배했다. 상사의 몫은 서랍 속에 슬쩍 넣어 진급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했다. 같은 달 12월 25일 오전 9시 50분경, 000 호텔에서 대형화재가 일어났다. TV로 생중계된 이 화재에서 윤 사장의 삶이 마감됐다. 주변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장 형사도 그런 마음으로 동료와 함께 조문을 갔었다. 미망인은 머리 위에 나비화석처럼 보이는 리본 핀을 꽂고,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식어가는 국밥을 떠먹고, 형기대(형사기동대)에 오르니 두 달여 전에 요절한 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침울한 분위기에 젖어 카스테레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었다. 
-그 시절 푸르던 잎 어느덧 낙엽지고 달빛만 싸늘히 허전한 가지 바람도 살며시 비켜 가건만 그 얼마나 참았던 사무친-
“어이! 그 인생무상(人生無常)한 노래 좀 꺼.” 
동료 하나가 운전을 하는 경관에게 소리쳤다. 장 형사는 마음으로 따라 부르던 노래가 멈춰진 것이 아쉬웠지만, 말없이 거리를 바라보았다. 
“신신상사는 은행 돈 하나 빌리지 않고 건물을 지었다던데? 그런 과부하나 만나 살면 팔자 고치겠지? 그러면 이리 추운 날, 복날 개 끌려가듯 떨며 수사 나가지 않아도 될 텐데. 이봐! 박 형사, 안 그래? 자네도 일찍 장가간 거 후회되지?” 
김 형사의 말을 받쳐주는 이가 없자, 옆에서 눈감고 있는 박 형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다른 날 같으면 맞장구도 쳐주며 우스갯소리도 나왔겠지만, 장례식장을 다녀와서일까? 서글픈 노래를 들어서일까?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네 삶이란, 탄생과 더불어 죽음으로 가는 여정이며 미립자로 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허무마저 얼어가던 겨울밤에 히터까지 고장이 나버린 차. 날씨는 왜 그리 춥던지. 

*미망인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3년이 흐른 후였다. 
사건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 경찰이다. 급히 출동 나간 시장 안에서 칼부림으로 떠들썩하게 한 자를 제압하다 팔을 베었다. 다섯 바늘 꿰매고 사무실로 돌아오니 책상 위에 예쁘장한 카드가 놓여 있었다. 보낸 이, 티파니? 이름을 떠올려보았지만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는 영화제목과 뉴욕 5번가에 있다는 보석점이라는 것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봉투를 뜯어보니 티파니는 레스토랑의 상호였다. 신신상사를 정리한 강수정이 경양식레스토랑 오픈을 앞두고 보낸 초대장이었다. 식당은 독특한 실내장식과 메뉴가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져 얼마 되지 않아 입소문을 탔다. 강력반 팀도 가끔 들러 분위기와 음식을 즐기곤 했다. 
우기(雨氣)에 들어 티파니의 손님이 주춤할 때, 강수정은 제주도에 사는 친구로부터 며칠 놀다가라는 전화를 받았다. 인척에게 레스토랑의 결재를 부탁하고, 공항까지는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 일주일 머물 짐을 꾸려 가방을 끌고 밖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포드 20M 세단이 스르르 다가왔다. 운전자는 감색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젊은이였다. 
“혹시, 강수정 씨 아니세요?” 
“뉘신 지? 저를 아세요?” 
“그럼요. 신신상사에 물건을 대들인 적도 있고, 윤 사장님 장례식에도 갔었는데요.” 
“어머! 그러셨어요. 미안합니다.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어디를 가시는지 방향이 같으면 타고 가세요. 저는 강서로 갑니다만?” 
신세를 지겠다며 차에 올라 장마가 끝나간다느니 하며 화기애애한 말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건네준 음료수를 마시지 않았어야 했다. 차는 공항으로 가지 않고, 수색으로 빠져 일영으로 달려갔다. 
