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티고개

2016.03.31 04:30

윤근택 조회 수:314

담티고개

                                                                              윤  근  택

                                                    (수필가/문장치료사/수필평론가)

 

“돼지국밥에 쐬주 호당(戶當) 한 병씩 됐습니까?

퇴근 무렵이면 내가 사무실 동료들 몇몇한테 종종 하는 말이다. 우리는 7분여 걸어서 대구지하철 범어역으로 온다. 지하철을 타고 수성구청역, 만촌역 두 곳을 지나면 담티역이다. 3번 출구를 나서면 ‘24시 할매국밥’이 늘 여기에 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각자 호주머니를 뒤져 세종대왕 한 두장씩 꺼내 뽐내곤 한다.

 

주방의 아주머니들은 기량자들이고 업무분장도 잘 되어 있어서 고객맞이를 매끈하게 하는 편이다. 신속할뿐더러 고객의 취향도 척척 아는 듯하다. 언제나 나의 뚝배기엔 국물이 철철 넘친다. 순전히 국자 잡은 아주머니 맘이다. 여타 테이블보다 새우젓, 다진양념, 깍두기 등 의 양이 많다. 무엇보다도 청양초가 두어 개쯤 더 얹히기 마련이다. 집게 잡은 아주머니한테 평소 잘 보인 덕분이다. 주방의 아주머니들과는 달리, 일선(一線)의 아주머니는 이따금 새로운 얼굴이고 다소 서투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나무라지 않는다.


“아주머니, 이번에 신규임용 되셨나봐요?. 축하합니다. 두 잔쯤 남았는데요, 이 뚝배기에 뜨뜻한 국물 더 채워주심이 어떠하신지요? 실수로 고기 건더기 딸려 와도 괜찮다고 고참들한테 건의하세요.

그러면 빙그레 웃으며 주방에 다녀온다. 주방의 아주머니들이 나의 수작을 모를 리 없다. 나는 설령 배추김치가 좀 모자란다싶어도 재미없이 이야기하는 법이 없다.


“아주머니, 김치를 이번엔 어떤 분이 담그셨길래 이렇게 맛있어요?


우리의 화제는 그리 별난 게 없다. 이젠 더 이상 신화(神話)를 꿈꾸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지명(知命)의 고개를 넘어 이순(耳順)의 마루턱을 바라보는 나이고 명예퇴직을 했고 3년 고용보장으로 자회사(子會社)에 와서 삼분지일을 보냈다. 이젠 보수(報酬)나 승진 따위에 목을 맬 일도 없다. 주로 자녀들의 혼사나 이웃들의 애경사(哀慶事)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따름이다. 이젠 다가올 날을 차분히 준비하면 된다. 이 담티고개를 점잖게 넘어가면 된다. 옆 테이블의 학생들은 인근의 대륜학교 학생들일 테고, 그들은 야간자율학습과 자기네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테지. 군복을 입은 이들은 인근의 군부대에 근무하는 직업군인들일 테고, 그들은 야간보초와 자기네 상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테지. 작업모를 쓴 이들은 이 근방의 어느 작업장에서 작업을 막 끝낸 이들일 테고, 그들은 야간작업과 그들의 십장(什長)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테지. 그렇더라도 그들의 이야기에 너무 신경 쓸 일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에 열중하면 되니까.


그저 돼지국밥에 소주 한 병이면 족하다. 그런데도 이번엔 ‘호당 소주 한 병’ 약정을 어기고 말았다. ‘담티’의 해석 때문이다. 일행 가운데 양형은 이곳 ‘담티’가 ‘고모령’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점을 들어, 가파른 고갯길이었을 거라고 주장한다. 고갯길을 넘는 동안 ‘땀띠’가 나서 애초 ‘땀띠재’라 불렀을 거라고도 한다. 그럴싸한 해석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이 할매국밥집은 대구 쪽 재 아래에 있다. 우리는 경산 쪽으로 재를 넘기 전에 잠시 이곳에 들른 셈이다. 아니, 인생의 한 고개를 넘기 전에 잠시 주막에 들른 셈이다.

