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의 주머니

2011.04.09 05:34

이주희 조회 수:1668 추천:299

엄마의 주머니 / 이주희
**헐렁한 속옷, 엄마는 딸들이 입어서 낡아진 내복을 기워 입었다. 닳아버린 밑단을 잘라냈기 때문에 고쟁이도 반바지도 아닌 모양새였다. 염색기술이 좋지 않던 시절이라 이 옷 저 옷에서 묻어난 물감으로 말미암아 얼룩덜룩했다. 지니고 다니는 금고랄까? 허리춤 밑에는 한 뼘 크기의 주머니가 꿰매 달려 있었다. 넣어진 내용물은 옷을 갈아입을 때에 옮겨 담았으며, 어쩌다 볼록해도 치마폭에 둘러싸여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대체로 위급상황에 여는 주머니지만, 열려면 거치는 순서가 있었다. 엄마는 급한 일이다 싶으면 사람들 시선을 등으로 막으며 구석진 자리부터 찾아갔다. 숨을 휴~하고 고른 다음, 치맛자락 끝을 들어 턱과 목덜미 사이에 가져다 끼운다. 그러고 나서 허리춤을 벌려 자물쇠처럼 잠근 주머니의 옷핀을 빼는 것이다. 빼낸 옷핀은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두 입술이나 이빨에 물렸다. 그렇게 옷핀이 물려 있어야 주머니에서 돈이나 금반지가 나왔다. 일회용 생리대가 나오기 전이어서 딸 많은 집 빨랫줄은 항상 비좁았다. 딸들은 볕 잘 드는 곳에 자신의 것을 널어놓느라 곁에 빨래는 밀쳐놓기 일쑤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시 끝으로 밀려나 있는 것은 엄마의 남루한 속옷이다. 비가 오면 자식들의 빈약한 하루를 걱정하듯, 주머니는 속이 뒤집힌 채 비를 맞았다. 눈이 오면 동태가 낚싯줄에 걸린 듯, 빨랫줄에 걸려 뻣뻣하게 얼어버린 옷의 관절을 부러트리며 집안으로 들려 들어왔다 몇 년 전, 남대문 시장에서 지퍼 달린 팬티를 보고 몇 개를 사다 드렸었다. 엄마는 고국에서 온 것이라며 반갑게 받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가져가겠느냐고 물었다. 하나를 입어보니 무겁고 불편하다면서. 나는 할머니패션이라 싫다고 했다. 엄마는 고맙게 받은 것을 누군가에게 줘버리면 준 사람 마음이 서운할지 몰라 물어본 것이라 했다. 그러고 보니 엄마는 무엇인가를 자꾸 가져가랬다. 깨질까 봐 아껴쓰던 장미꽃 접시라던가, 덮으면 포근하다던 명주 이불, 선물 받은 은수저 등등을. 엄마는 지난 주말에도 다녀가는 나에게 서툰 솜씨로 포장된 무엇인가를 내놓았다. “뭐야? 엄마, 오늘 무슨 날도 아닌데 뭔 선물?” “이거? 새로 나온 큰 글자 성경전서라는 거야.” “전에 엄마랑 언니랑 내게 준 것만도 몇 개나 되는데. 왜 또 줘?” “으음, 이건 좀 다른 거야. 내가 정성 들여 준비한 거니까 받아.” 엄마가 사는 아파트에는 화장실 옆에 조그만 다용도실이 있다. 두루마리 휴지와 청소기를 넣어둔. 언제부터인가 엄마는 그곳에 검은 플라스틱 백을 준비해 놓고 뭔 일을 꾸미고 있었다. 빈 깡통을 모으고 있었던 거다. 아침인사가 "밤새 별 일 없었수?"로 시작되는 노인들 모임에선 빈 깡통을 거둬주었고, 이웃들도 오며 가며 가져다주었다. 엄마는 그렇게 모이는 것들을 발로 눌러 납작하게 오그렸다. 그리고는 끌 것에 담아 재활용품가게로 가져갔다. 투덜거릴 자식들이 오기 전에. 지금도 나는 엄마에게 어릴 적 말투를 쓴다. 그러던 내가 존댓말로 다소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어머머! 엄마가 캔을 왜 줍습니까? 쌈짓돈이 필요해서 그러셨어요?” “가만, 가만, 내 말 좀 들어봐. 네가 성경 읽으면 뭔 소린지 졸리기만 하다고 했잖니? 여기 새로 나온 성경전서는 요즘 사람들이 이해하기 좋게 펼친 거래. 그래 어미가 정성이라도 들여 보자고 캔 하나하나 주울 때마다 기도했지. 내 딸이 꼭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저기 언니 것도 있다.” 그런데 나는 건네받은 선물의 기쁨보다 그 뒤에 나온 엄마의 말에 흠칫했다. “휴지통이든 주머니든 거기에서 행복이 나오면 그게 바로 화수분이 아니겠냐?” “어? 엄마! 그, 그, 그 화수분이란 말 어떻게 알고 있어요?” 나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어릴 적에 들었거나 교회에서 들었거나 했겠지.” 이 불효막심한 딸은 이제껏 엄마의 주머니는 행복하고는 거리가 먼, 그저 살아가는 비상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속옷 주머니의 지퍼마저 무겁다 하고, 자식들의 튼튼한 바람막이던 등마저 굽어 버린 엄마가 화수분을 지니고 있었다니! 퍼내도, 퍼내도 끊임없이 솟아나는 어머니의 사랑! 하늘 아래 어버이의 사랑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으랴. 마땅한 것을 자랑하면 웃음거리가 되겠지만, 그래도 자랑하고 싶다. 당신 스스로 깨우친 한글이라 글자도 소리글로 쓰시는 엄마는 고국에서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자식들은 지금껏 수고하셨다는 상을 드리지 못했다. 이번 어머니날에는 주머니에서 나와 영영 사라져버린 구름무늬 반지를 찾아 드리자고 해야겠다. 모인 자식들의 건강한 웃음꽃을 한 아름 안겨 드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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