강수정이 심한 갈증을 느끼고 눈을 떠보니 창고 안 군용침대 위였다. 땅까불하듯 몸을 움직여 보았으나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입은 테이프로 봉해졌고, 몸은 담요로 둘둘 말려 묶여있다. 마치 배춧잎에 붙은 애벌레 같다. 도대체 누구일까? 나를 알고, 죽은 남편까지 아는 사람. 아무리 생각해봐도 윤곽이 잡히질 않는다. 남에게 원수진 일도 없는데, 혹시 돈 때문일까? 정신이상자라면 어찌하나? 낯선 자의 친절을 믿었던 경솔함을 후회하고 있는데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무더운 날씨에 떨고 계시는군요. 두려우시죠? 하물며 이러는 전 오죽하겠어요. 저도 강수정 씨 못지않게 무서워죽겠습니다. 자, 조금만 마음을 열고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그러면 집으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만, 섣부른 행동을 하실 때에는 저 자신도 어떠한 해를 가할지 모릅니다. 참고로 여기에선 소리를 질러도 들어줄 이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동의하신다면 고개를 끄덕여주세요.”   
강수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입에 붙였던 테이프가 떼어졌다. 아직까진 무례하게 굴지는 않지만, 종잡을 수 없는 눈빛을 가진 자다. 커다란 물주전자를 들고 오기에 해코지하려는가 싶어 절로몸이 웅크려졌다.
“목마르실 겁니다. 입에 대 들릴게요. 조금씩 예, 예, 그렇게요. 다 드셨죠? 그럼, 묻겠습니다. 부인은 죽은 남편의 사랑을 믿습니까?”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강수정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믿는다고 답했다. 
“저런! 그렇게 믿었던 남편이 겁탈이라는 못된 짓을 했었대도 그리 말하겠습니까? 죽은 사람이라고 쉽게 말씀하시는군요.” 
“공연히 떠난 사람을 흠집 내지 마세요. 행여 당신 말대로 살아생전 제 남편이 벌 받을 짓을 했다고 쳐요. 벌주시는 것은 신의 몫이지, 당신의 몫은 아니라고 봅니다. 돈을 원해 이러는 거라면, 그 요구는 들어 드릴 수 있겠네요.” 
강수정은 자신이 던진 말에 상대방이 나쁘게 돌변하지는 않을까 두려웠지만 태연한 척 말을 끝냈다. 
“돈? 저도 쓸 만큼은 있습니다. 겁탈? 당신이 아름다운 분이라는 걸 알지만, 제 타입은 아닙니다. 그러니 관심 없어요. 신? 신이라. 사람들은 누리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못 가진 자는 가지려고, 가진 자는 영원히 누리기 위해서요. 그런 탐욕을 감추려니 성스럽고 지적으로 포장된 탈출구가 필요했겠지요. 부인이야말로 신을 믿는다면 제게 충고하지 마시고 신에게 맡기십시오.” 
젊은이는 사료부대 위에 올라앉아 한참을 턱을 고이고 있었다. 흐르는 침묵이 앙금 되어갈 즈음, 자신의 이름을 전태문(全泰聞)이라 밝히며 시작된 지난 그의 발자취가 메마른 음성에서 덩굴처럼 끌려나왔다.

*군 제대가 다가오고 있을 즈음, 강원도 지방에는 첫 서리가 내렸다. 순영(順瑩)이 찾아왔다. 밖은 스산했지만 둘이 머무는 방은 따뜻했다. 순영은 김 서린 유리창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태문은 순영을 등 뒤에서 끌어안고 저물어가는 창밖의 들녘을 바라보았다. 이름 모를 새가 긴 목을 빼며 노을 진 하늘을 날아갔다. 가지를 떠난 단풍잎은 저 갈 곳을 찾아 내렸고, 갈댓잎은 바람에게 몸 뉘어 길을 내주었다. 목덜미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가슴을 싸하게 흔들었다. 돌아서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이 그윽했다. 몸짓은 서툴었지만, 신체 건강한 두 사람이었다. 
태문은 순영에게서 생리가 멈췄다는 편지를 들고 제대를 했다. 대구행 버스를 탔다. 이제 양가의 결혼반대쯤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날벼락이었다. 그녀가 화재로 죽었다는 것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아울러 그녀의 부모는 자신의 어머니 죽음에 관해서도 말을 꺼냈다. 충격에 충격이 더해졌다. 그녀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니! 그녀를 알던 사람들을 모조리 찾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코 흘리기 친구로부터 치 떨리는 소식을 들었다. 
