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왕궁 터

2016.02.04 17:57

정남숙 조회 수:189

견훤왕궁 터

-후백제 흔적 찾기 (1)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정남숙

‘후백제 연구회’ 일반(一般)회원으로 가입을 했다. 후백제의 도읍지 전주엔 ‘천년고도(千年古都) 전주(全州)’란 타이틀이 붙어있다. ‘완산주(完山州)에 이르니 주민들이 환영했다.’는 기록이 있다. 후백제 견훤(甄萱)이 서기 892년 무진주(茂珍州: 현, 광주)에 나라를 세우고, 900년에 전주(全州)로 옮겨 도읍을 정했다. 전주로 도읍을 옮겨 후백제가 공식적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서기 900년부터 전주는 왕도(王都)로서의 기능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확실하지는 않다.

“견훤왕궁 터[址] 보러 가요!”

후백제 왕도(王都)가 전주라면, 왕궁(王宮)은 어디쯤 있었을까? 내 궁금증을 풀어준다며 출퇴근을 같이하는 선생님 한 분이 같이 가보자고 했다. 왕궁 터가 있다는 말에 흥분하여 약속을 하고 답사준비를 했다. 동고산성에 오르는 날, 등산복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스틱까지 갖추고 설레는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그러나 내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산에 오르기는 무리였다. 동행자의 양해를 구하며 천천히 승암산을 올랐다. 몇 걸음 떼고 쉬기를 반복하다 드디어 네 발로 기어올랐다. 백두대간을 수없이 오른 선생은 나의 거북이걸음에도 짜증내지 않고 천천히 몇 걸음 앞서가며 주위 배경 설명을 계속해 주었다.

승암산(僧岩山)을 오르려니 힘은 들었지만, 시내 쪽에서 바라만 보던 천주교 치명자성지를 직접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하여 산 밑에서부터 꽃길이 준비되어 있었다. 손님맞이에 분주한 아름다운 꽃들은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고 있어, 가파른 길도 훨씬 수월하게 오를 수 있었다.

정조15년 신해(辛亥)사옥 때 진산의변이라 하여 참수를 당한, 천주교 신자 권상연과 윤지충을 만났다.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의 외사촌으로 폐제분주(廢祭焚主)의 죄명이었다. 동정(童貞)부부 이순이 수녀부부의 순교(殉敎)사를 들었지만 전주의 주산(主山) 승암산을 치명자산(致命者山)이라 표기(標記)한 이정표가 마음에 걸렸다.

가다 쉬다 반복하며 산등성이를 돌고 돌아 마침내 ‘동고산성 견훤왕궁 터’라는 팻말이 붙어있는 궁성 터를 볼 수 있었다. 숨을 돌리고 주위를 돌아보니, 재빠르게 달음질하던 다람쥐가 두 손을 모으고 뒷발로 서서 우리를 맞았다. 나무에서는 한 여름살이를 위해 수없는 변화의 과정을 견뎌온 매미들이, 역사를 찾아 목마른 우리를 이해한 듯, 목청껏 부르는 노래로 입성(入城)을 환영하고 있었다. ‘아! 여기가 궁궐이었구나!’ 넓은 왕궁 터를 바라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왕궁 터를 볼 수 있다는 설렘으로 무리인 줄 알면서도 올라온 보람을 안고 주위를 살펴보니, 천여 년 전의 후백제가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듯했다.

견훤(甄萱)은 신라(新羅)의 서남해안지역 장수(將帥)였다. 서기 892년 반기를 들고 900년 전주에 입성(入城)하여, 고려에 멸망한 936년까지 37년간, 후백제의 왕도로서 기능했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어떻게 이곳이 왕궁 터일까? 내 맘을 읽은 동행은 역시 동고산성은 전쟁을 위한 피난시설일 것이라고 했다. 학계뿐 아니라 일반 역사학자들도 그렇게 주장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렇다면 진짜 임금이 거처하던 왕궁은 어디에 있었을까? 궁궐(宮闕)은 왕(王)이 있는 궁성(宮城)과 내성(內城)이 있고, 밖으로 외성(外城)이 있어야 한다. 분명 어딘가 다른 곳에 왕궁 터는 따로 있을 것 같았다.

