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향해서

2016.02.01 09:49

이미자 조회 수:92

꿈을 향해서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이미자

 

 

 

너무 부족함이 많은 내가 과감하게 수필을 써보겠다고 신아문예대학에 발을 내디뎠다. 아직 일선에서 뛰고 있기에 시간상의 어려움으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젊은 날에는 시를 쓴답시고 무엇인가 끼적거려 노트 몇 권 분량을 만들었는데, 잦은 이사를 하노라 그 원고를 잃어버렸다.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형편없는 글일 것이다.

평생 작은 식당을 하며 제 몸 삭는 줄 모르고, 옴 몸이 부서져라 미련하게 일을 했다. 아니 먹고 살려고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다시 그때로 되돌아간다 해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테니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속담도 있지만, 고생에도 차원이 있지 않을까? 난 유년시절부터 가난과 동고동락했다.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 사회를 보면, 혼인도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끼리, 부자들은 부자들끼리 혼인을 하는 것이 전반적인 사회통념(社會通念)이다. 가난한 사람이 자수성가(自手成家)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가 아닌가. 보편적으로 그들은 비빌 언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 나이 쉰이 넘을 즈음에 식당을 접고 시골로 이사를 했다. 항상 배움에 목말라하던 나는 대학에 가고 싶었다. 사회복지를 전공해서 소외되고 고통 받는 노인들을 위해서 일조하고 싶었다. 군장대 사회복지과에 입학했다. 처음의 대학생활이 생소하지만 뿌듯했다. 내가 그토록 열망하던 대학생이 된 것이다. 독감에 걸려서도, 잇몸이 퉁퉁 부어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강의를 들으러 학교에 갔다. 졸업반이 되어 실습을 나갔다. 난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현장에 나가 현실에 부딪치니 너무 어려움이 많았다. 내적성에 딱 맞을 것 같았는데, 이런 일은 천사나 할 수 있는 일 같았다. 환경 또한 매우 열악했다. 사회복지사 한 사람이 보살펴야 하는 어르신들은 너무 많고, 더구나 와상환자를 돌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갑자기 겁이 났다. 자신이 없어졌다. 현실은 꽁지를 빼고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보람도 있었다. 내가 어르신의 연세를 물어보니 아마 서른 살은 넘었을 거여 하시며 하얗게 웃으시던 모습, 당신 집에 다른 할머니들이 와서 양식을 축내고 안 간다고 속상해 하시던 모습, 치매를 앓으시는 어르신들의 순백의 말씀과 천사 같은 표정이 지금도 내 가슴에 각인되어있다.

가끔 생각해본다. 내 미래의 모습 같아 씁쓸해지기도 한다. 졸업을 하고 자격증도 받았다. 보육교사 자격증과 함께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나왔지만, 내게는 쓸모없는 종이에 불과했다. 젊은 사람들도 취직하기 어려운데 나이 많은 내가 취직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때서야 내가 갈 길을 멀리 돌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꾸던 꿈은 따로 있었다는 것을···.

아주 오래전에 소책자『밀물』이라는 월간지에 서간문이 당선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사는 것이 너무 팍팍해서 책을 읽는 시간도 나에겐 사치였다. 그 뒤로 몇 십 년간은 한 번도 끼적거린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주 잊어버리고 산 것은 아니었다. 항상 꿈을 꾸고는 있었지만, 나에겐 그저 꿈일 뿐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 눈도 침침해지고 귀도 고장이 났는데,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방송통신대학교 국문과에 편입을 한 것이다. ‘이제 국문학과 공부를 하면 나도 글을 쓸 수 있겠구나,’ 꿈이 현실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 기뻐서 구름 위를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나를 기뻐하게 놔두지 않았다. 공부를 하다 보니 슬럼프에 빠지고 만 것이다. 정말 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은 흐르고 배우면 배울수록 어려워 글쓰기가 더욱 자신감이 없어졌다. 시 한 편도 수필 한 단락도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너무 어렵고, 거대한 산처럼 내 앞을 가로막았다. 어차피 글을 안 쓸 것이라면 공부를 계속할 필요가 있을까? 포기를 할까? 그러나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글은 못 쓰더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은 하고보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지난해에는 국문학과 카페에 공지가 떴는데, 농민신문사의『전원생활』이라는 자매지에 “생활 속의 이야기 공모” 라는 공고가 올라와 있었다. 공지를 보는 순간, 이것이다 싶었다. ‘내가 시골로 이사 와서 겪은 4년을 여기에 담으면 되겠구나.’ 나에게 딱 맞는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이건 나도 쓸 수 있겠다 싶어 곧바로 쓰기 시작했다. 내가 경험한 그것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라 쉽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퇴고를 많이 했어야 했는데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그냥 원고를 제출하고 말았다.

잊고 있었는데 농민신문사에서 연락이 왔다. 전화너머로 담당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선을 축하합니다.”라는 말에 얼떨결에 나는 “아, 예 감사합니다.”라고 짧게 인사를 했다. 『전원생활』11월호에 내 글이 게재된다면서 상금 오십만 원과 함께 상패를 보내주었다. 다음에 관련사진 몇 장을 메일로 보내 달라는 말과 함께···.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모자라는 글이라 누가 보는 것조차 창피하다. 좀 더 다듬었으면 덜 부끄러운 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곰삭지 않은 어설픈 글을 뽑아주셔서 감사하고, 비록 ‘가작’이긴 하지만 당선의 기쁨과 함께 자신감을 안겨 주었다.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학교 졸업논문 대체인정을 받아 졸업논문을 쓰지 않고 통과했다는 점이다. 학우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감사했다. 갑자기 세상이 달라 보이고 나도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뿐, 글을 쓰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상금은 학우들과 지인들에게 밥을 사고 축하를 받았다. 그래도 공부는 열심히 한 덕분에 국가장학금이지만 장학금도 받았으니, 내 나이 환갑에 이 정도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제 졸업을 코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니,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지나가는 시간이 너무 아쉬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마저 들었다. 시· 소설· 수필 어느 것을 배워야하나 고민하다 수필을 체계적으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신아문예대학에 방학특강 등록을 했다. 처음에 야간반 등록을 했다가 수요반으로 바꿨다. 그러고 보면 행운은 항상 내 가까이에 있었다. 수필의 대가이신 교수님의 제자로, 또한 훌륭하신 문우님들과 나란히 동문수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다니, 이런 행운이 아무한테나 있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시작만 하면 자신감이 떨어진다. 요즘 문우님들의 수필을 읽어보는데 모두가 너무 잘 쓰는 것 같다. 난 아무리 갈고 닦아도 그분들의 대열에 합류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또 갈등을 겪고 있다. 어떻게 하면 나도 기라성 같은 그분들 옆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며 튼실한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그래도 난 또 꿈을 꾸어보려 한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정신으로 노력한다면 나도 그분들의 대열을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

(2016.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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