-이 부분에서 말을 끊은 전태문은 몸을 일으켜 침대로 와 무엇인가를 밑에서 꺼냈다. 녹음기였다. 스위치를 켜자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순영이는 애인이 제대할 때까지만 있게 해달라고 했어요. 임시직 일이라도 하겠다고 들어간 곳이 신신상사였죠. 저도 넉넉한 살림이 아니다 보니 말리지 못했어요. 3주나 다녔을까? 타고 오던 버스가 고장이 났대요. 다음 버스를 기다리고 섰는데 승용차를 타고 지나던 윤 사장이 보고는 태워주었대요. 워낙 좋은 일을 많이 하는 분이라 의심 같은 것은 상상도 안 했대요. 집에 다 와서 물 한 잔만 달래더래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따라 제가 일이 늦게까지 있어 친구가 욕을 당할 줄 전혀 몰랐어요. 임신 중이라고 해도 안 믿더래요. 물론 표시 나게 배가 부르지 않았지만. 애인이 제대할 날짜는 임박해오고, 몸은 더럽혀지고. 일을 나가지 않으니까 윤 사장이 문밖에 와 진을 쳤지요. 친구가 어떤 결심으로 나오라고 한 000 호텔 이층식당으로 나갔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죠. 어디다 하소연할 곳이 없이 죽은 순영이만 불쌍한 거죠. 내용을 쥔 윤 사장도 사라졌으니. 후유~” 
“그만! 그만!” 강수정이 소리쳤다. 달칵하며 녹음기가 꺼졌다. 정태문의 독백이 쏟아져 나왔다. 소리는 깊은 우물에 잠긴 목울대에서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애절하게 하울링 하는 짐승의 소리 같기도 했다. 
“아! 내 여자와 아기가 농락을 당하고 숯이 됐다니! 가슴이 으깨지는구나! 끓어오르는 분노를 끄집어내지 못해 내 머릿속도 숯덩이가 되어간다. 윤 재 철! 너는 네가 들어선 시궁창에서 아가리를 벌려 곪아가는 너 자신을 뜯어먹고 있으라.” 
전태문은 무릎 위에 고개를 묻고 울기 시작했다. 강수정은 묶인 채로 울다가 잠이 들었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감쌌던 담요가 허물 벗은 껍데기인 냥, 침대 끝에 걸쳐있다. 강수정은 용기를 내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태문이 다가와 개수대 옆으로 데려갔다. 오줌 누는 소리가 수치심과 두려움의 바닥을 치며 들렸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문이 배고프냐고 물었다. 강수정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저기서 죽은 자에게 이를 갈고 있는 자에게 위로를 먼저 해줘야 하는지, 달아날 궁리를 먼저 해야 하는지,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인질인 자신이 인질범의 심리에 동조하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며. 그가 먹을 것이 있으면 찾아 먹으라며 밖으로 나갔다. 딸가닥, 문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먹어야 도망갈 힘도 생긴다.”라고 뇌까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사료부대 너머로 배추와 칼이 보였다. 집으려 팔을 뻗치는데 밖에서 문 따는 소리가 들렸다. 칼이 생각난 그가 헐떡거리며 되돌아온 것이다. 옷을 여미는 것을 보더니 어서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빼앗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강수정은 순간, 자신이 감춘 칼이 나를 지키기 위한 은장도일까? 저자를 해하려는 무기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휘청! 개수대로 달아나는 그녀의 발이 사료부대에 걸렸다. 몸이 공중 나비 하며 바닥에 내리박혔다. “어? 아, 안 돼!” 다급하게 부르짖는 전태문의 목소리가 아득한 곳에서 들려왔다. 따듯한 것이 배와 손을 적시며 흘러나왔다. 빼 꼼이 열린 문틈으로 검붉은 하늘이 일렁거리더니 소용돌이치며 초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태문의 아버지, 전 계상(全桂爽)은 경상도 사람으로, 병아리 감별사였다. 출산예정일을 한 달여 앞둔 아내가 감별사 일을 그만두라고 했다. 부화장에 따라갔다가 차마 못 볼 것을 보았다며, 인간이 지능 낮은 생명에 하는 짓이 너무나 잔인하다는 거였다. 동물을 유난히 사랑했다거나 자신의 직업에 대해 말을 나눈 적이 없었기에, 그런 아내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동물해방론자라도 된 거요? 오늘 저녁 밥상에도 계란찜을 올렸잖소.” 
