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옛적처럼

2016.05.27 09:32

김학 조회 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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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처럼

三溪 金 鶴


옛날 옛적 학창시절엔 방학이 몹시 기다려졌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못지않게 방학이 기다려졌다. 방학이 되면 어김없이 외갓집을 비롯하여 고모와 이모네 집을 찾아가곤 했었다. 고모가 세 분이고 이모가 세 분이니 방학 한 달 동안에 모두 찾아가기는 어려웠다. 방학 때마다 그렇게 찾아다니다 보니 외사촌과 이종사촌 그리고 내종사촌들과도 친형제처럼 가까워졌다. 어린 시절의 잦은 만남으로 정이 깊어져 늘그막인 시방까지도 옛날처럼 그렇게 다정하게 지낸다.
중학교 2학년 때 순창군 인계면에 사시던 둘째이모 댁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는 라디오나 텔레비전도 없었다. 저녁에 호롱불을 켜고 저녁식사를 하고나면 무척이나 심심했었다. 그런데 이모부께서는 사랑채 앞 오동나무 위의 채반에 담아둔 홍시를 꺼내 주셔서 맛있게 먹었다. 이빨이 시린데도 어찌나 달고 맛이 있던지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막내고모는 정읍에 사셨다. 고모부가 정읍농고에 근무하시는 바람에 학교 안 관사에서 사셨다. 그 여름방학 때는 방학 첫날부터 날마다 하늘만 바라보았다. 고모 댁에 가기로 했는데 연일 비가 내렸기 때문이다. 장마가 걷히고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던 어느 날, 내 고향 삼계에서 전주행 버스에 올랐다. 전주 정류장에서 정읍행 버스로 바꾸어 탔다. 처음으로 정읍에 가는 길이어서 창밖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가로수에서는 매미들이 간드러지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들녘의 논에서는 벼가 익어가고 있으며, 논바닥에 세워진 허수아비들은 목을 길게 빼고 새를 쫓느라 바빴다.
정읍에 도착한 뒤 물어물어 정읍농고를 찾아가니 고모와 내종사촌 동생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널찍한 정읍농고 교정은 좋은 놀이터였다. 그곳에서 일주일쯤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려니 섭섭하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언제나 교복을 입어야 했었다. 겨울엔 검정색 교복을, 여름엔 쑥색 바지에 흰색 남방셔츠를 입었다. 나들이를 할 때는 으레 교복차림이었다.
큰고모는 전남 구례군 광의면 구만리에 살고 계셨다. 그 고모 집에 가려면 삼계에서 남원시 사매면 서도역까지 걸어가서 기차를 타고 구례구역에서 내렸다. 구례구역에서는 소가 끄는 마차를 타고 구례읍까지 가서 거기서 버스를 탔었다, 큰고모 댁에 가면 한 살 위의 형이 있어서 좋았다. 그 형과 어울려 화엄사로, 천은사로 돌아다니는 게 즐거웠다. 대청에서 부채질을 하며 놀다가 더우면 앞 냇가로 달려가서 물장구를 치며 미역을 감고 놀았다. 그러면 더위는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그때는 에어컨은커녕 선풍기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큰 이모 댁은 우리 집과 외갓집 중간쯤인 사매면 운교리(雲橋里)에 있었다. 그러니 외갓집에 오갈 때마다 들러 점심식사를 했을 뿐 하룻밤을 잔 기억은 없다. 남원시 덕과면 비촌리 사립안 외갓집엔 자주 다녔다. 그 동네는 광주이씨 집성촌으로 온 동네가 일가친척들이었다. 방학 때 외가에 가면 집집마다 나를 초대하여 식사를 했던 기억이 새롭다.
우리 외가는 대가족이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비롯하여 큰 외삼촌과 작은 외삼촌내외 그리고 외사촌동생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또 이웃에 있는 큰 외갓집 사랑채는 사또가 근무하는 동헌(東軒)처럼 지대가 높고 건물은 위엄이 있었다. 고을에서 양반행세를 하는 종가집이어서 그랬을까?
방학 때 나는 외갓집 사랑채에 설치된 서당에서 천자문과 추구(推究)를 배우며 서당 분위기를 익힌 적도 있었다. 내게서 유교의 냄새가 조금이라도 난다면 그건 외갓집 영향이다. 외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외삼촌과 이모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한문공부만 시켰으니, 얼마나 철저한 유교집안인가? 큰 외삼촌은 돌아가실 때까지 한복차림이었고, 나들이를 하실 때면 늘 갓을 쓰고 다니셨다.
옛날 옛적엔 일가친척 댁을 자주 찾아다녔다. 방문하는 사람도 즐거웠고 맞이하는 사람들도 반가워했다. 특히 방학 때 친척 댁을 방문하고 돌아 올 때면 넉넉하게 차비를 주셔서 좋았다. 방학은 용돈을 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때는 누구나 가난했지만 그렇게 살았다. 오랜만에 사위가 찾아오면 장모는 으레 살림 밑천인 씨암탉을 잡아 대접했다. 그처럼 손님 접대에 정성을 다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남의 집을 잘 찾아가지 않는다. 서로가 불편한 까닭이다. 아이들은 방학 때조차 학원에 다니느라 일가친척을 찾아다닐 시간이 없다. 사촌끼리도 서로 자주 오가지 않는다. 그러니 정이 깊어질 기회가 없다. 먼데서 손님이 와도 음식점에서 식사를 대접하고 잠은 호텔이나 모텔에서 자도록 한다. 자기 집의 간장 맛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파트는 크고 넓어지는데도 손님이 찾아와 하룻밤이나 이틀 밤 정도 자고 가는 일은 드물다. 옛날 옛적엔 동네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던 도부장수도 하룻밤씩 재워 보내곤 했었는데 말이다.
옛날엔 집집마다 형제자매가 많았는데도 친척집을 오가며 친척 형제들과도 사이좋게 살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랑 자녀 한두 명을 낳아 기르면서 가까운 친척끼리도 남남처럼 산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세상이 되었는데도 왜 이렇게 정이 메말라가는 것일까?
아이는 산부인과의원에서 낳고, 결혼은 예식장에서 하며, 아프면 병원을 찾아가고, 어른이 돌아가시면 장례식장에서 문상객을 맞는다. 옛날과 크게 달라진 요즘의 풍속도이다. 이대로 가면 앞으로는 또 어떻게 변할 것인가?
멀어져 간 정(情)을 되찾아야 할 것 같다. 귀찮고 부담스러우며 힘겹더라도 그 정을 꼭 다시 찾아야겠다. 정이 없는 가족, 정이 없는 친척, 정이 없는 이웃은 너무 건조하여 살맛이 나지 않는다. 내게서 떠난 정부터 불러와야겠다. 그리하여 옛날 옛적처럼 정이 흥건한 세상으로 돌아가면 좋겠다. 그러면 참 살맛이 날 것이다.
(2015.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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