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발자국소리

2016.02.05 07:56

양연길 조회 수:57

봄의 발자국소리

꽃밭정이수필반 양 연 길

모란(牧丹)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김영랑(金令郞 : 1903~1950)시인이 쓴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의 첫 연입니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고 꽃소식이 전해져도 모란이 피기까지는 아직 찬란한 봄을 기다리겠노라 읊은 것을 보니, 시인은 아직 제대로 봄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모란의 무성한 잎과 탐스런 꽃을 보기 전까지는 봄을 제대로 만끽할 수 없어서란 생각이 듭니다.

이 시는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의 강점 하에 있던 1934년 4월, 문예지 『문학』3호에 발표되었습니다. 문학이 사실과 현실의 반영이라고 한다면, 이 시인(동시대의 사람들)은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황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살고자 하는 하나의 몸부림을 사실적으로 표현했을 법한데 오히려 유미적(唯美的)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시를 감상하는 데는 봄을 기다리겠다는 의미와 그 상징성에 대해 많은 새김과 관심이 모아졌습니다. 하지만 자연현상만 바라보면 한 달쯤 더 기다려야 봄이 무르익고 모란은 활짝 꽃이 필 것입니다. 그때 시인은 반드시 기다림의 보람을 갖게 되겠지요. 모란은 오월이 오면 짙은 향기를 품어낼 테니까요.

사랑의 집에는 모란 몇 그루가 있습니다. 사랑의 집이란 내가 사는 동네에 있는 낡고 허름한 빈집을 빌려 손을 보아 갑자기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의 임시 거처로 만든 집입니다. 모란은 황홀한 자태를 뽐내고 짙은 향기를 품어내며 아름다운 꽃을 피우던 봄과 잎이 무성한 여름이 지나면 낙엽 지는 가을을 맞이합니다. 낙엽이 지고나면 모란은 고목처럼 앙상한 가지를 드러냅니다. 모란의 화려했던 전성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고 완전히 말라 죽은 모습입니다. 그 모습으로 겨울을 나고 봄의 문턱에 들어서면 다시 잎이 움트고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합니다. 죽은 듯 웅크리고 있던 모습과는 사뭇 달리 꿈틀대는 생명을 보여 줍니다. 모란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생명의 끈질김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은 바람 끝이 매섭습니다. 사랑의 집에 들러 한 겨울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나 살펴보았습니다. 임시 거처했던 사람들은 새로운 둥지를 찾아 떠났고, 식물가족들만 제자리에서 끈질긴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특히 모란은 뾰족이 잎을 드러낼 준비를 하며 꽃망울을 품고 있었습니다.

맨 흙살만 보이는 땅에선 조금 있으면 작약이 여린 순을 내밀며 올라올 것입니다. 난초의 예쁜 잎들은 다투어 봄 아지랑이를 따라 실려 오는 훈풍에 춤을 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그려보니 저절로 봄의 신명이 피어오르는 듯합니다.

식물의 생명력은 참 위대합니다. 추운 겨울이면 죽은듯하다 봄이 되면 기지개를 켜듯 다시 깨어나는 모습은 외경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사랑의 집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나오는데 눈 녹은 물방울이 목덜미에 떨어졌습니다. 올려다보니 호랑가시나무에 피었던 눈꽃이 떨어진 자리에는 빨간 열매가 해맑은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순환하는 자연의 순리에 잘도 적응한다는 생각을 하니 숙연해집니다.

사람은 어떨까요? 하루살이 같이 하루를 살다가 죽고, 다시 깨어나 하루를 사는 반복이 삶이라 생각해 봅니다. 이 하루들이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이기를 반복하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란 사계(四季)를 만들고, 이것이 어느 시점까지 반복되는 세월 속에 살던 사람이 현상의 세계를 마감하고 영원을 향해 떠나는 것이 사람의 일생이란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니 하루만 생각하고, 한 달만 생각하고, 한 계절만 생각하면 시공은 언제나 한결같고 그 속에서 누리는 삶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지요. 언제나 새로운 삶을 산다는 마음은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것일까요?

김영랑 시인이 기다리는 찬란한 봄은 반드시 오듯이, 우리가 기다리는 새로운 날들도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러니 기쁘게 맞이할 준비를 늘 철저히 해야겠지요.

겨울이 가고 있습니다. 이제 봄맞이 준비를 해야겠네요. 저만치 봄이 오는 게 보이지요? 아니, 저 봄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2016.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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