“생각을 해봐요! 당신 손으로 가려낸 수컷병아리가 산채로 버려지는 모습을. 언젠가는 인건비 아낀다고 분쇄기에 넣고 갈아버릴지도 몰라. 어유, 끔찍해!” 하긴 바라보는 가치관이 다를 뿐, 아내의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감별사는 부화한 병아리의 생식기형태 등을 보고 암, 수컷을 판단해 낸다. 워낙 사룟값이 비싸다 보니 수컷은 키우지 못하고 처치해버린다. 그렇다고 암컷으로 살아남은 병아리들이 그림처럼 예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키우는 방법에 차이는 있지만, 어떤 농장주는 전등불로 닭의 눈을 눈부시게 해서 보름 동안 잠을 재우지 않는다. 그다음에는 켰다 끄기를 40 여일 반복한다. 좁은 공간에서 낮과 밤이 헷갈린 닭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알을 낳고, 부디 끼면 서로 쪼아 상처를 입힌다. 아내는 아들이 두 살 되도록 조르다가 끝내는 목숨을 끊고 말았다. 전 씨는 엄마에 관해 기억할 것이 없는 자식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함께 지냈다. 아들은 반듯하게 자라 아가씨와 사랑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참으로 넓고도 좁았다. 결코 돌아보고 싶지 않은, 아내 죽음에 관해 소상히 알고 있는 사람을 상견례에서 만났다. 서둘러 거주지를 경기도 일영으로 옮겼다. 그러자 맞서던 아들이 군대를 가버렸고, 복무기간이 끝났음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농장 허가를 받아 양계장과 창고를 지어가며 이제나저제나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찜통같이 무더운 날씨다. 국과수 실내는 냉방시설로 서늘했다. 공기정화기도 부패가 심한 시체의 냄새가 퍼지지 않게 하려고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이곳엔 범죄심리학을 포함한 법의학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법의학부가 있다. 부검 실만 해도 시신을 보관하는 냉장실, X-ray 촬영 등이 이뤄지는 검사실, 부패가 심한 시체만을 부검하는 밀폐실 등등이다. 부검 시작은 내체적으로 9시경. 감식반원이 냉장보관실에 있던 시체를 수습해 카트에 싣고 밀폐 실로 들어왔다. 여러 부검에 참여하고서야 감정서를 쓸 수 있게 된 담당 법의관과 연구사 두 명, 사진촬영 한 명 그리고 장 형사가 이를 맞았다. 이름 강 수정. 나이 33세 일련번호 000X XX. 1975. 7. 26. 토요일. 서울 00 경찰서 의뢰.  이름표를 단 시체가 해부대위에 놓였다. 하얀 방수 천을 벗겨 내자 시신이 드러났다. 모두 손을 모으고 사망자에 대한 예의부터 취했다. 
법의관은 장 형사의 손에 마스크를 쥐어주며 부검도구들이 놓인 해부대로 다가섰다. 
"몸이 굳은 다음, 사지를 안으로 구부려 꺾었구먼. 입었던 옷을 잘라 나뭇단 묶듯 묶었고.” 
핀 세트로 여기저기를 살피더니 테이프에 붙은 흰 머리카락 한 올을 때어냈다. 일차 사진촬영이 지시되자, 작은 섬광을 일으키며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뒤이어 두 명의 연구사가 샤워기로 시체의 구석구석을 닦아냈다. 쏴~하고 물 뿌리는 소리, 어딘가에 시신이 부딪혀 덜그럭거리는 소리. 그것은 세상에서 죽은 자와 산 자 사이를 이어주는 마지막 언어였다. 법의관은 기록하던 서류철을 내려놓고 탐사장비처럼 놓인 도구들 가운데 쇠로 된 막대 자를 집었다. 막대 자는 시신이 찢긴 곳으로 들어가 깊이와 크기를 확인시켰다. 이어 연구사와 함께 갈고리같이 생긴 핀(Retractor)을 배에 꽂고, 양옆으로 쫙 벌렸다.
