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아버지

2021.01.02 12:14

김세명 조회 수: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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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아버지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김세명
















“개선장군님이 먼저 내리셔야지요?” 종군 기자의 말에 백마부대 사령관인 k 장군은 “개선장군의 모습을 담을 카메라맨이 먼저 내려야지!” 1973.2.23. 백마부대가 월남에서 철군하여 공군 수원비행장에서 환영 행사가 있었다. 사단 병력을 실은 육중한 C-130 비행기가 행사장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동생이 제일 먼저 내렸다. k 장군은 비행기 안에서 동생을 지목한 것은 백마사령부의 사진담당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비행기에서 내리는 동생을 보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셨다.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와 안도의 마음이었으리라. 완전 군장을 하고 카메라를 멘 동생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이듬해 동생은 결혼하고 일산 백마부대 인근에 집을 사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호사다마라던가? 아버지는 동생 집에 가셨다가 연탄가스 중독사고를 당하셨다. 병원치료를 받았으나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다가 1981년도 석탄일에 6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셨다. 나는 공무원이었고 동생들도 나름대로 직장생활을 해 한참 재미있게 사실 연세에 유명을 달리하셨으니 애통함을 어찌 필설로 다하랴! 고향 밭 윗머리에 아버지 산소를 모시고 유산인 집은 다섯째동생, 밭은 막내동생에게 주고 나는 고향을 떠나 살게 되었다. 그 뒤 다섯째동생은 민선군수를 세 번이나 하여 동네사람들은 명당에 묘를 써서 인물이 났다고 했다. 내 생각은 울 아버지의 음덕으로 군민들이 지지해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아버지는 평생을 낮은 자세로 사셨다. 많은 식솔을 책임지는 농사꾼으로 할 수 있는 건 일뿐이니 항상 지게를 몸에 달고 사셨다. 평생을 일만 하신 게 아버지의 삶이었다.



아버지는 1917년 산골에서 태어나시어 학교에 갈 나이에 지게를 지고 농사일을 하셨다. 농토가 적은 산골에서 어려운 가운데 16세에 어머니를 만나 우리 팔남매를 낳아 기르셨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6.25를 겪으셨으니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사변이 나자 머슴이 공비와 내통하여 밤에 산에서 내려왔다. 할아버지는 외양간 짚더미위에 숨었고 공비들은 마당에 모닥불을 놓고 할아버지를 내놓으라며 울 아버지를 폭행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루에서 크게 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울자 공비들은 외양간의 소에게 총을 쏘아 죽이고 고기를 가지고 새벽에 산으로 도망쳤다. 그 때 나는 죽을 고비를 넘겼고, 地主라는 이유로 수모를 당한 할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읍내로 이사했다. 이사하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읍내는 미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집이 불타버려 큰 시련을 겪으셨다. 아버지는 빈 집터에 다시 집을 짓고 밭에 보리를 심어 보릿고개를 넘기셨다.

울 아버지는 자연에 순응하고 생명도 자연이라고 여기셨다. 농사꾼이라는 이유로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힘든 농사일 말고 장사를 하라고 하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어머니는 나에게 아버지처럼 힘든 일 말고 공무원이 되라고 한 것은 아버지 들으라고 하신 푸념이셨다. 울 아버지는 일터에도 나를 꼭 데리고 다니셨다. 논과 밭 그리고 시장에 갈 때도 분신처럼 데리고 다닌 건 세상 물정과 장남에게 대를 이어 일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성장하여 보니 농사로는 장래가 없다고 느끼고 어머니 소원대로 공무원이 되었다. 아버지는 항상 양보만 하셨고 어머니가 푸념하시면 묵묵히 밭으로 나가 일을 하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산소의 벌초를 하시고 나와 동생들을 둘러보면서 육이오 때를 회상하며 ‘아는 사람이 무섭다. 세상은 아는 사람이 너를 좋게도 나쁘게도 평한다. 친구를 잘 사귀어야한다’고 말씀하셨으나 동생들은 귓전으로 듣고 가을하늘에 맴도는 고추잠자리에만 관심을 보이곤 했다.

누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분을 꼽으라면 나는 울 아버지라고 말하고 싶다. 권력 한 오라기도 돈도 명예도 없었지만 아버지는 모진 풍파를 몸으로 받으시고 자연과 순응하며 우리를 키우셨으니 은공은 말할 수 없다. 울 아버지는 열심히 일하시며 어려운 형편에도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는 걸 마다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세상을 올곧게 사셨고 나와 형제들을 강하게 키우셨다. 나와 형제들은 학교에 다니면서도 아버지의 일을 도와야 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의 기억이 최고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는 글을 읽는 법을 알지 못하셨다. 하지만 나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가르침을 주셨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보아야 하는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지에 대해 많이 알려 주셨다. 아버지는 자신이 부자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흙과 일뿐이인데 자연을 생각하는 마음은 항상 부자라고 생각하셨다.

고향의 밭 윗머리에 선영의 산소를 마련하셨고 그곳에 계신 건 생전에 일터의 정 때문이리라. 봄이 되면 그곳에서 일하시던 모습이 눈에 어린다. 울 아버지가 한 없이 그립다.



(2020.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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