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時空)을 涉歷해 온 존재, 그 ‘길’에 대하여
-오연희 시집 ⌜호흡하는 것들은 모두 빛이다⌟에 부쳐-

                                                                                          문인귀(시인)

    나는 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고, 시를 어떻게 쓰는가를 숙지(熟知)한 다음, 어떤 시를 쓸 것인가를, 그리고 그 시와 더불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매달리는 사람을 시인이라 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이나 삶의 주변은 이 일을 그리 쉽게 이룰 수 있도록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를 않는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시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시의 주변을 맴돌기만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한번은 거쳐야할 길을 우회하여 건너뛰다가 잘못 수렁에 빠져 허적인다.

    나는 오연희 시인이 첫 시집을 내 놓으면서 자신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해와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응했다. 5년이라는 세월을 가까이서 그를 지켜봐온 사람으로서 시에 대한 그의 진지한 태도와 식지 않는 꾸준한 창작열은 자신을 시의 주변이나 맴도는 사람으로 남지 않게 했으며 시인의 본분을 향해 징검다리를 놓아 나가는 덕목을 지니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연희 시인은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산문에 익숙한 문필인이었고 수년 전부터 지금까지도 미주 중앙일보에 고정교육칼럼을 쓰고 있다.
    5년 전 시를 쓰겠다는 그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경상도 억양이 어찌 그리 센지 그가 써 내는 시 마다 그 특이하고 강한 액센트가 상형(象形)으로 우리들을 웃기곤 했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점이 어떤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그의 소박하고 순수한 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오연희 시인의 시를 살펴보면서 그 속에서 소곤거리는 헬 수 없는 이야기들 때문에 심연의 세계가 서서히 물너울을 이는 움직임을 보게 되며, 또한 그것들은 운동회 때나 볼 수 있는 마스게임 같은 정연(整然)으로 그가 추구하고 있는  ‘길’을 위한 행진을 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이것은 바로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암시와 제시인 것이며 ‘삶에의 적용’으로 이어지는 시의 종교적 성취인  것이다.  따라서 그가 그리고 있는 ‘길’은 시공(時空)을 섭력(涉歷)해 온 시인 자신의 존재적 이미지이며 그것은 함께 쉐어(share)하는 통로가 되어야함을 암시하고 있다.
  
   다음 몇 편의 시에서 나는 그의 ‘길’을 찾아 걸어봤다.

두 발 힘껏 뛰어도 닿지 못하는 하늘/삶의 골목마다 채이는 걸림돌/등을 떠미는 세월의 무게를 알 수 없었지/삐거덕거리는 관절의 불협화음/휘적대며 켜는 공허한 울림을/짐작도 할 수 없었지/            -깨금발- 중에서

   그렇다. 두 발로 뛰어도 닿지 못하는 목표를 향해 한쪽 발로 껑충껑충 뛰어 하늘에 닿기를 바라던 어린시절의 길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공허한 울림만 나는 것을 짐작 하지 못한 채 뛰기를 한 것은 과연 무모한 짓이었을까.

팔십 평생 아버지와 동행하던 자전거/검버섯 가득한/푹 쭈그러든 다리로/마당 한구석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   -아버지의 자전거- 중에서

   정말 지금도 아버지가 타시던 자전거가 비스듬히 놓여있는 마당에 서 있는 것은 아닐 게다. 그러나 시인은 언제나 아버지의 자전거를 만난다.  그 만남은 아버지의 다리를 대신해 주던 두 바퀴에 있지 않고 건빵봉지 두엇 매달고 달려오시던 아버지, 그 아버지를 만나는 길이며 그로 인해 들어나는 자신의 존재인 것이다.

풀어진 자유/그 사이로 언뜻언뜻/그리움 스미고/앉아도 서 있는 것 같고/먹어도 허기가 진다//눈길 닿는 곳마다/그가 채워야할 틈/마구마구 넓어진다//나는 없고 틈만 있다./   -틈- 중에서

   삶은 존재이다. 그 존재를 사랑에서 찾아내고 있다. 그가 떠나고 없는 일시적인 공백에서 자아의식의 자유는 천만의 말씀이다. 그럴수록 짙어지는 ‘관계’는 더욱 공허한 자유를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틈새가 되고 또한 그것은 새로운 ‘길’임을 깨닫게 된다.

   시인은 길을 찾고 있다. 길이 없는 곳에서는 길을 만들어내며 길을 인지해내고 있다. 그 길을 낯익은 주위에서 찾고 낯 설은 주변에서는 만들어내며 가고 있다. 그가 찾고 있는 길은 길이 없어 찾아다니는 방황의 이야기가 아니다. 길을 만들어가며 길을 이어내고 있는 철저한 삶의 모습인 것이다.
   시인은 찾고 있는 길이 허무 같으나 그것은 허무에 속하지 않음을 안다. 다음의 시 ‘나이테’에서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 길은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나이테를 불리고 있었다. 그것은 허망(虛妄)이 아니다. 나무의 굵기요 크기가 된 세월이며 또한 그것은 자신의 여정의 보람인 것이다.

열어 젖혀진 나무 속
단아하게 번져있는 겹겹의 물결
물살마다 긋고 간 바람소리 들린다
어설프게 내딛은 시작
둥근 세상 밖으로 가는 줄만 알았던
그 길
더듬어보니
존재 속으로 걸어간
세월이다
감당하기 버겁던 고통의 순간들
기어이 견뎌 낸 점들끼리 손에 손 잡고
현기증 일 때까지 돌고 돌아도
어차피 닿지 않는 생의 시작과 끝
차라리
세월 뭉근하게 익힌 속내
훤히 드러내는
저 나무

-나이테- 전문



   우리 주위엔 어떤 길들이 널려 있는가. 존재의 길인 것이다. 길의 의미는 존재의 의미가 아닌가. 있음으로 생기는 것이며 있기 위해 이어지는 것 아닌가.  그렇다. 길은 있어야 함으로 생기는 것이며 있기 위해 과거와 미래를 이어내는 존재인 것이요 한 역사의 완성이 되는 것이다. 또한 길은 누구에게나 제공되는 겸손의 존재이며 그 겸손은 곧 청자(聽者)의 기쁨이 되는 것임에 기쁜 마음으로 그의 ‘길’을 권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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