-시체는 사망, 팽창, 부패, 건조, 백골 단계를 거치며 분해된다. 죽은 지 72시간이 지나면 각막의 투명도나 체온 등으론 사후 경과시간이 불확실해진다. 기온과 습도가 높은 여름에는 1, 2주면 분해가 되고 봄, 가을에는 40여 일 정도 걸린다. 부패한 냄새를 맡고 몰려든 파리가 시체에 알을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구더기가 시체를 먹어치운다.- 
“장 형사! 자네도 알지? 이곳 지하에 인체 장기를 병에 담아 둔 표본실이 있다는 거. 물론 법의학 관련 차원에서지만, 사이비 교주와 뭇 남자를 홀렸다는 여인의 성기도 보관돼 있지. 21세기에 가서는 머리카락 한 올로도 많은 정보를 알게 될 거야. 사건 현장에서 생겨나는 곤충을 살충제로 죽이고 시신을 옮겨와 중요한 것을 놓치기도 해.”기록하고 있던 연구사가 과학이 진보되면 범죄를 쉽게 가려내게 될 거 아니냐고 하자 “글쎄, 과학이 진보하는 만큼 범죄수법도 그만큼 지능화되지 않겠어?” 라며 두어 시간의 검시를 마쳤다. 

 1975년의 봄. 그토록 기다리던 자식이 돌아왔다. 전 씨는 아들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허름한 비키니 옷장과 접이식 침대를 창고에 들여놓고, 진종일 그 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임에도 간섭이 싫다며 문까지 걸어 잠갔다. 잠자리야 그렇다 치더라도 식사는 집안에 들어와서 먹을 줄 알았는데 부엌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보다 못해 밥상을 차려 문 앞에 놔주고 가면, 쥐들의 잔칫상이 되었다. 차를 끌고 어쩌다 나갔다 오곤 해서 배도 채우고 먹을 것을 싸들고 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렇다고 부자간의 사이가 단절된 것은 아니다. 볼일 보러 갔다가 언제쯤 오겠다고 창고 문 앞에 대고 말하면, 응답은 안 해도 모이는 제때 챙겨주었다. 
여름이 다가올 무렵, 전 씨는 일본에서 돌아가신 스승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축산에 관한 것도 살피고, 2주 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아들에게서 어떤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텃밭에 심은 풋배추가 뽑혀나갔다. 창고엔 시멘트 블록으로 만든 개수대와 수도시설뿐으로, 조리도구는 하나도 없는데. 일기예보에선 장마가 끝났다고 했지만, 하늘엔 검은 구름이 가득 차있었다. 밖으로 나온 전 씨는 창고 문이 잠겨있을 것이므로, 호박넝쿨 우거진 뒤로 돌아갔다. 지붕을 내달 때 균열이 난 벽 틈새로 살며시 눈을 같다 댔다. 박제 같은 얼굴! 쑥 파인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묘한 광채! 분명히 내 자식이건만, 또 다른 모습이 침대에 올라앉아 주먹에 움켜쥔 것을 입안에 흘려 넣고 있다. 흠칫 놀라 벽에서 눈을 뗐다. 우물거리며 먹는 것은 닭 사료였다. 뒷걸음질에 그만 호박잎이 서걱거리며 밟혔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태문이가 고개를 휙 돌리더니 개수대 옆에 놓인 칼을 집어 들었다. 급히 몸을 낮추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때마침, 쥐가 사료포대 밑에서 나와 찌지 직 소리를 내며 달아났다. 안에서 밖으로 나오려던 발걸음이 되돌려졌다.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안의 동정을 다시 살폈다. 아직도 해괴한 짓거리다. 주전자의 물을 병아리가 물 한 모금 먹고, 하늘 한번 쳐다보듯 마신다. 뭔 짓이냐고 뛰어들어가 야단을 칠까? 하는데 목청 긁는 소리가 났다. “조금만 가슴을 열고 내 말을 들어달라고 했지, 누가 그렇게 전부 열어달라고 했습니까? 배고프죠? 어서 먹어요.”라고 그러더니 칼로 배추이파리를 툭툭 쳐 개수대 안으로 떨어트렸다. 
“아! 저 녀석이 드디어 미쳤구나! 어떡하지? 어떡한다?” 
앞날이 구만리 같은 녀석을 정신병원에 보낼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기록이 평생을 쫓아다닐 텐데.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는 일. 한숨을 푹푹 내쉬며 방으로 돌아온 전 씨는 사방으로 전화를 걸었다. 응암동에 있는 시립정신병원이 집에서 제일 가까웠다. 
