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은 사랑으로 발효된 과정이다
-김희주 시집「살아가는 일도 사랑하는 일만큼이나」에 부쳐

                                                                 문인귀/시인


  김희주 시인이 시를 공부하기 시작한지 7년 만에 첫 시집을 상제한다. 오랜 세월 묵묵히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고 가꾸어 온 뜰에 꽃을 피우는 일이다. 기쁘다.

  한국에서는 전업 작가들과 전업 시인들이 있지만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  
  모국을 떠나온 시간이 길어지면서 모국어의 현대적 어휘감각의 뒤짐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한국적 정서충격의 원활한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늘 목말라 하고 있다. 또한 이질문화속의 생활과 환경은 심리적 불안과 긴장을 유발시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주변 환경의 특수성을 이용하면 더 좋은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특수성은 특수한 소재가 될 뿐 앞서 말한 어려움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수는 없다. 시는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묘(妙)에 의해 표현되는 대상과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시를 쓰는 이민자들은 이러한 열악한 여건 때문에 시 쓰는 일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시로써 최상의 경지를 바라보는 것 보다 시와 함께 함으로 확고해지는 자의식과 한국적 서정을 통해 가슴을 다독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를 마치 자존을 위한 행위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말은 아니다.

  김희주 시인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시와의 삶은 그러한 여건 속에서도 가정주부로써, 직장인으로써, 생활인으로써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마치 장마철에 갑자기 불어난 강물 같은 급물살이 아닌 조용히 고여 넘치는 샘물 같은 자세로 시 창작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김희주 시인의 시사적 해학이 재미있다.
  대개의 시사적(時事的) 작품은 현실의 모순에 대한 지적이다 보니 자칫 비꼬거나 비아냥거리는 것이 되기 쉽다. 그러나 김시인은 이 점을 청자(聽者)의 몫으로 남겨 사고(思考)의 무한적 이해와 깊이를 유도해 내고 있다.

온 몸에 맺혔던 씨앗들
다 털어내며
지평 위로 가물가물
흔들리며 구르는 삶
덜커덩덜커덩
천금 쏟아지는 꿈으로
가득 채운 버스는
퀴퀴한 매연으로
사막을 가로지르고 있다
            
                      -Tumble Weed- 중에서

  Tumble Weed는 회전초(回轉草)라고 불리는 식물인데 사막이나 광야에 서식하다가 가을이 되면 밑둥이 끊어져 바람에 굴러다니는 마치 커다란 볼(ball) 같은 덤불더미이다. 이 마른 회전초는 죽은 다음에 굴러다니는 순간으로 씨앗을 뿌리며 종자를 번식시키고 있으니 생명의 한시(限時)를 “죽었다”라는 것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회전초의 이러한 번식원리는 자연의 생존법칙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에 반(反)해 사막 가운데 세워진 갬블(gamble)의 도시 라스베가스로 굴러들어가고 있는 동전과 그 동전을 쏟아내겠다는 꿈으로 가득채운 허망이 굴러가고 있다.


    ‘맨 정신으로 두면/두려운 비밀, 쓴 소리들 터져 나올까/소주 몇 병 들이붓고/해롱해롱 벙어리 되거라/꿀에 꼭꼭 재웠다//얼마 후 항아리엔/시뻘건 핏물에도/이빨들이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석류주’ 중에서>

  맨 정신으로 두었다가는 들어서는 안 될 말들을 지껄일 일들을 항아리에 집어넣는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게 꿀을 재우고 그도 모자라 소주를 채워 밀봉한다. 그렇지만 그 것들은 이빨로 남아 동동 떠다니고 있으니 잔뜩 취한 나머지 무슨 횡포를 부릴까 자못 두려워지기도 한다.


신문을 펼친다
새까맣다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모두
벼룩 떼가 지나갔나보다
긁고 긁어
피딱지만 새까맣게 남았다  

                       -벼룩 중에서-

  신문에 펼쳐있는 깨알 같은 글씨들은 무엇일까? 존재 가치를 상실한 껍데기들, 마치 벼룩 떼에 뜯어 먹혀 만신창이가 된 사회의 잔상들, 이제 신문지를 넘기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이 되어있는 세상. 벼룩 떼는 잘못 되고 있는 정치, 경제, 교육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아니, 물고 뜯기는 너와 나 일지도 모른다.
  

자주 빛 벽돌 본당 벽을
갈래갈래 찢어진 몸으로
누덕누덕 기고 있다

혼자서는
설 수도 앉을 수도 없는
형벌의 유전인자

한 토막
벌떡이는 핏줄
수직으로 바르려다
주체 못하는 제 키
잡아매다 놓치는 그림자
후드득 미끌어 내린다

두런두런 들려오는
사순절의 주문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하늘이 예서 얼마나 먼가를
신부님도 아직은 모르시나 보다

             -담쟁이 넝쿨 전문-

  그 먼 하늘 길을 올라야하는 일이 우리게 있다. 오르겠다는 것이 일어서겠다는 욕망 때문에서만이 아니다. 닿아야할 지점에 대한 갈망과 소망이다.
  화자, 아니 우리는 갈래갈래 찢어진 고뇌로 기어오른다. 그래도 되지 않는다. 넝쿨처럼 담이 있다면 해결될 일일까?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그것을 내 탓으로 돌린다고 해서 되는 일일까. ‘설 수도 앉을 수도 없는/형벌의 유전자’ 때문인 것을. 그렇다면 이 일을 누가 해결해 줄 수 있을까,  내 의지 하나로 될 일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니.


