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2016.05.10 05:21

김효순 조회 수:280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신아문예대학 수요수필반 김효순



봄기운이 아직 당도하지 않았어도 성질 급한 매화는 핀다. 그리고 금세 진다. 매화꽃을 보내는 아쉬움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진달래가 배시시 수줍게 웃는다. 어디 다사로운 봄 햇살에 녹지 않고 버틸 꽃이 있던가. 나는 연분홍 진달래 꽃잎이 피어나는 것을 보면 녹아내리는 꽃잎이 먼저 보여서 가슴 한구석에서 까닭 모를 설움이 찰랑거린다.

아니다. 이유를 모르는 설움은 아니다. 아득한 옛날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봄, 소풍날의 추억 때문이다. 할머니 집에서 작은고모와 살던 나는 겨우내 이름과 숫자만 배우고 입학을 했다. 맏이였기 때문에 학교의 교육과정에 대해서는 정말 문외한이었다. 집에서도 소풍이라는 것을 가본 적이 없었던 나는 소풍날의 절정은 도시락 먹는 일이라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뿔뿔이 흩어지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망연자실해져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고 얼마쯤 지났을까. 저만치 나무 밑에서 손짓하는 연분홍 치맛자락이 내 눈에 들어왔다. 틀림없이 작은고모였다. 그날 작은고모가 가지고 온 도시락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억이 없다. 그러나 지금도 지천으로 피었던 진달래꽃과 작은고모의 치마가 연분홍 한 덩어리가 되어 눈에 아른거린다.

스무 살 남짓이었던 작은고모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아마, 작은 고모는 정작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위해서 도시락을 싸들고 소풍 길에 함께 나서는 여유를 누려보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 뒤 갑자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고 싶었을까? 작은고모는 서둘러 혼인을 했다. 얼마간의 논농사를 지으니 양식 걱정은 없을 거라는 중매쟁이의 말이 허사는 아니었으나, 신랑은 ‘삶은 놀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삶은 생활이었다. 그 삶의 무게를 온몸으로 짊어지는 일은 늘 작은고모 몫이었다. 시어머니 또한 다르지 않았으니 쉰 살도 안 된 나이에 며느리를 들인 시어머니는 ‘안방마님’이 되었다. 부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으니 그분에게 논밭은 얼마나 더 먼 곳이었겠는가.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태평성세를 누려서 그랬을 것이다. 그분은 맏며느리인 작은고모를 떠나보낸 뒤 구순을 넘기고도 한참을 더 살다가 가셨다.

작은고모는 넷이나 되는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늘 빚에 눌려 허리를 펴지 못한 채 살았다. 진즉, 그 연분홍 치마가 어울리지 않는 작은고모가 되어 버렸지만 대신 자식들은 번듯한 동량으로 키웠다. ‘결혼하면 사돈이 된다.’ 는 두 아들 말고도 한의사인 큰딸과 대한민국의 경찰이 된 작은 딸의 친정엄마가 되었다. 어느 새, 밍크칼라가 달린 모직 코트가 잘 어울리는 우아한 여인으로 돌아온 작은고모를 바라보는 내 가슴은 참으로 따뜻했었다.

사람마다 자기 나름대로 복주머니를 만들어 가지고 이 세상에 나온다는데, 작은고모는 어찌 그리 작은 것을 지니고 태어나셨을까. 작은고모를 만난 순간의 따스하던 내 가슴이 채 식기도 전이었다. 작은고모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날아왔다. 평생 자유인이었던 ‘작은고모의 남자’는 이미 끊어져버린 그 끈에 묶이고 싶어 애가 끊어지는 듯 보였다. 작은고모의 자식들은 혼자 남은 그분이 많이 안쓰러우리라. 그들은 그분을 모시고 맛있는 것을 찾아다니고, 해마다 해외여행을 다서기도 한다고 했다.

작은고모가 떠났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봄은 또 오고 간다. 진달래도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지고. 내 입에서는 자꾸 유행가 한 자락이 흥얼거려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2016.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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