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물도 철들어야

2011.03.03 06:15

이주희 조회 수:1365 추천:197


선물도 철들어야 / 이주희


**한인 타운과는 자동차로 두어 시간 남짓 떨어진 팜스프링스에서 사는 나는 그때그때 필요한 품목을 적어두었다가 하루 날을 잡아 시장을 봐온다. 일단 나가게 되면 제일 먼저 신문 가판대로 가서 신문을 골고루 뽑아 차에 가져다 두고 나서야 찬거리를 산다. 어떤 이는 TV나 신문이 없는 데서 살아가는 것이 좋다지만 나는 세상과 단절하고 지내기는 어려운 사람으로, 예전에는 비디오가게에 들러 코미디나 연속극 테이프를 한 아름씩 빌려오기도 했다. 오늘 사려는 것은 주로 채소여서 고추, 상추, 콩나물, 고구마 등등, 목록대로 찾아 카트에 집어넣었다. 장을 볼 때마다 품목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파다. 파를 살펴보니 밭에서 자라고 있는 것처럼 싱싱한데다가 값도 엄청나게 싸서 8단에 99센트다. (더 쌀 때는 99센트에 15단도 했음) 고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집히는대로 세어 봉투에 담았다. 이웃에게도 나눠줘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또 다른 봉지를 집어오다가 “어이구, 파는 나나 좋아하지 뭐.” 하면서 슬그머니 내려놨다. 지금이야 물자가 넘쳐나지만, 예전에는 모든 것이 귀했다. 생전에 친정아버지가 보육원 일을 보실 때였다. 크리스마스 즈음, 미국에서 구호물자가 왔다. 짐들을 잠시 우리 집 마루 밑 지하실에 부려두었는데 내가 몰래 내려가 끙끙거리며 물건 속을 들춰보았다. 그 안에는 눕히면 눈을 감는 인형과 알록달록한 리본, 목도리, 머리핀, 유리구슬, 두꺼운 종이로 만든 퍼즐, 자동차 등등 많은 것이 내 눈을 황홀케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버지를 비롯한 몇몇 어른이 와서는 그 물건들을 들어내 보육원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내가 어머니 뒤에서 지켜보다 놀라 “안 돼! 안 돼! 가져가지 마!” 하며 소리쳐 울었다. 친정어머니 말씀으로는 아주 때굴때굴 굴렀다 한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언니에게 신발을 한 켤레를 주었고, 시무룩해 있던 내게는 “여기 인형과 퍼즐 그림책이 있는데 네가 먼저 고르면 그 나머지 것을 동생에게 주겠다.” 라고 제안했다. 돌이켜 보니 내게는 그 인형이 최초로 기억되는 선물이다. 가끔 나는 친정어머니께서 만들어준 인절미가 있다거나, 만두를 넉넉히 빚었다거나, 또는 싱싱한 채소를 보게 되면 그것들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진다. 그런데 사람마다 환경과 체질이 다르다 보니 받는 상대가 원치 않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혈압이나 당뇨, 음식 알레르기가 있어 먹고 싶어도 참아야 하는 사람, 체중조절 중인 사람, 받으면 꼭 갚아야 하는 책임감이 생겨 아예 받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서다. 건네주는 사람이 아무리 행복한 마음으로 보냈다 하더라도 받는 이가 행복할 거란 보장은 없다. 이웃과 몰라라 하고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마음 좋은 과부 고쟁이 마를 날 없다고, 안 주고 안 받으면 되는 것을 공연히 건네서 결국은 ‘넘치는 것이 모자람만 못하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사람답게 살기가 쉽지 않다. 이리하면 저게 걸리고 저리 하면 이게 걸리니 말이다. 그렇긴 하지만 이웃의 문을 자주 두드리면 좋겠다. 요란함도, 조용함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기억의 퍼즐에 짜 맞출 수 있을 테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두부와 마늘을 챙겨 마켓을 돌다 기어이 채소 있는 곳으로 되돌아와 파를 봉투에 담는다. 이번엔 20단이나 담았다. 이웃이 원치 않으면 파김치 담그면 되고, 남으면 마당 한 귀퉁이에 심으면 되는 것을. 나눔에도 철이 들어야 하나 보다. 교통이 혼잡할 때 팜스프링스로 오는 프리웨이는 한참을 차 안에 갇혀 있어야 집에 닿는다. 30여 단의 파 냄새가 자동차에 배겠지. 도 레 미 파, 파, 파하고 풍기겠지. 우리 가족이 즐겨 부르던 ‘풀냄새 피어나는’ 노래를 부르며 갈까? 음정, 박자, 가사가 좀 틀리면 어때. 옆 차선의 운전자들이 노래하는 내 표정을 보고 웃더라도 상관없다. 누군가에게 줄 선물거리를 실은 차도 즐겁고 나도 즐겁다. (2014. 4. 한국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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