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피리

2016.06.23 06:44

이종월 조회 수:62

보리피리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이 종 월

5월의 들녘은 바다보다 더 진한 초록빛이었다. 차창 밖 끝없이 너른 들녘에 출렁이는 초록물결 위로 힘겹게 넘던 고개가 어렴풋했다. 쑥버무리에 찬물 한 바가지로 허기진 배를 달래며 숨차게 넘었던 보릿고개였다. 흘러내리는 바지를 허리띠로 졸라매던 고달픈 시절을 추억으로 더듬고 있다. 보리밭 사이로 시원스레 뚫린 길을 따라오다 보니 올망졸망 작은 섬들 속에서 소록도가 먼저 나를 보고 반겼다.

5월이면 논밭은 이삭을 밴 보리가 초록물결로 넘실거린다. 보릿고개는 사라지고 널찍한 풍요의 길로 변했다. 어둔한 시대의 보리밭 한 자락에서 천대를 받으며 상흔(傷痕)조차 드러낼 수 없었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소록도를 찾았다. 어둡고 차가운 세상에서 목숨만 부지하는 게 이들의 삶이었다. 나 또한 상처를 안겨 준 소년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지난날을 뉘우치는 마음으로 이 섬에 갔었다.

소록도는 크고 작은 섬들 사이를 비집듯이 울창한 수목에 은빛 모래 띠를 두른 채 놀란 아기사슴처럼 침묵 속에 다소곳이 누워있었다. 섬은 초입에서부터 푸르고 바다는 맑았다. 갖가지 나무들로 짙푸르게 단장을 하고 온통 나를 맞이하는 듯했다. 안에 드니 울퉁불퉁한 참나무들까지 손발이 거칠어진 이곳 사람들의 삶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부드럽고 색깔 고운 소나무들은 마음씨 착한 사람들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림 같은 적송과 아담한 해송은 철따라 피는 매화, 철쭉, 진달래와 더불어 섬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나 싶기도 했다.

우거진 숲만큼이나 이름 모를 새소리가 솔바람과 섞이어 이 섬의 슬픈 역사를 들려주는 것이라 여기며 느실느실한 걸음으로 공원에 들어섰다. 소나무 잎 사이로 보리피리소리가 새어나와 통곡의 길에서 맴돌고 있는 성싶었다. 아픔을 새겨주는 수탄장(愁嘆場)이라는 곳이 그날을 말해주고 있어서일까. 수탄이란 근심하며 탄식한다는 뜻이라 했다. 환자를 수용하는 곳과 미감아인 그 자녀들이 머문 곳을 구분하여 철조망으로 차단했던 장소였다.

감염을 차단한다는 핑계로 부모와 자식이 한 달에 한 번씩만 만날 수 있었다니, 사람으로서 견디기에 얼마나 시린 가슴이었을까. 가족으로서 부모자식이 함께 살지 못하는 처지와 신병의 고통은 통탄의 눈물로 쏟아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채 두 세 발도 넘지 못하는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부모와 자식이 손을 뻗어 마주보며 울부짖는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부모가 자식을 안아보지 못하고, 자식이 부모의 품속에 안기지 못하도록 천륜을 갈라놓은 절규의 흔적은 오늘도 뜨거운 강물이 되어 그날의 아픔으로 흐르고 있었다.

몇 발짝 더 들어서니, 섬 안에 갇혀 헬 수조차 없는 사연들이 한으로 쌓인 더미 속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서러운 삶을 살아 온 이들의 슬픈 이야기를 「날개 달린 천사탑」이 말해주었다. 환자들을 구원한다는 하얀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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