하이얗게 터진 벚꽃/연분홍 진달래/노오란 개나리/온 몸 구석구석/찌릿찌릿 흐른다//주사 바늘이 꽂히면/혈관 따라 그 봄이/줄줄 따라 나올 줄 알았다//웬걸,/잊고 살았던/석남사의 가을 단풍이 붉게붉게 터져나오고 있다//Dr. 박은/어떻게 판독할까,/이 일을.

                                             -피검사- 중에서

  그런데 웬걸, 터져 나오는 것은 ‘석남사의 붉은 단풍잎’이었다고 한다. 품고 있는 그리움이란 건 그렇게도 진한 염색소이어서 의사로썬 어떻게 해낼 수 있는 병이 될 수 없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아픔, 그 고독은 여린 꽃잎들마다 그렇게 핏빛 통증으로 바꾸어대고 있는 자신의 세월 그 자체이다.  


그리움의 시학

그리움이 날아간다

설레임을
두 가방에 꼭꼭 채웠더니
사랑도 넘치면
벌금을 내야 한다고

                -여행가방 중에서-

  비행기를 타고 고국 방문길에 나선다. 정, 숙, 현, 순, 송 등등 한없는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이토록이나 포화된 그리움으로 어찌 살아왔는지.
  가방에 꼭꼭 채우고도 넘치는 그리움 때문에 가만히 앉아있기가 버겁다. 기준치를 넘는 사랑의 무게로 벌금을 내야한다며 시인은 엄살을 부린다. 사랑의 형상화가 제대로 이루어진 언술의 경지이다.


세월에 밀려/묻혀진 줄 알았던/이름들//발길 닿지 않는/깊고 먼 곳에/기다림으로 앉아 있었다//-중략-/돌 틈 사이에도 고개 들고 올라오는 고운 향기//가슴엔/이름표 하나//모데미풀, 기린초, 화살곰취, 박새, 깽깽이풀, 술패랭이, 산조팝타무, 절굿대, 제비동자꽃, 왜솜다리, 궁강애기나리, 풍로초,

                                                         -이름표 하나 중에서-

  묻혀지고 잊혀진 이름들을 불러본다. 부르는 쪽쪽 되살아나는 그리움. ‘깽깽이 풀’ ‘왜솜다리’ 라 불러줄 때 선 듯 나서는 대상들, 우리야 잊고 살았지만 그들은 늘 존재하고 있었다. 존재란 그 가치를 인정함으로 성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와 달이
    잠깐 동거하는 순간
    나는 당신 속에서
    더욱 붉어집니다.  

            -개기월식 중에서-

  월식을 본다. 해와 달이 합일하는 순간이다. 보통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이 해와 달이 합쳐 하나 되는 정도에 그치고 마는데 이 시 ‘개기월식’에서는 그렇지 않다. “나는 당신 속에서 더욱 붉어진다” 는 이 한마디의 시어는 관찰에 그치는 사물의 인정에 그치지 않고 시적 발견과 그에 따른 강력한 인식의 부여로써 사랑을 형상화하고 있다. 김희주 시인의 독특한 절대적인 사랑법이요 선언일 것이다.  


양로병원 현관 앞에/어머님이 뒹군다/어머님의 뇌가/이리저리 흩날리는 걸까//하이얀 돌배 꽃이 떨어지고/구슬 같은 방울배가/조롱조롱 달리던 나무발치에/어느새 낙엽으로 뒹구는 잎 새//곱디고운 핏빛 무늬는 어딜 가고/이리저리 얽힌 그물 같은 잎맥만/뇌 세포로 누워있다

                                                               -어머니의 가을에서

  양로병원에서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방문하고 나서는데 밟히고 닳아 그물 같이 얽힌 잎맥만 남은 낙엽 하나가 보인다.
  딸을 보고도 “아지메요, 어찌 알고 왔능교?” 하는 어머니의 뇌세포로 오버랩이 되는 낙엽, 숭숭 뚫린 구멍은 누가 한 짓일까.  


어디에서 불어올까?
한겨울 빨래 널고 방에 들어오신
어머니의 치마폭에는
늘 상큼한 바람이 있었다

눈앞에 들어오는
빅 베어 산꼭대기에
하얗게 펼쳐진
커다란 어머니의 치마폭
6남매가 매달리고 보채던
치맛자락 거기에 있었다

        -어머니의 하얀 치마 중에서


  멀리 하얀 눈에 덮여있는 빅 베어(Big Bear) 산이 보인다.
  한겨울에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시면 상큼한 바람, 어머니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밖에서만 사시던 우리들의 어머니, 그 치맛자락에 매달려 자란 우리들, 그 너른 치마폭이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자랄 수 있었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지금도 코끝을 적시는 어머니의 냄새가 가슴 깊이로 스며들고 있다.  


  사랑은 삶의 근원적 바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의 싹 틔움으로부터 삶의 긴 여로를 시작한다.  
  사랑은 늘 시작인 것임에 사랑의 완성은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고 그것을 이루었다는 예를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는 허물어지고 있는 노모에게서도 사랑의 끝맺음을 볼 수 없다. 그것은 노모의 기억상실에 의해 끝이 나는 듯싶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자식을 통해 다시 이어지는 행로가 되며 그것은 끝이 없는 지속적인 진행 그 자체로 남는다. 그러므로 사랑은 시작할 때 이미 이루어진 완성이 아닐까. 왜냐하면 사랑은 삶이라는 존재를 존재이게 얽는 역할을 담(擔)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사랑으로 발효된 과정인지도 모른다.

  김희주 시인은 사랑에 대한 이러한 인식으로 삶을 이어가는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아니, 그것은 아픔이 아닌, 인간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제시이며 그것에 대한 사랑역할에 대한 논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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