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크리스마스

2016.05.21 08:20

호성희 조회 수:95

오월의 크리스마스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반 호성희

 

 

얼굴이 작고 수줍음 많은 한 소녀를 만나러 가려고 평소보다 조금 서둘러 집을 나섰다. 지난 3월부터 ‘C’ 중학교에서 한 베트남 소녀를 만나 한글을 배우는 걸 도와 주고 있다. 10년 전에 한국에 와서 정착한 엄마와 살려고 한국에 온 지 3개월 정도 되었다고 한다. 물론 한국어는 전혀 소통이 안 되어 다른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과학실험이나 가사실습 체육활동은 함께 가능하나 그 외의 학습활동은 불가능하여 오전에 한국어를 공부하기로 약속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방문하고 있다.

소녀를 만나러 가는 길 북면 공단을 지나 백암 길부터는 녹음이 짙어가는 이팝나무 가로수가 주변에 핀 아카시아와 어우러져 순백의 꽃길을 선물해준다. 배고픈 시절 이팝나무를 보며 소복하게 밥사발 위로 올라온 쌀밥을 상상하며 침을 삼켰을, 가난한 이들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봄이 떠난 자리에 푸른 신록이 채워졌다. 와우리 예쁜 소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 오늘도 하얀 이팝나무 꽃과 아카시아 꽃으로 마치 5월의 크리스마스처럼 눈부시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때 이른 열기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농로로 접어들면서 발걸음이 잦아진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나비 한 마리가 솜털 같은 민들레 꽃송이를 날려버리고 하얀 꽃 위로 내려앉아 날갯짓을 했다.

“봄아, 이제 떠나가야겠구나! 내년에는 더 예쁜 봄 친구들을 데려 오렴.”

인사를 건네며 이마에 고인 땀을 닦는다. 소녀를 만나러 가는 길가엔 요즘 보기 드문 하얀 민들레가 초록빛에 싸여 더욱더 하얗게 윤기를 내며 활짝 웃고 있다. 길옆으로는 부지런한 농부가 쌓아 놓은 거름냄새를 바람이 실어가며 나에게 덜어주고 지나간다. 농로를 20분쯤 걸어가면 문 앞까지 마중 나온 예쁜 소녀가 나를 반기며 가방을 받아들고 앞장선다.

아직은 낯설고 서툰 이 소녀에게 앞으로 낯선 땅에서 예상치 못한 시련도 만날 것이고, 한편으로는 고향에서 누리지 못한 풍요로움도 함께할 것이다. 나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한다. 이 세상은 따뜻하고 사랑이 넘친다는 것을 진심을 담아서 알려주고 싶다.

착하고 예쁜 소녀야!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단다. 네가 이 세상에서 뿌리내리고 사회에 나갈 때 지금 이 시각을 소중히 생각하고 잊히지 않는 시간이 되길 기대한다.

며칠 뒤 소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가끔 꺼내보던 장롱면허증이 제 기능을 했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고 다니던 길을 차를 운전해서 다니고 있다. 장롱면허를 탈피한 나는 한쪽에 차를 세우고 혼자 사진도 찍고 버스를 타고 지나는 길에 스치며 지나갔던 이팝나무의 아름다운 모습도 자세히 살펴봤다. 운전하니 좋기는 했다. 길을 가다가 내가 쉬고 싶은 데서 마음대로 쉴 수도 있고 무엇보다 여유롭게 시간을 갖고 꽃과 함께 기분도 더욱 좋다. 바람에 아카시아 꽃향기가 진하게 들어왔다. 눈부시도록 하얀 꽃이 곁에 있는 소나무의 푸른빛을 돋보이게 해준다. 한겨울에 소복이 쌓인 눈처럼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잠시 정신을 놓고 있다가 빠르게 지나치는 자동차 소리에 놀라 정신을 차리고 이팝나무의 꽃송이를 살펴봤다. 작은 꽃잎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 주는 것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이 작은 꽃잎 하나하나가 모여 꿈속에서나 볼 오월의 크리스마스를 상상하게 하다니!’ 작고 보잘 것 없는 꽃잎이 함께할 때 더욱더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서둘러 꽃부터 피우고 떠나버린 매화와 벚꽃이 떠난 자리에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찾아와 ‘나도 봄꽃인데!’라고 말하는 듯 순백의 꽃송이가 눈부시다. 때 이르게 찾아온 여름 기온이 초록 잎사귀와 어우러져 떠나는 봄의 자리를 채워주며 녹음을 부르고 있다.

소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오늘따라 햇볕이 따뜻하다. 편안하고 좋은 느낌이 든다. 시골길이라 드문드문 지나는 자동차가 빠르게 스쳐 지나고 나면 나 혼자 마음 놓고 달린다. 가로수들의 초록이 점점 더 짙어지는 길 따라 이팝나무와 아카시아 꽃이 한데 어우러진 순백의 꽃길을 달리며 기분이 절로 청정해진다.

“고맙다, 애마야! 네 덕에 햇살에도 녹지 않는 눈꽃송이를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구나!”

(2016.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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