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없는 달팽이, 세계에 산다

2004.03.01 04:12

문인귀 조회 수:977 추천:43

집 없는 달팽이, 세계에 산다



문인귀/시인

- 자작시를 들어 이민이라는 현실 속에 살고있는 나, 그리고 우리들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합니다. 이 글이 해외에 나와있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되는 것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램으로 씁니다. -

1. 봉선화鳳仙花를 기억하고 있는 집 없는 달팽이

어떤 꽃이 고향을 상징하는 데 제일 걸맞은 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봉선화라고 말할 것입니다. 봉선화는 우리 나라 곳곳에 피어만 있는 꽃이 아닙니다. 봉선화는 누이들 손끝에 묻어 몇 달이고 발그레 웃는 모습으로 우리들 가슴, 가슴에 남는 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봉선화는 일제치하日帝治下의 민족의 수난을 빗댄 노래가 되어 한민족 누구나 즐겨 부르던 노래 '봉숭화'도 되었습니다. 봉선화의 원산지가 비록 인도라 해도 이러한 뜻으로 미루어 나는 "봉선화는 우리 한민족 꽃이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고: 봉숭아는 봉선화나 같은 말입니다.>

울밑에 선 봉숭아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 간에 여름 가고 가을 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제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김형준 시 / 홍난파 곡 '봉숭아' 전문>


'봉숭아'가 이처럼 민족적 애환哀歡을 노래한 것이라면 이 봉선화를 이국에서 보는 우리의 마음에는 무언가 달리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집 없는 달팽이 한 마리가 봉선화가 피어있는 우리 집 뒤뜰을 향해 기어가는 것을 보고 고국을 떠나와 살고있는 내 신세나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양력陽曆 7월 4일
우체통 옆에 성조기星條旗를 메어 달다가
집 없는 달팽이 한 마리를 만났다

미국생활 삼십 년만에 처음 보는
광주光州 계림동鷄林洞 집에서
밤이면 조심조심
이끼 투성이 우물 벽을 기어 나오던
집 없는 그 달팽이

어머니의 침이 아직 마르지 않은
아리던 새끼손가락처럼 반질반질 했고
둔하게도 생긴 더듬이를 앞 세워
사려 깊은 듯 한 고개 짓으로
앞길을 더듬어 댄다

조금 있으면
열대성 뙤약볕이
뿌리도 없이
습한 흔적만 남기는 것들은 모두
화형火刑으로 태워버릴 텐데
아는지 모르는지
어찌 그리 느림보 걸음인가,
답답하다

세 들어 사는 이 집은
개미가 많아 늘 성가신데
한사코 기어가는 곳이 집 쪽이라니,
삼호三湖에 사시는 누님 집에서 받아 온 봉선화
분홍 꽃잎 두어 개 떨어져 있기 때문일까

바람은 태평스레 성조기를 흔들고
내 목덜미에 달라붙은 햇살은
피에 굶주려
하얗게 퇴색된 거머리들,

따갑다.
따갑다.