부르릉,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후다닥 일어나 창 커튼을 들쳤다. 아들이 차를 몰아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과 쓸쓸함에 눈물이 울컥 솟았다. 병원에 보내더라도 밥은 먹여야 할 게 아닌가 싶어, 부엌싱크대 서랍에 둔 또 하나의 창고 열쇠를 꺼냈다. 쌀과 김치를 챙겨 손수레에 실었다. 문을 따고 들어선 창고 안은 나쁜 공기로 가득 차있었다. 본격적으로 더워질 텐데, 내일은 창고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리라 마음먹고, 벽을 더듬어 전기 스위치를 올렸다. 사료부대가 침대 둘레에 방파제처럼 쌓여있다. 신발도 가지런하고, 아까 입었던 운동복도 반듯하게 개어져 있다. 자랄 때의 습관 그대로지만, 예외도 있다. 비키니 옷장이 속을 훤히 드러내도 고장 난 지퍼를 내버려두었다. 예상한 대로 사귀던 아가씨가족과 상견례를 위해 마련한 감색양복이 없다. 걸치고 나가면 일주일이 지나서야 돌아오곤 했다. 우선 쌀자루부터 문안에 들여놓았다. 다음에는 김치 통을 들고 들어왔다. 두리번거리며 놓을 곳을 살폈다. 와당탕! 떨어트린 김치 통이 굴렀다. 김칫국물이 피처럼 바닥을 적시며 사방으로 튀었다. 개수대에 수북이 쌓인 배추이파리 사이로 사람의 손을 보아서다. 벌벌 떨며 배춧잎을 들쳤다. 낯선 여자가 석회 반죽으로 빚은 인형처럼 죽어있었다. 머릿속에서 숨 가쁜 종소리가 거푸거푸 울렸다. 오줌을 지리나 했더니, 종아리를 타고 흘렀다. 허둥지둥 뛰쳐나오다 손수레에 걸려 나자빠졌다. 
“맙소사! 세상을 뜬 아내도 수면제를 먹고, 닭장 안으로 기어들어가 죽었는데!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끔찍한 일을 두 번씩이나 보게 되다니! 제발 꿈이라면 깨어나고, 생시라면 꿈이 돼라.” 어차피 일은 벌여 진 것. 언제 이 녀석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집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치우는 것이 우선이다. 그쪽으로 수습의 가닥을 잡으니 다음에 할 일이 떠올랐다. 비닐은 비키니 옷장에서 뜯어 쓰기로 하고, 수건, 테이프, 가위, 손전등, 고무장갑 등을 챙겼다. 빗방울이 떨어졌다. 다시 창고로 들어서는데 진저리가 쳐졌다. 이빨이 마주 딱딱 부딪치고 와들와들 어깻죽지가 떨렸다. 배추 잎을 거둬내고 죽은 자의 옷을 가위로 자르는데 자꾸만 헛손질 했다. 전 씨는 꺼이꺼이 울었다. 기어이 울면서 굳어진 주검의 사지를 잡아 꺾었다. 우두둑! 관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꺾인 사지를 안으로 모아 테이프로 감고, 잘라낸 옷으로 한 번 더 묶어 비닐에 담았다. 개수대에 고였던 피가 수돗물에 씻겨 나갔다. 온 전신이 땀범벅이 되었으나 어느새 떨림은 멈춰있었다. 그제야 들리지 않던 빗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야 한다. 트럭 뒤칸에 시체를 넣은 닭장을 밀어 넣고, 닭장 다섯을 이어 붙였다. 통행금지 끝나기를 기다려 시동을 걸었다. 검문소 둘 중의 하나는 쉽게 지났다. 구파발이 다가온다.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호림 농장입니다. 영천시장에 갑니다.” 