이래저래 허기가 막 드는 시점이다. 돼지국밥집이 대개 그렇듯, 이 댁은 과객(過客)이 문을 밀치고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차려주는 점이 좋다. 주방에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한주걱 밥을 말아 차려준 돼지국밥은 요기를 겸할 수 있어서 더욱 좋다. 말 그대로 24시간 영업을 하는 관계로, 언제든지 찾아들어도 된다. 더욱이, 우리들 말고도 손님들로 북적댄다. 이 점이 여타 돼지국밥집과 다르다. 그 많은 손님들을 맞으려면 가마솥에다 진종일 끓여야 할 테지. 자연, 육수(肉水)가 진하게 우러날 것이다. 이 댁 돼지국밥 맛은 이러한 선순환(善循環)의 과정에서 얻어지리라. 그러기에 뚝배기에 돼지 살점이 설령 들어있지 않아도 근기(根氣)가 있다. 실로, 돼지국밥은 오래도록 고아야 구수한 맛이 우러나는 법이다. 집집이 간판 앞에다 ‘원조 할매-’ 따위의 접두사를 경쟁적으로 써 붙이는 이유를 알겠다. 할머니여야 하고 은근한 불기운이어야 하고 가마솥이어야 한다. 한 생명의 살점이며 핏줄이며 힘줄이며 뼈다귀며 모두가 흐물흐물해져야 한다. 심지어, 할머니의 청춘과 애환도 함께 고여져야 온전한 돼지국밥이 된다.

 

어차피 모든 요리의 마무리는 자신들의 몫이다. 삶 자체가 그렇듯이. 나는 맛을 돋우려고 다진양념을 한 숟갈 넣는다. 소금 대신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는 걸 잊지 않는다. 돼지와 새우는 상생(相生)이 아닌 상극(相剋)의 관계라고 했다. 선조들은 급체(急滯)를 예방하는 요령까지 이렇듯 일러주었다. ‘상극’이라고는 했지만, 그것이 ‘타협’과 ‘절충’의 원리임을 알겠다. 부추를 몇 젓가락 넣으면 더욱 좋다. 뚝배기에다 내 젊은날의 격정과 애태움도 함께 섞어 넣으면 더더욱 맛난다. 그래도 아쉬울 성싶으면 마늘과 청양고추를 된장에 찍어 베물면 된다. 그러면 머릿밑이 따끔거리고 이마엔 땀방울이 맺힌다. 그래야만 제대로 음식을 먹는 듯하다. 속을 달래가며 권커니잣커니 마시는 소주의 맛이야 더할 나위없이 좋다..

 

하필이면 우리는 지하철 담티역에 내려 이 돼지국밥집으로 온다. 퇴근길 길목에 있다. 여기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가면 정확히 10분 후 대구의 끝자락 ‘사월역’에 닿는다. 거기서 경산 쪽으로 시내버스를 환승하면 된다. 이곳에서 시내버스를 환승해도 곧장 집으로 갈 수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늘 그랬듯이, 여기서 너무 머무를 수가 없다. 하여간, 우린 담티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이 국밥집은, 눈치는 주지 않되, 국밥 3,500, 소주 3,000원에 알맞은 ‘좌석보전’만 눈감아준다. 또한, 시내버스와 지하철은 ‘무료환승’을 60분만 허락한다. 게다가 안온(安穩)한 보금자리에서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다. 어쨌든, 우린 이 담티고개를 시치미 뚝 떼고 넘어가야 한다.

 

 

l    이 글은 <에세이문학> 2011년 봄호에 실렸으며, 평론가 한 분이 월평을 그 다음 호에 적었더군요.

l    이 글은 인터넷(한국디지털도서관>윤근택 >작품/논문>발표작)에서 다시 옮겨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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