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의 천재 시인 윤동주

2016.02.25 13:04

최상섭 조회 수:198

불운의 천재 시인 윤동주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 최 상 섭

요즈음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백석의 ‘사슴’ 그리고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시집이 젊은 층으로부터 크게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시를 공부하고 평생의 업처럼 짊어지고 한 줄의 시다운 시를 쓰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쏟고 있는 내게는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다. 요즈음은 스마트 폰 시대로 인터넷에서 시인의 이름이나 시 제목만 클릭하면 시가 뜨는 세상이다. 몇 백부 팔리기도 힘든 시집이 복고풍으로 제작되어 몇 만 부씩 팔린다는 현상은 기이한 일이다.

시는 인간의 가장 큰 고뇌의 산물이며 아름다운 마음의 결정체가 빚어낸 향수이어야 한다는 결론은 나의 가장 확실한 의지이며 지론이다. 따라서 늘 그러한 시를 쓰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독자의 가슴에 앙금이 남는 시를 한 편만 쓸 수 있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시점이기에 나에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우리나라 초창기의 시인으로 서정시를 써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들의 시집이 복고풍으로 유행한다는 것은 크게 환영하고 기뻐할 일이다.

이 분들의 시가 대학입시이나 수능시험에 한 번씩은 꼭 출제되어 지금도 우리의 기억 속에 가물가물했던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처럼 뇌리를 스친다. 이번 기회에 이 세 분의 생애와 시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로 천재 시인 윤동주의 시 세계를 조명해 보고 싶다.

이미 윤동주의 생애를 그린 <동주>가 영화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반갑고 하루 빨리 감상해 보고 싶다. 그리고 연극으로 공연한 <윤동주 달을 쏘다>도 큰 성원을 받았다니 죽어서 빛나는 시인 윤동주의 생애가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표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렇게 서시(序詩)를 썼던 윤동주는 일본이 일으켰던 대동아전쟁이 막바지를 치닫고 있던 1945년 2월 16일 일본의 후쿠오카감옥에서 뜻 모를 외마다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다. 해방을 불과 6개월 남겨둔 시점이었으니 더욱 분통이 터지는 일이다. 1943년 7월 불온사상과 독립운동혐의로 체포되어 비둘기와 강아지, 토끼, 노루를 사랑했던 젊은 시인이 일본군이 실험하는 생체실험의 주사를 맞고 투옥된 지 1년 8개월 만에 조용하고 사색적인 내면에 침윤(浸潤)된 병균에 의하여 29살의 뜨거운 피가 끓던 나이에 이국의 감옥에서 아까운 생을 마감한 것이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尹永錫. 명동학교 교사)과 독립 운동가이며 교육자로 잘 알려진 김약연(金躍淵)의 누이 김용(金龍) 사이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윤동주의 가정은 조선이주민들이 모여 살던 명동촌에서 다소 부유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마당에 자두나무와 그의 얼굴을 비추던 우물이 있고 대문밖에는 타작마당과 자두나무 과수원이 있었다고 한다.