“녹번동으로 지나가시죠?. 집안에 교통사고 난 사람이 있는데, 택시가 안 들어와 그러니 가시는 길에 태워주시겠습니까?” 전 씨는 너무 긴장하여 붉은 신호등을 보지 못하고 두 번이나 지나쳤다. 옆자리에 탄 사람은 신세를 지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비가 내리니 앞이 잘 안 보인다.”라고 변명을 해주고는 빈 택시가 보이자 얼른 내려 갈아탔다. 홀로 떠밀려가는 것을 비춰주는 것은 오로지 트럭의 불빛. 비에 젖은 밤은 어둠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차창을 세차게 내리치는 빗물도, 살빛을 번뜩이며 흐르는 개울물도, 하나뿐인 자식의 미래도 검게 얼룩졌다. 벼락 치는 소리를 들으며 채석장이던 곳에 차를 댔다. 비닐 백을 지고 어둑한 산을 올랐다. 어디에 이런 힘이 축적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때! 짊어진 시체가 자신의 어깨를 훅하고 잡아챘다. 너무 놀라 하마터면 절벽 아래로 나뒹굴 뻔하였다. 나뭇가지가 비닐을 낚아채서였다. 번갯불이 허공을 수차례 찢는다. 쓰러진 나무둥치와 구덩이가 보였다. “이 죄는 모두 내가 받겠소.”라고 죽은 자에게 고하며 시신을 구덩이에 묻었다. 주변을 행주질한 비닐을 들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자꾸만 천둥이 울었다. 이제는 끝났다고 홍제천 물에 지녔던 것을 던졌지만 굶주린 들 고양이가 트럭에 실린 닭을 습격한 것은 알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전 씨는 청소부터 했다. 창고 짐을 방으로 옮기고, 부동산에는 농장을 임대할 사람을 부탁하고, 정신병원에 들어갈 예치금도 은행에 넣었다. 말썽난 닭장은 가끔 인근 산에서 내려오는 들짐승의 소행이려니 여겼다. 
이윽고 아들이 돌아왔다. 창고 짐이 옮겨진 것을 보더니 뜻 모를 신음을 냈다. 전 씨는 방으로 들어온 태문에게 한 번도 해준 적 없는 깊은 포옹을 했다. 
“아들아! 미안해.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어서. 사랑해.” 
정신병원 차가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흰옷 입은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아들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Kill, Kill, Kill”하고 웃었다. 
정신병원 차가 호림농장을 다녀간 지 2주 되어갈 때, 법원은 경찰에게 체포권을 부여했다. 전 씨는 기다렸다는 듯, 순순히 팔을 내밀어 수갑을 받았다. 검찰은 301호 법정에서 열린 공판에서 살해 증거들을 읽어나갔다. 담당변호인도 제시한 증거를 인정했다.전씨가 길 가던 여자를 납치해 살해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인정함에 따라 원심에서 징역 13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1년도 안 되어 감옥에서 병사했다. 원인은 심장마비였다. 

1985년 미국에 이민한 장 형사는 2007년 봄, 롱비치병원에서 폐암 수술을 받았다. 남긴 자식 없이 떠난 아내를 떠올리며 병실에 누웠을 때, 수신인 장 정규라고 쓰인 소포를 받았다. 겉장에“배추 흰 나비”라고 쓰인 전 태문의 일기장이었다. 
수술결과가 좋아 회복 끝에 고국에 나왔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자신의 집에서 묵어가기를 바랐지만, 자유롭고 싶어 H 호텔에 묵고 있다. 서류상 행불(行不) 처리된 사람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만나서 딱히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만나고 싶다. 이제 마지막으로 가볼 곳은 일영이다. 

“파이팅”
사람들이 내리막을 바라보며 선전(善戰)을 외치고 있다. 다가가보니 두 젊은이가 안간힘을 쓰며 자전거 구르기를 하고 있다. 모여선 사람들은 젊은이 둘이서 너르게 경사진 곳에 박힌 돌을  위태위태하게 넘어갈 때마다 휘파람과 환호를 보냈다. 정규는 그들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듯, 함께 어울려 손뼉 치며 소리를 질렀다.
길옆의 노란 꽃이 하산하는 나그네를 부른다. 배추 장다리꽃이다. 어디서 날아와 이런 산비탈에 뿌리를 내렸을까? 피에로 분장한 사람이 근처에서 낡은 오토바이에 헬륨 풍선을 매달아 놓고 솜사탕을 팔고 있다. 하나를 사들었다.
정규는 눈부시게 빛나는 오월의 하늘에 쥐었던 풍선을 가만히 놓았다.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나풀대며 따라간다.      
      
                  -끝-

            -『미주문학』등재 2012년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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