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롱불

2016.06.18 09:03

김명희 조회 수:12

호롱불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 명 희

책장을 정리하다 호롱에 시선이 멈추었다. 우리의 애환이 담긴 호롱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다. 나는 문득 호롱불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호롱불 이전에는 들기름 그릇에 심지를 넣어 불을 밝혔으나 호롱불이 생기면서부터 우리 조상들은 좀 더 밝은 불빛 아래서 생활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해마다 정월 보름날 새벽이면 윗방 윗목에 어김없이 찰밥 시루를 터줏대감으로 모셨다. 시루 안 들기름접시에 식구 숫자대로 심지를 만들어 가족들의 안녕을 기원하시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지금도 어렴풋이 생각난다.

호롱에 석유를 부어 불을 붙이면 환하게 어둠을 밝혀주었다. 부엌과 큰방 벽에 구멍을 내고 그곳에 종이를 바른 후 호롱불을 올려놓고 그 불빛으로 설거지를 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과 길쌈 등 모든 일을 다 하셨다. 바느질을 하다가 바늘이 부러지면 아이들이 방바닥에 기어 다니다 바늘에 찔릴까 봐 호롱 속에 넣었다. 오랜 경험에서 얻은 사람들의 지혜가 소중하게 활용되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은 낮에는 들에서, 밤에는 호롱불 밑에서 새끼도 꼬고, 짚신도 삼고, 가마니를 짜며, 멍석도 만들었다. 호롱불은 세고(世苦)에 파묻혀온 조상님들의 삶과 늘 함께 했다.

화물자동차에 확성기를 싣고 와서 온 고을이 떠들썩한 날이면 어김없이 그날 밤은 유리를 낀 사각 등에 호롱불을 신주 모시 듯했다. 바람이 불어도 잘 꺼지지 않는 등불을 잡고 활동사진을 보러 갔다. 등불은 그 주변에서만 훤하다. 멀리서 보면 고양이 눈에서 나오는 조그만 광채 같은 등불로 고모 두 분과 철부지인 내가 중간에 끼어 좁은 산모퉁이 길을 돌고 돌아서 다녀오곤 했다. 달이 없는 캄캄한 밤길은 뒤에서 등불을 잡으면 앞사람이 길이 안 보이고 앞사람이 잡으면 그 사람의 그림자에 길이 보이질 않아 더듬더듬 걸었다.

‘장화홍련전’을 보고 돌아오는 날이었다. 깊은 밤에 혼령이 억울한 원한을 풀어 달라고 새로 부임하는 현감을 놀라게 한다. 머리를 풀어헤친 소복을 한 여인 두 명이 밤마다 나타나 새엄마에 대한 원한을 끝내 갚고야 마는 귀신으로 등장했다. 숨소리조차도 크게 들리는 숲길은 발걸음 소리에도 등골이 오싹하고 몹시 긴장됐다. 호롱불은 이런 불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초롱초롱 비춰주었다. 집 가까이 오면서부터 나는 ‘후유’ 긴~~ 숨을 몰아쉬었다.

호롱불 아래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수를 놓는 고모들 곁에서 공부를 했다. 밤늦게 호롱불을 켜고 있노라면 기름이 닳는다고 빨리 불 끄라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그을음이 심해 콧속이 까맣게 될 때도 있었다. 호롱에 석유가 바닥이 나 불이 꺼지면 허둥지둥 석유병을 찾다가 이마에 혹이 생기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은 어둠 속에 석유 대신 라이터용 휘발유를 부어 큰 사고가 일어나는 위험한 일도 있었다.

감나무로 둘러싸였던 우리 집은 동쪽으로 낸 창에 대낮같이 밝은 둥근 달이 걸쳐있었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바라보고 어린 동생들과 나란히 앉아 ‘저 별은 나의 별’을 흥얼거렸었다. 마당에 피워놓은 모닥불 연기가 벌떼처럼 모여드는 모기를 쫓아주었다. 가족들이 호롱불 밑에 빙 둘러 앉아서 멸치국물에 감자와 풋 호박, 파를 숭숭 썰어 넣고 만들어 먹던 수제비 생각에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지금 우리 곁엔 많은 추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호롱불 대신 첨단 과학과 기술로 빚어내는 수 많은 편리함속에 파묻혀있는 너와 나의 모습들로 가득 차 있다. 호롱불의 희미한 불빛이 아닌 형광등, LED 등이 세상을 밝혀 주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다. 생각해보면 가로등 하나 없던 깜깜한 밤, 아련히 흐르던 호롱불은 우리의 고된 삶을 밝혀 주는 마음의 등불이었다.

(2016.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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