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먹지

2016.01.23 09:09

정남숙 조회 수:377

꺼먹지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정남숙

‘꺼먹지!’ 상호가 멋있다. 꺼먹지가 뭘까? 꺼먹지가 뭐에요? 생각만하다 물었다.

충남 세종시로 이사를 간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저녁을 대접한다며 찾아간 이웃식당 상호가 ‘꺼먹지 황태국밥’ 이었다. 황태국밥은 알 수 있지만 ‘꺼먹지’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말이었다. 그저 토속적인 옛 방언이나 고전적 단어를 상호로 사용했나보다 하고, 일행을 따라 무심코 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예약(豫約)된 상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니, 배추 겉절이와 굵직굵직 썬 익은 무 몇 조각과 무청시래기나물, 그리고 콩자반이 전부였다. 그것도 감질나게 양(量)이 조금씩만 담겨있었다.

아직 덜 차려진 것이겠거니 기다려 봐도 소식이 없다. 종업원이 밥공기를 보내며 잠간 기다리란다. 황태구이만 나오면 오늘메뉴는 전부라 한다. 전주음식에 길들여진 우리는 약간 부실(不實)한 상을 받고, 메인이 나오기 전 미리 맛을 보며 모든 접시를 비웠다. 무청시래기나물을 맛보며 한마디씩을 했다. 시래기나물은 들기름으로 볶아야 제 맛이 난다는 이들과, 들깨국물을 넣어 볶아야 부드럽고 맛있다며, 주부9단인 우리는 서로의 음식솜씨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음식은 누가 뭐래도 전주음식이 최고라는 결론을 맺고, 모자란 양을 추가로 주문하여 먹고 또 먹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나는, 살짝 카운터로 찾아가 꺼먹지의 뜻을 물었다. 설명인즉 충청도 방언의 향토(鄕土)음식 이름이라한다.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나에게 친절한 설명이 따라 왔다. 설명인즉 방안에 있는 밥상을 가리키며 ‘지금 잡수신 반찬이 꺼먹집니다,’ 한다. 주인은 자신 있게 ‘우리 집 메인반찬’이라 자랑한다. 꺼먹지를 먹었다니? 우리가 뭘 먹었지? 내 눈에 보였던 것은 배추겉절이, 무김치, 무청시래기나물, 콩자반뿐이었는데, 혹시 실수로 우리식탁엔 빠졌었나하고 옆 식탁을 바라보아도 우리식탁과 별로 다른 것이 없었다. 꺼먹지가 뭔데요? 되묻는 내게 주인은 다시 설명을 해주었다. 조금 전 우리가 먹은 무시래기나물이 충청도에서는 ‘꺼먹지’라 한단다.

다음날 출근한 친구들에게 물어 보았다. ‘꺼먹지’를 아느냐고. 그들은 다 모르고 있었다. 그 중 하나의 대답은 ‘까만 돼지’ 아닐까? 한다. 나는 어제 밤에 들었던 꺼먹지를 설명해 주었다. 꺼먹지는 무청시래기나물인데 우리처럼 그냥 말린 것이 아니라, 항아리에 소금으로 숙성을 시킨 것이라 했다. 염장 방법이 조금 다른 것으로 지난번 교황(敎皇) 방문을 기념해 개발한, '당진 꺼먹지 비빔밥'이 상표등록 됐다고 자랑했다. 꺼먹지 비빔밥의 주재료인 꺼먹지는 11월 말 당진지역에서 재배되는 무청을 수확해 소금, 고추씨와 함께 항아리에 넣고 절인 뒤, 이듬해 5월부터 꺼내 먹는 당진의 대표 향토음식이란다. 김치가 검게 숙성돼 '꺼먹지'라고 불리며, 식이섬유와 무기질이 풍부한 것이 특징이라지만, 아무리 먹어봐도 김치가 아니라 별반 다를 게 없는 우리의 시래기나물에 불과했다.

무청시래기를 소금에 절여 만든 충청도향토음식 꺼먹지가, 프란치스코 교황을 대접하는 상에 올랐다고 알려지며, 최근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맛이 강하지 않고 연한 것이 특징인 꺼먹지는, 어느 음식과 함께 요리해도 어울린다. 덕분에 다양한 음식에 함께 넣어 만든 꺼먹지 정식이 인기란다. 어디에나 잘 어울리는 향토음식 ‘꺼먹지 비빔밥’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물론 방한한 국내외 신부, 사제단에게 제공돼 찬사를 받았단다. 교황 방문 이후에 급증한 손님맞이에 분주한 길목에서는, 사제단과 주교들이 맛을 봤다고 해서 ‘교황님 식단’이라 불리는 ‘꺼먹지 정식’이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길가를 살펴보니 눈에 띄는 간판마다 ‘꺼먹지’가 줄줄이 붙어있었다.