1925년 명동 소학교에 입학하여 1931년에 졸업했고, 중국의 관립소학교를 거쳐 이듬해 용정으로 이사하여 용정은진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이 때 송몽규와 문익환도 이 학교에 입학했다. 1935년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편입했으나 1936년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반대로 폐교되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 4학년에 편입해서 수학했다. 미남 청년 윤동주가 그의 고종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서울의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것은 스물두 살 때인 1937년이었다. 동주는 문학공부를 원했지만 그의 부친은 의학을 공부하도록 해서 한동안 부자간의 갈등이 심했었다. 동주는 식음을 전폐하고 완강하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다. 조부 윤하현과 외삼촌 김약언이 나서서 동주의 부친을 설득했고, 마침내 동주는 문과로 진학이 허락되었다. 이 무렵 윤동주는 한국의 대표시인 정지용, 김영랑, 백석, 이상, 서정주의 시에 심취되었고 토스토에프스키, 앙드레 지드, 보들레르, 라이나 마리아 릴케, 프랑시스 잠 등의 외국 시인들의 시집도 탐독하고 있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졸업에 즈음하여 동주는 그가 썼던 19편의 시를 묶어 자필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3부를 만들었다. 한 권은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이양하 교수에게 드리고, 한 권은 그의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으며, 동주 자신이 한 권을 보관했다. 이 시집에는 슬픈 족속, 십자가, 또 다른 고향 등이 실려 있었는데 일본 유학을 앞두고 있어 이양하 교수는 출판을 보류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이양하 교수와 동주가 보관했던 시집은 사라져 찾을 길이 없었고, 정병욱에게 주었던 시집을 그의 모친이 명주 보자기로 싸서 장롱 속에 감추어두었던 덕에 해방 후인 1948년 1월 정음사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집이 나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당시 동주는 연희전문학교 2년 후배인 정병욱(鄭炳昱)과 남다른 친교를 맺고 있었다.

이 정음사 판 시집은 동주의 시 31편을 모아 정지용 시인이 서문을 쓰고 초판본이 발간되었다. 동주 사망 10주기에는 그의 동생 정일주가 중심이 되어 지인들(문익환 등)의 글과 가족들의 글이 함께 실린 재판이 발행되었다.

1942년 윤동주는 도쿄(東京)에 있는 릿교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1학기를 마치고 교토(京都)에 있는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편입했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용어들은 자유에 대한 자성, 그리고 끊임없는 삶의 방황과 반성 등이 내면에 깔려있다. 동지사대학 영문과생인 윤동주는 1943년 방학을 맞아 집으로 귀향하겠다는 전보를 치지만 동주는 고향에 가지 못하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윤동주와 송몽규가 쿄오토경찰서에 검거되어 수감된 것이다. 사상범으로 피체된 그들의 죄명은 일본 형사의 취조서에는 ‘독립운동’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 뒤 윤동주는 2년, 송몽규는 2년 6개월의 언도를 받고 후쿠오카(福岡)형무소에 수용되었다.

명동촌 집으로 윤동주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전보가 날아들었다. 그해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 부친 윤영석이 당숙 윤영춘과 함께 윤동주의 시신을 인수하러 후쿠오카 형무소로 떠났다. 윤동주의 죽음은 후쿠오카 형무소의 시약실(施藥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놓은 때문이었다. 그 당시 일제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세균실험용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윤영석이 후쿠오카 감옥에 갔을 때도 푸른 죄수복을 입은 조선인 청년 50여명이 강제 주사를 맞기 위해 줄 서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윤영석은 그 행렬 속에서 피골이 상접한 조카 송몽규를 발견했다. 『저 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그 모양으로….』 송몽규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흐느꼈다. 23일 뒤 송몽규도 죽었다. 일제의 잔학상을 여실히 나타내는 당시의 흔적들이다.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만행에 치가 떨릴 뿐이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유해는 용정의 동산교회 묘지에 묻혔다. 윤동주는 1968년 모교인 연세대학교 학보사 앞 교정에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졌다. 1985년 부터는 월간문학사에서 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나는 윤동주의 시를 접하면 그 시대에 어떻게 이런 멋진 서정시를 쓸 수 있었을까 감탄한다. 특히 서시(序詩)는 내 마음을 다스리는 청량제(淸涼劑)가 되었고, 자주 낭송하면서 시적 감흥에 젖기도 한다.

내가 1973년 연세대학교 학보사를 방문했을 때 보니 그 앞 정원에 오석으로 된 작은 시비가 서 있었다. 그 때 나는 그곳에서 그 시를 읽었다. 나는 시를 공부하면서 늘 윤동주 시인의 시와 같은 서정시를 쓰고 싶었다. 시를 공부하는 내게 가장 영향력을 끼친 시인이 윤동주 시인이다. 오늘도 윤동주의 서시를 눈을 감고 읊어보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서시(序詩)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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