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에 얽힌 사연

2016.06.08 20:32

김성은 조회 수:3

거북에 얽힌 사연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김성은



나의 취미는 독서이다. 두 눈으로 책을 볼 수 없는 나는 주로 귀를 이용하여 음성으로 제작된 녹음도서나 점자도서, 데이지라고 하는 시각장애인 전용 파일 형태로 책을 듣는다.

전문 성우들에게 일정 기간 교육을 받고 직접 육성으로 녹음 작업을 해 주시는 아름다운 봉사자님들 덕분에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무수히 많은 책을 들으며 성장했다.

학창 시절, 특수학교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나의 장애를 인정하기 싫었고, 바깥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나는 점점 독서의 광활한 세계에 매료되었다. 서서히 진행되는 녹내장은 나의 멀쩡한 두 발을 온전히 집 안에 묶어 두었고, 더 넓은 세계에 대한 넘치는 호기심과 현실에 대해 옥죄어 들던 답답함·불안이 나를 더 책 속으로 파고들게 만든 듯 했다.

그 시절 나에게 독서란 아마 도피처가 아니었을까? 현실을 잊을 수 있고, 몇 시간이고 몰입할 수 있는 끝 간 데 없는 침잠이 나를 안도하게 만들어 준 것 같다. 주로 장편소설을 들었는데, 조정래의 『아리랑』과 『태백산맥』을 비롯하여 최명희의 『혼불』, 박종화의 『세종대왕』, 김성종의 『여명의 눈동자』, 김주영의 『객주』등이 기억난다. 이 밖에도 다양한 수필문학을 비롯한 <샘터>나 <좋은 생각> 등의 소소한 잡지들도 내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친구였다.

책을 통해 알게 되는 먼 나라 이야기들이나 소설 속 많은 인물들이 살아가는 여정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나의 동선에 커다란 위안이 되었고, 혼자서 듣고 읽고 쓰는 작업은 내 안의 많은 감정들을 고요히 정리해 주는 귀한 시간이었다.

독서뿐 아니라 나는 거의 모든 일상을 귀로써 해결한다. 컴퓨터도 화면을 읽어주는 별도의 프로그램을 설치하여 사용하고, 휴대폰도 보이스오버를 활용하여 모든 메뉴를 귀로 들으며 처리한다. '만약 나에게 귀가 없었다면? 헬렌 켈러는 앞도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했다는데….'

정말 위인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생각만 해도 딱 죽을 것 같은 느낌인데, 어찌 그 작은 소녀가 그토록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는지 옹졸한 나로서는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한가로운 아침에 여유롭게 커피향을 음미하며 부드러운 감촉의 이불 속에서 녹음 도서를 듣는 시간이다. 온몸의 긴장을 풀고 흥미로운 소설이나 다양한 교양서적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면 정말로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그렇게 몰입하는 동안만큼은 나의 장애도 삶의 무게도 다 잊어버릴 수 있기에 아마 나는 그 시간을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

책상에 앉아 작업을 하거나 손이 쉬게 될 때면 나는 거의 습관적으로 종이 거북을 접는다. 귀로는 무언가를 듣고 있지만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다 보면 집중력이 흐트러지기도 하고, 때론 잠이 오기도 하여 손을 움직여 보자는 의도로 시작한 작업이었다.

감정적으로 견디기 힘든 순간이나 펑펑 울고 싶을 때에도 묵묵히 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거북을 접었고, 그렇게 정신없이 거북을 접고 나면 조금은 마음이 안정되는 듯했다. 그렇게 태어난 나의 거북이가 아마 수 백 수 천 마리는 족히 될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낚시를 좋아하시는 아빠가 어느 바닷가에서 낚시를 하시다가 주웠다며 거북을 집으로 가지고 오신 것이다. 생전 처음 보는 거북은 무척 딱딱한 등을 가지고 있었고 정말로 느릿느릿 기었다. 그 녀석이 아빠의 차에 실려 우리 집까지 살아서 왔다는 것도 무척이나 신기했지만 꼬물꼬물 천천히 기어가는 모습이 귀여웠다. 또 무엇이 그렇게 겁나는지 나와 동생들이 와르르 몰려가 구경할라치면 잽싸게 머리와 네 발을 등속으로 감춰버리는 모습이 너무너무 신비로웠다.

토끼와 거북이라는 동화책 속에서만 보았던 거북을 실물로 본다는 것이 열 살 남짓의 나에게는 무척 이채로운 경험이었다. 300년이나 산다는 거북을 그렇게 우리 집에 놓아두면 안 된다는 엄마의 소신대로 엄마를 따라 인천 월미도까지 간 우리 세 자매는 들뜬 마음으로 유람선에 올랐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며 먼 바다까지 나왔다 싶을 때 엄마는 거북을 꺼내셨고, 우리는 모두 "거북아, 안녕!" 하며 그 녀석을 바다로 돌려보내 주었다. '풍덩!' 거북이 바다로 떨어지던 소리는 생각보다 컸고, 우리 어린 세 자매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그날 본 넓고 푸른 바다와, 유람선에서 설레는 가슴으로 거북을 보내주던 유년 시절의 내가 그립다. 지금 나는 마흔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각장애인 아줌마가 되어 온몸의 촉수를 곤두세운 채 치열하게 살고 있고, 열등감과 자존감 사이에서 매 순간 갈등하며 나를 다져간다.

때로는 외로움에 몸서리치기도 하고, 하필이면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할 내 운명이 못 견디게 억울해서 남몰래 피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붙들어 주시는 나의 하나님이 곁에 계시고, 전폭적인 사랑으로 오직 나를 위해 땀 흘리시는 엄마가 계시며, 순수한 사랑으로 인연을 맺은 남편이 있고, 무엇보다 나를 살게 하는 이유이자 미소 천사인 우리 딸아이가 있어서 나는 위태롭지만 인생의 고비 고비를 잘 넘기고 있다.

오직 내가 해결하고 다스려야 할 나의 감정을 조련할 때엔 나도 모르게 내 손이 종이 거북을 접고 있고, 나의 갖가지 감정을 등딱지에 담고 태어난 거북들은 예쁜 유리병에 담겨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자리한다. 고맙게도 거북을 선물 받은 지인들은 나의 진심을 알아주며 기뻐한다. 그 모습이 또 신나서 유쾌한 마음을 담아 거북을 접기도 한다.

그날 인천 월미도 깊은 바다로 돌아간 거북은 지금도 잘 살고 있을까? 나의 종이거북과 바다 속 진짜 거북은 서로의 존재를 알까? 종이거북들은 내가 모르는 세계를 사는 사람들과 나를 연결해 주는 고마운 다리가 되기도 한다. 방송을 들으며 좋아했던 연예인이나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에게 보낸 거북들은 실제로 그 작가와 문자를 나눌 수 있는 가슴 떨리는 순간을 선사해 준다.

앞을 볼 수 없는 나의 일상은 매우 단조롭고 행동반경도 턱없이 좁다. 그래서 나는 종이거북들에게 주문을 건다.

"더 먼 세계로 떠나 부디 나에게 낯선 공기를 전해다오. 내가 존경하는 작가들에게 나의 사랑과 응원의 마음을 전해다오. 치열하게 한 길을 걷는 멋진 이들의 기운을 전해다오."

나는 오늘도 무심히 거북을 접는다. 이 녀석들이 가져다 줄 넓은 세상의 공기와 멋진 사람들과의 인연을 기대하며….

(2016.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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