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2016.05.18 14:24

김학 조회 수:8

          '지구의(地球儀)'
                                                                                김학 


 나는 날마다 지구 품속에서 논다. 지구는 나의 보호자요, 정다운 친구다. 내가 태어난 곳이 지구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곳이 지구이니, 나는 이 지구에서 살다가 이 지구에 묻히리라. 우주인이 아닌 나는 앞으로도 결코 이 지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른 아침 잠자리에서 눈을 뜨면 먼저 지구와 눈을 맞춘다. 아침마다 뒷동산 인후공원에 오르는 것은 지구와 발을 맞추는 일이다. 그처럼 산길을 걷는 것은 건강을 지키려는 운동이기도 하다.
 늘 맑은 산소를 들이킬 수 있는 일도 지구가 베풀어 준 혜택이다. 내 발은 늘 이 지구에 얹혀있고, 내 입은 이 지구가 마련해 준 음식을 먹으며, 내 귀는 이 지구가 들려주는 소리를 듣는다. 내 눈은 이 지구가 품고 있는 삼라만상을 보고, 내 코는 이 지구가 쏟아내는 온갖 냄새를 맡는다.
 때로는 향기롭기도 하고 또 때로는 코를 싸매 쥐기도 하는 그런 냄새를. 지구는 나와 별개의 존재 같지만 사실은 나의 모태(母胎)다. 내가 곧 지구요 지구가 곧 나다. 태아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살듯 나는 밤낮없이 지구의 품속에서 노닌다.
 사람들은 일찍이 이 지구를 5대양 6대주(五大洋 六大洲)로 나누었다. 이 5대양 6대주를 듬성듬성 다녀 보았다. 내가 밟고 다녔던 지구촌의 그 발자국은 이미 다 사라졌겠지만, 내 마음에 찍어둔 그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때때로 해외를 싸돌아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일들과 그곳에서 만났던 지구촌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내 나이가 들었듯 내가 만났던 지구촌 친구들의 나이테도 굵어졌으리라.
 지구는 둥글다고 배웠다. 그렇지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산 넘고 바다 건너 외국여행을 다녀 보아도 지구가 둥글다는 걸 깨달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기차나 자동차가 지구 밖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고 땅바닥에 붙어서 잘 기어 다니고 있고, 호수나 바닷물이 쏟아지지 않고 언제나 그 호수와 그 바다에서 출렁거리는 걸 보면 지구가 둥글다는 말에 선뜻 동의할 수가 없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느끼려고 문방구점에서 지구의(地球儀)를 하나 샀다. 지구의를 보면 지구가 둥근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산 지구의는 배구공과 비슷한 크기다. 이 지구의에는 세계지도가 울긋불긋 그려져 있는데, 이 지구의는 언제나 내 서재 컴퓨터 책상 위에서 나와 눈을 맞춘다.
 인터넷을 뒤지다 생소한 나라 이름이 나오면 나는 이 지구의를 돌려 보며 어느 대륙에 있는지, 어느 나라와 이웃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때늦게 세계지리를 공부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지구의를 맨 처음 만든 이는 누구였을까?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 지구의를 처음으로 사용했다는데 BC 150년에 크라테스가 만들었다고 역사는 전한다. 가장 오래된 지구의는 1492년에 마르틴 베하임이 뉘른베르크에서 만든 것이라고 하던가?
 지구의는 한가로울 때 나를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정다운 친구다. 그 동안 내가 다녀왔던 곳을 찾아 그때의 추억을 떠올려 보는 일도 즐겁다. 아프리카 여행 때 오석(烏石)으로 조각한 검은 불상(佛像)을 사진에 담아오지 못한 것을 뉘우치기도 하고, 맥주를 마시다 자정이 되자 더 이상 술을 팔지 않은 미국여행 때의 기억도 되살아난다. 우즈베키스탄에 갔을 때는 바람이 불지 않아 나무들이 기합이라도 받듯 뻣뻣이 서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중국 동북3성에 갔을 때 보았던 퇴락했던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들이 떠오르고, 몹시 가난해 뵈던 그 농촌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어른거린다. 지금은 얼마나 형편이 나아졌는지…….
