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마당

2012.08.03 09:24

이주희 조회 수:1348 추천:191


여름마당 / 이주희


**데이도록 뜨거운 팔월이다. 지금 내가 사는 집은 미주 한국문인들의 여름캠프가 열리던 지역에서 이십여 마일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모래바람을 피해 이리로 왔지만, 사막으로부터 멀리 벗어난 곳이 아니라서 더위는 여전히 따라다닌다. 지난여름, LA에서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다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려다가 한밤중에 소리를 질러댈 전화벨 소리를 생각하니 내키지 않았다. 어떻게 찾아지겠지 하고 내처 차를 몰고 달리다 뒤늦게 바닥을 치는 휘발유 계기판의 눈금을 보았다. 시동이 꺼질까 봐 주유소를 찾아가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게다가 가로등 없는 프리웨이 구간이어서 자동차의 불빛으로만 살펴가자니 목이 뻣뻣해지고, 등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도깨비에게 홀린다는 말이 이런 상황인가 싶었다. 어쩌다 곁을 지나는 자동차들은 속도를 내며 다가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마치 나는 캄캄한 우주를 홀로 떠도는 미아처럼 느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시간이면 충분히 돌아올 길을 네 시간 넘겨 돌아오긴 했지만, 으스스했던 밤의 여운은 한동안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일 이후, 외출은 어머니 뵈러 가는 날과 모임이 겹쳐질 때를 택해서 하고 있다, 뜨거운 열기가 가라앉아있는 아침, 더워지기 전에 마당으로 나간다. 신문을 집어 그네 의자에 올려놓고, 호스를 잡아 스프링클러가 미처 살피지 못한 식물에 물을 뿌려준다. 담 옆에는 난생처음 심어본 옥수수가 파수병처럼 서 있다. 머리에는 갈대와 같은 꽃 벼슬을 올리고, 허리춤의 주머니에선 붉은 실을 밀어내고 있다. 제대로 알이 들어찰는지 몰라도 바라보기만 해도 정겹다. 질경이는 마당 한 귀퉁이를 저들 세상으로 만들었다. 낚시터에서 씨를 받아와 뿌렸는데 보살피지 않아도 잘 자란다. 생명력이 질겨서 질경이란 이름이 붙었나 보다. 오이는 개가 드나들던 문 뒤에 심고 버팀대를 해줬더니 주렁주렁 열렸다. 처음 것은 채 썰어 콩국수 위에 얹어 이웃과 나눠 먹었다. 고추는 매운 것, 안 매운 것 가리지 않고 열다섯 포기 심었다. 고향의 텃밭을 떠올리며 크기와 모양이 저 따로따로인 고추를 서너 개씩 따서 점심상에 올린다. 모종이 다 잘 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지가 그렇다. 나무 밑에 자리를 줘서 그런지 바닥에 잎을 붙이고는 자라질 않았다. 밑가지를 쳐주면 나아질까 해서 떼어냈더니 잎만 더 무성해졌다. 가지가지마다 보랏빛 꽃이라도 피워주면 좋으련만. 칠월이 가면서 브라운(다람쥐)가족도 떠났다. 동물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이소(移所)한 것이 아니다. 골프장 관리실에서 놓은 극약을 먹고 사라졌다. 그간 뒤뜰을 들락거리던 브라운가족과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던지 마음이 꽤 아팠다. 늘어난 그들의 개체 수가 마을 전체로 퍼지면서 여기저기 땅을 파헤치는 바람에 거주자를 비롯한 골퍼들의 불평이 많았다고 한다. 이젠 담 위에 올라앉아 물 퍼 나르는 소방헬리콥터를 바라본다든지, 안개 낀 허공을 바라본다든지 하던 모습을 더는 볼 수 없게 됐다. 진즉 포획해 먼 거리에 있는 산에다 풀어줬다면 살 수 있었을 텐데. 가는 것이 있으니 오는 것도 있다. 다람쥐가족이 떠나자 벌새들이 찾아왔다. 벌새는 암컷보다 수컷의 색깔이 더 곱다. 날갯짓을 재빠르게 하여 공중에 정지한 상태로 꽃의 꿀을 빤다. 앞으로 뒤로 심지어 몸을 뉘여 날기도 한다. 다락에 올려뒀던 단물 통을 꺼내 솟대에 걸어줬더니 꿀벌이 먼저 알고 모여든다. 원래 씨앗 통과 함께 단풍나무에 매달았던 것인데, 쥐들이 흘린 씨앗을 먹으러 오기에 함께 내렸었다. 부리가 굵은 새는 대롱 속에 물을 빨 수 없으니까 머리를 쓴다. 그네 타듯 통을 흔들어 단물이 넘쳐나면 얼른 부리를 갖다 댄다. 사람의 머리를 새대가리에 비유할 일이 아니다. 그네 의자에 앉아 방금 따온 오이를 한 입 베어 문다. 풋풋한 냄새가 입안에 번진다. 신문을 펼치니 런던 올림픽에서 우수한 사람들을 가려내는 소식들로 가득하다. 모든 생명은 우월한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며 나아간다. 어딘가 척박한 마당에서 펼치는 인류애도 금메달 못지않게 값지리라. 내 가슴의 뜰은 어떠한가? 사랑의 감정에 위선의 꽃을 피우고 있지는 않은지? '다르다.'라기보다 '틀리다.'의 뿌리가 더 깊은 것은 아닌지? 한바탕 소나기가 내려주면 좋겠다.
재미수필: 2013. 1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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