왕궁 터를 찾아가는 일행에 합류했다. 다양한 전문가와 연구진들로 구성하여 현장으로 떠나는 회원들을 따라 나선 것이다. 다시 동고산성에 올라 궁성이 아니라, 군사 주둔지임을 전문가를 통해 확인하고, 인봉리 옛 공설운동장 자리를 찾았다. 운동장 이전 쓰임이 연못이었다니 제일 심증(心證)이 가는 곳이다. 파가저택(破家瀦宅)이라 하여, 역적(逆賊)의 집안은 집터를 헐고 연못을 만들었던 과거 역사를 돌아볼 때, 이 연못은 후백제 왕궁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러나 기록이나 흔적을 찾지 못했으며, 기무사 옆 조금 남아있는 제방(堤防)이 궁성일부가 아닐까 싶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설(說)만 무성할 뿐이다.

전주고등학교 뒤 아파트단지로 탈바꿈하고 있는 물왕멀 건설현장을 답사했다. 옛 기와 몇 장이 나왔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더 이상의 유물(遺物)은 나오지 않았다. 물왕멀에는 내가 어렸을 때 듣고 자란 견훤(甄萱)의 설화(說話)가 있다. 밤마다 찾아오는 젊은이를 맞은 규수(閨秀)는, 마침내 아비에게 실토를 한다. 아비는 딸에게 오늘밤에도 찾아오면 그의 옷에, 바늘에 명주실을 꿰어 꽂아놓아라 했다. 규수는 아비의 가르침대로 바늘을 꽂아놓고, 아침에 그 명주실을 따라가 보니 물왕멀 가에, 등에 바늘이 꼽힌 채 죽은 지렁이가 있었다. 그 규수가 낳은 아이가 지렁이의 아들 견훤(甄萱)이며, 그래서 지렁이 견(甄)자를 썼다는 얘기다. 연관이 있을 것 같아 기대를 했지만 무관하다는 결론(結論)만 남기고 말았다.

제일고등학교자리, 교육대학교 부지. 전라감영 터 등 예상하고 있는 곳은 아직도 많다. 그러나 천년동안 꽁꽁 숨어버려 찾지 못한 왕궁터는, 쉽게 찾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며 기대하며 따라다닌다. 견훤과 관계되며 후백제 역사를 찾아보는 다양한 탐사와 답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많은 시간과 인력을 들여도 쉽게 찾지 못하는 이유는 또 있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승자(勝者)의 기록이기에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高麗)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신라(新羅)의 김부식이 기록했기 때문에, 견훤이나 후백제의 역사나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또한 고려 왕건은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전주에 행정부서(行政部暑)를 두어 왕도를 다스리지 않고, 군사시설(軍事施設)인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하고 5년여 동안 전주를 통솔케 하여, 후백제 도읍(都邑)의 역사를 송두리째 지워버리고 말았다. 고려 왕건 중심의 편향적 역사서술로 견훤과 후백제는 역사 속에서 제자리를 잡지 못한 것이다.

신라 경애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경순왕은, 비록 자신을 왕위에 올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新羅)를 고려의 왕건(王建)에게 귀부(歸附)시켰다. 경순왕은 자신이 당했던 굴욕적인 의식 때문에 견훤에게 엄청난 반감(反感)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기록이 왜곡(歪曲)되었는지 진짜로 견훤이 그렇게 포악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견훤은 포악한 군주라 기록되었다. 또한 기록은 아들들과의 불화로 인해 후백제의 멸망을 자초한 못난이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견훤은 백제부흥을 선언할 때 역사적 근거로 고조선(古朝鮮)-마한(馬韓)-백제(百濟)를 계승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의자왕의 원통함을 풀겠다며 후삼국 통일의 의지를 천명했었다.

“나의 기약하는 바는 활[弓]을 평양(平壤)누정에 걸고 나의 말에게 패강[대동강(大同江)]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정치적 의지를 보여주기도 한 용기(勇氣)있고 정의(正義)로운 왕이었다.

동고산성 바로 밑에 성황사 옛터가 있다. 고려시대 성황사는 그 지방의 영웅적인 인물을 신격화(神格化)하여 배향(配享)하는 게 관례(慣例)였다 한다. 그러나 이 성황사에는 신라 마지막 왕인 김 부대왕(경순왕) 일가 5명을 조각한 목각신상(木刻神像)이 봉안되어 있다. 김 부대왕을 봉안한 곳은 전주(全州)만이 아니지만, 왕위 계승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와 그의 일가(一家)를 신상으로 봉안한 것은 전주가 유일(唯一)하다 한다. 경순왕은 고려(高麗)에 나라를 바치고 그 뒤 견훤에게 의탁하여 전주에서 말년을 보냈다는 설(說)도 있다.

천년고도 전주의 뿌리와 정체성을 정립하기위한, 견훤의 재조명과 후백제의 흔적을 찾는 게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역사적 사명(使命)이 아닐까?

(2016. 2. 4.)

.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38
어제:
519
전체:
224,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