 호주를 거쳐 뉴질랜드에 갔을 때는 남섬과 북섬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비행기를 타고 두 섬을 오갔으니 꽤 넓은 나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지구의에서 살펴보니 뉴질랜드는 호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조그마한 나라였다. 그 뉴질랜드에서는 6‧25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그 나라 어느 퇴역군인이 짝짝이 양말을 신고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서 한쪽 양말에 구멍이 나면 멀쩡한 다른 쪽 양말까지 버렸던 내 버릇을 반성하기도 했다.
 유럽에 갔을 때는 6월 초여서 더위 때문에 무척 고생을 했었다. 그곳에서 둘러보는 곳은 주로 박물관과 성당, 궁전 등이었다. 모든 게 비슷비슷하여 어느 나라에서 보았는지 헷갈릴 뿐이었다. 다만 아직까지도 낭만적인 추억으로 남은 것은 영국에서 프랑스까지 바다 속의 터널로 달렸던 유로패스 기억뿐이다.  눈의 고장 일본 홋카이도는 겨울에 가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효도관광으로 보내준 여행이어서 5월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는 온천욕을 실컷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마주 보고 있는 온천탕의 남탕과 여탕의 간판이 날마다 바뀐다는 점이다. 어제의 여탕이 오늘은 남탕이 되고 오늘의 남탕이 내일은 여탕으로 바뀌었다. 또 홋카이도는 도로 위쪽에서 지면을 향하고 있는 빨간색 화살표시가 눈에 띄었다.  그래서 그게 무엇인지 물어보니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포장도로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공중에다 그렇게 표시를 해야 포장도로의 가장자리를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구경거리여서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나는 이 지구의를 보면서 내 나름대로 여행의 꿈을 키우고 있다. 아직 밟아보지 못한 미지의 땅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그 나라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고 싶은 까닭이다. 언젠가 남아메리카를 찾아가서 잉카문명과 마야문명의 흔적을 둘러보고 그 화려한 문명이 왜 망가졌는지 살펴보고 싶다.
 또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 유역을 점검하여 아직도 지구가 건강한지 알아보고, 또 북유럽을 돌아보며 공산권에서 벗어난 여러 나라들이 얼마나 발전했고 또 얼마나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는지 피부로 느껴보고 싶다.
 지구촌 전쟁의 진원지 중동지역에도 가보고 싶다. 신앙심이 강한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살생을 밥 먹듯 가볍게 여기는지 그 속뜻을 알아보고 싶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중동사람들의 생사관을 깊이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성싶다. 명상의 나라 인도에도 가고 싶다.  인도사람들이 왜 갠지스 강에서 세례를 받고, 죽으면 화장하여 그 강에 뿌려지고 싶어 하는지, 그 깊은 신심(信心)을 알아보고 싶다. 나이는 어느새 고희의 문턱에 들어섰는데 아직도 가보고 싶은 곳이 이리도 많으니 이를 어찌할꼬?
 미국에 유학중인 둘째아들 창수가 보고 싶으면 지구의를 찾는다. 북아메리카 주에서 미국을 찾고 동부 뉴욕 근처를 샅샅이 뒤져 보아도 그 녀석이 사는 피츠버그란 도시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지니 펜실베니어주 남쪽에 피츠버그 시가 있었다.
 인구 31만쯤으로 세계 제1의 철강도시란다. 철강왕 카네기가 그곳에서 사업을 일으켜 성공한 곳이고, 그의 이름을 딴 ‘카네기 멜론 유니버시티’는 미국에서 알아주는 명문 공과대학이라고 한다. 창수는 석사과정을 플로리다에서 시작하여 유타주로 옮겨 유타주립대학에서 학위를 받았고, 펜실베니어주로 옮겨 피츠버그의 ‘카네기 멜론 유니버시티’에서 IT전공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곳에서 아들 동윤이까지 낳았으니 그 녀석은 피츠버그를 제2의 고향이라고 여길 듯하다.
 둘째 아들이 그곳에 머문 지 여러 해가 지났고, 지난해 3월 18일 손자까지 태어났지만 나는 아직 그 피츠버그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러나 피츠버그는 둘째아들이 꿈을 키우는 곳이요, 손자 동윤이가 태어난 곳이니 나와도 보통 인연은 아니다. 그러니 언젠가는 꼭 찾게 될 것이다.
 지구의는 지워지려는 나의 추억을 되살려 주고 미래의 꿈을 열어 주기도 한다. 지구의는 내가 눈으로 대화를 나누며 쓰다듬어 주면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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