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라고

2012.05.18 00:37

이주희 조회 수:1393 추천:235


어쩌라고 / 이주희


**지난가을, 뒤뜰 벤치에 앉아있는 나와 시선을 마주한 것이 있었다. 프레리도그와 비슷하게 생긴 다람쥐였다. 움직이면 달아날까 싶어 얼음 땡 하며 바라보니 고동색과 갈색이 섞인 털과 강아지풀처럼 생긴 기다란 꼬리, 쥐 눈이 콩 같은 까만 눈망울을 가졌다. 당시 나는 함께 지내던 개가 떠난 지 얼마 되질 않아 많이 섭섭해 있었다. 해코지하지 않으려는 눈치를 챘는지 그 후로 자주 놀러 와서는 나지막한 담 위에 올라앉아 담 안팎을 둘러보기도 하고, 먼 산을 바라보기도 했다. 매번 그 자리로 오는 것은 시야가 훤히 트여있어 비상시에 재빨리 달아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여러 번 마주치다 보니 친숙해진 듯해서 브라운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와 트리장식용 꼬마전구를 들고 뒤뜰로 갔다. 의아한 일이 생겼다. 인기척이 나면 얼른 담 밖으로 꼬리를 내리던 모습이 이번에는 뜰 안에서 사라졌다. 가만히 살펴보니 잔디밭 중앙에 밥공기만 한 지름구멍이 보였다. 도둑처럼 담을 넘어오던 브라운이 터널개통식을 한 것이다. 땅굴이 깊어서인지 시커멨다. 섬뜩해지면서 오- 소소 소름이 돋았다. 사람은 가끔 안부를 묻는 사이가 오래간다고 한다. 야생동물과 인간도 가끔 지켜볼 수 있는 관계라면 좋으련만, 어쩌다 그들의 영역을 차지한 사람이 사는 곳으로 먹이를 구하러 오나 보다. 구멍을 메울 돌과 흙을 챙기며 생각했다. 다람쥐와 처음 마주쳤을 때 호의를 보이지 않고 후다닥 쫓아버렸다면 어찌 됐을까 하는. 브라운은 허물린 땅굴을 복원하며 봄을 맞이했고, 나는 그걸 부수느라 겨울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잔디밭은 도장 부스럼 앓는 머리처럼 되어갔다. 그러자 이러한 상황을 보거나 들었던 주변 사람들로부터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들어왔다. 매운 고춧가루를 뿌려보라는 것. 부스럭 소리가 나게 플라스틱 봉지를 잔뜩 구겨 넣으라는 것. 굴 입구를 큰 돌로 막으라는 것. 먹이사슬의 강자처럼 보이는 것을 앞에 놓아보라는것 등등. 그리해도 반응이 신통치 않자, 더욱 센 처방전이 들어왔다. 시멘트 가루와 함께 물을 부어봐라. 흙 파는 손가락이 아야! 하게 유리조각을 넣어 봐라. 먹이에 약을 타놓으면 먹고 어디로 가서 죽어버릴 거라고. 하지만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막으려는 것이어서 지쳐 가고 있는데 기발한 아이디어가 들어왔다. 철삿줄을 웅크려 넣어보라 했다. 구멍을 파다 손가락에 걸려 혼쭐이 나게 되면 다시 안 올 거라며. 효과가 있었는지 닷새가 지나도록 들락거리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엿새째 되는 날 아침 “인간의 승리”라고 소리치며 응접실 문을 상쾌하게 열어젖혔다. 에구머니나! 이게 웬일인가? 마치 회오리바람이 생선 내장을 흩뿌려놓고 떠난 듯, 터널을 매몰하려 집어넣은 철사와 돌멩이, 나무토막과 플라스틱 봉지, 심지어 유리조각까지 잔디밭 위로 끌려나와 있었다. 승리로 여겼던 닷새는 휴전으로 끝났다. 더 강력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사로잡아 차를 타고 먼 곳으로 가 풀어놓으려는 것이다. 포획 틀을 사왔다. 실패가 없어야 하므로 연습이 필요했다. 의심 없이 드나들며 미끼를 먹고 가도록 문이 닫히지 않게 해놓았다. 브라운이 잡혔을 때 추레하게 보일까 봐 비 오는 날은 비워두었다. 막상 헤어질 생각을 하니 애틋하기도 해서 들락날락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며. 쾌청한 4월의 봄. 드디어 7개월간의 실랑이를 끝낼 시간이 다가왔다. 동물이 인간에게 굴복당하러 담 위로 올라섰다. 살며시 올라서서는 땅콩이 들어있는 포획 틀로 가질 않는다. 주위를 찬찬히 살피기만 한다. 왜 그럴까? 아! 나는 그만, 두 손 두 발 들고 말았다. 그토록 막강한 무기를 가지고 브라운이 나타날 줄이야. 어쩌라고, 날 보고 어쩌라고? 네 마리 새끼를 데리고 엄마가 돼서 나타났느냐 말이다. 중앙일보 : 2012.10. 1.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2 ◈ 여름마당 이주희 2012.08.03 1348
61 ○ 화살 이주희 2012.07.13 1092
60 ○ 폐경 이주희 2012.07.13 1095
59 ○ 요세미티 캠프 이주희 2012.06.06 1126
58 ○ 팔월의 진주 이주희 2012.05.29 1829
57 ○ 짜발량이 이주희 2012.05.29 1097
» ◈ 어쩌라고 이주희 2012.05.18 1393
55 ○ 미친 각시 이주희 2012.05.18 3132
54 ○ 누구세요 이주희 2012.05.11 1240
53 ○ 매복 [1] 이주희 2012.04.27 1720
52 ○ 바람 이주희 2012.04.14 1070
51 ○ 낱알 다섯 이주희 2012.03.10 1177
50 ○ 개똥밭에 굴러도 이주희 2012.03.10 1293
49 ★ 바람과 모래 이주희 2012.02.11 1181
48 ○ 파랑 나비 이주희 2012.02.02 1291
47 ★ 임진(壬辰年)찬가 이주희 2011.12.14 1259
46 ○ 동거 이주희 2011.12.01 1220
45 ★ 모래알 이주희 2011.11.14 1169
44 ★ 왜 시를 쓰냐고요? 이주희 2011.11.07 1304
43 ○ 작은 그늘 이주희 2011.10.10 1225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8

오늘:
18
어제:
50
전체:
284,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