충청도 꺼먹지와 우리 전라도시래기나물은, 저장법만 약간 다를 뿐이지 맛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겨울철 김장할 때 나오는 부산물인 우거지를 말리면 시래기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배추시래기를 김장 간을 하고 남은 간국에 그대로 넣어 두었다가 간에 폭 절였다. 일손이 날 때, 앞개울에서 깨끗이 씻어 물기를 꽉 짜내어 잘게 썰어, 된장에 조물조물 주물러 무쳐 항아리에 꼭꼭 눌러 담아놓으면, 끼니때마다 귀찮게 국건더기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 육수를 내고 쌀뜨물을 받아, 아무 때고 적당량을 넣어 끓이면 맛있는 시래기된장국을 겨우내 먹을 수 있다. 여기에 들깨국물을 넣으면 영양만점이다.

무청시래기는 짚으로 한 줌씩 엮어 헛간이나 처마 밑 응달에 그대로 주렁주렁 매달아 말리면 된다. 길게 가로놓은 대나무나 빨랫줄에 척척 걸쳐놓으면 그만이다. 바짝 마른 시래기는 먹기 직전 소다를 조금 넣고 삶으면 된다. 잘게 잘라 배추시래기처럼 된장국을 끓이든지, 긴 시래기 그대로 양념을 해서 냄비아래 깔고 고등어나 꽁치, 등 생선을 넣어 조리면 시래기생선찜이 되고, 매콤하게 양념한 돼지갈비나 등갈비를 넣으면 돼지갈비찜이 되어 그대로 밥도둑이 된다. 무청을 삶아 껍질을 벗겨 말린 시래기는 부드러워, 정월 대보름날 시래기밥이나 시래기나물로 이용한다. 이외에도 시래기의 변신은 많다. 옛날에는 없는 살림에 꼭 필요한 먹을거리였다. 어쩌다 먹는 시래기 밥은 그나마 있는 집 별식으로 대접을 받았지만, 가난을 달고 사는 집에서는 저녁밥은 시래기죽이 단골 메뉴였다.

어릴 적 시골에서는 너나없이 김장 못지않게 시래기 갈무리를 했다. 엄마의 살림을 보고 자란 탓인지, 나는 시래기를 보면 버리지 못한다. 해마다 교회 김장을 하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내 할 일에 따로 매달린다. 내 할 일은 김장이 아니라, 버리는 쓰레기에서 시래기를 구하는 일이다. 배추이파리는 가려 간국에 담가놓고, 무청시래기는 모아 처마 끝 응달에 걸쳐놓는다. 지저분하고 보기 흉하다는 눈총을 받기도 하지만, 한겨울 된장국으로 변신해 밥상에 올리면 고깃국보다 맛있다며 누구나 한 그릇씩 꿀꺽한다. 이렇게 나에게 짝사랑을 받던 시래기가, 언제부터인가 건강음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고 있다. 충청도에서 대접받는 꺼먹지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옛 맛을 되살려 인정받고 있다.

무청시래기는 말리는 과정에서 많은 영양소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겨울철 우리 몸에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 미네랄, 식이섬유 등이 많이 들어있어 웰빙 음식으로 손꼽히고 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너무 흔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시래기가, 문명이 발달하고 각종 먹을거리 천국인 오늘날 오히려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로 지켜온 먹을거리가 최고의 음식이 된 것이다. 칼슘이 많아 골다공증 환자나, 성장기 어린이들에게 효과가 크다고 한다. 무기질과 섬유질이 많아 변비에 좋으며, 철분이 있어 빈혈치료에 도움이 되고, 혈관을 튼튼히 하며, 혈액이 맑아지고, 고혈압 등, 성인병예방에도 아주 좋은 음식이라니, 괜히 쓸모없는 내가 대접을 받는 기분이다.

조강지처(糟糠之妻)가 생각난다. 술지게미[糟]와 쌀겨[糠]로 끼니를 이을 때의 아내라는 뜻이다. 몹시 가난하여 고생할 때, 술지게미나 겨와 같은 조악(粗惡)한 음식을 먹으며, 함께 고생하면서 집안을 일으킨 아내를 이르는 말이다. 조악한 음식에는 시래기도 포함된 거친 음식이다. 그러나 이제는, 거친 음식이 도리어 건강음식이라니,

다음 주말에는 무청시래기를 걷어 삶아야겠다.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모아, 소화가 잘되며 속이 편하고, 구수한 고향의 맛까지 느낄 수 있는, 들기름 향 가득한 ‘시래기 밥’을 지어, 옛이야기하며 양념장에 비벼먹어야겠다. 이것이 바로 전라도 향토음식 ‘시래기비빔밥’이다. 충청도에서는 ‘꺼먹지 비빔밥’이라 부르겠지?

(2016.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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