<자작시 -집 없는 달팽이- 전문>


어느 날 아침, 집 없는 달팽이 한 마리가 우리 집 앞을 지나는 콘크리트 산책로를 건너노라 애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집 없는 달팽이 건, 집을 걸머지고 비지땀을 흘리며 기어다니는 달팽이 건, 이곳 화창한 날씨의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화단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달팽이를 만나면, 그것도 자신이 가꾸고있는 화단을 향해 기어가고 있는 달팽이라면 그것을 그냥 놔둘 리 없다는 건 뻔한 사실이지요. 그런데 나는 이날 이 집 없는 달팽이를 보며 "그렇구나, 우리들, 이민자의 신세와 진배없는 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어째서 집 없는 달팽이가 이민자移民者로? 아니, 이민살이를 하고있는 내 모습으로 보이더냐 구요?
내가 어려서 살던 집 가운데 유독 광주에 있는 계림동집이 생각나는 것은 철이 들기 시작하던 때에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이날 집 없는 달팽이를 보고 그 계림동집 마당에 있는 우물에서 밤만 되면 스믈스믈 기어 나오던 집 없는 달팽이들이 떠올랐고 그래서 그 우물물을 마시고 자란 내가 이곳에서 이민생활을 하노라 뒤축뒤축 거리며 나다니는 모양과 같아 보였던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집 없는 달팽이로 인해 연상되는 것이 또 있었습니다. 어렸을 땐 걸핏하면 생 손가락 앓이를 하던 기억입니다. 아니 그 손가락 앓이의 기억이라기 보다는 벌겋게 열이 오르고 퉁퉁 부어 구부정해진 손가락의 모양에서 또 다른 집 없는 달팽이를 보았던 기억입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내 아린 손가락을 당신의 입에 넣고 조심조심 빨아 열을 뽑아내시고는 침을 발라주셨습니다. 그러면 신통하게도 욱신거리던 아픔이 사라지곤 했지요. 그런 다음 희미한 등불에 비쳐진, 침이 아직 마르지 않은 채 반질반질한 손가락은 영락없는 집 없는 달팽이였습니다.
여기서 '집이 없다'라는 의미는 의식주衣食住에 속해있는 집住에 대한 단순개념보다는 '불안정하다'라는 말과 같아 마치 벌거벗은 몸처럼 무엇인가 부끄러운 것, 그것을 감추지 못한 채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 같은, 도무지 환경과는 엇장단을 치는. 도무지 현실화되어지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 바로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바꿔 말해 그 것은 이곳에서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내 속내가 바뀌어지지가 않더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7월4일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인데 나는 이 나라 시민이 되어 이 나라의 의무와 권리를 똑 같이 행사하며 산다해도 그날은 미국의 독립기념일 일뿐 내게는 우리 나라의 8.15 광복절과 같은 감흥이 도무지 일어나지가 않는다는 그런 뜻에서 말입니다.

옮겨 심은 나무가 새로운 토양土壤에서 한시라도 빨리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으면 금방 말라죽기 마련이지요. 더구나 건조하고 뜨거운 이곳 캘리포니아의 사막기후 속에서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일 것입니다.
집 없는 달팽이는 식물은 아닙니다만 아무 가린 게 없이 들어낸 민둥민둥한 몸에 강한 태양 볕이라도 와 닿는다면 금방 타버리고 말 것이기에 이글거리는 햇볕이 금방 울타리를 넘어 뜰에 들어설 것이 뻔한 시각인데도 걸음걸이가 어쩌면 그렇게나 느려 터졌는지, 가슴이 조마조마 해졌기 때문에 뿌리 박지 못하고 사는 식물의 입장으로 생각이 되어졌던 것입니다.
내가 걱정했던 것은 그일 뿐이 아닙니다. 우리 집 뒤뜰 쪽엔 개미가 아주 많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개미가 득실거리는 그 쪽으로 한사코 기어가고 있다니! 그런데 말입니다. 생각해보니 그도 그럴싸한 이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곳에는 한국 봉선화가 피어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몇 년 전에 영암 삼호면에 사시는 큰 누님집엘 갔었습니다. 때마침 누님집 앞뜰에는 어렸을 때의 우리 집 꽃밭 같이 이런 저런 꽃들이 잔뜩 피어있는 화단이 있었고 거기엔 봉선화도 피어 있어서 마침 잘 되었다싶어 씨를 받아다가 이곳에 뿌렸더니 제법 고향집 화단에 피었던 봉선화 그 모습 그대로 피었습니다. 그러니 우물에서 기어 나와 앞마당에 있는 꽃밭에 가서 살던 집 없는 달팽이가 고국의 봉선화를 보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봉선화 한 잎 먹어치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역만리에서 고향의 꽃을 만난다는 그 사실 때문에 집 없는 이 달팽이는 그렇게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되더라는 말입니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에도 집 없는 달팽이는 내 발 밑에서 꾸물거리기만 했고 햇볕은 어느새 내 목덜미를 따갑게 지져대고 있었습니다. 이 것이 바로 내가 처해있는 현실인 게지요. 그렇다고 미국이란 나라가 싫은데도 나는 억지로 살고있달지, 아니면 이곳에서 살만큼 살았으니 이젠 싫증이 난달지 하는 그런 뜻이 전혀 아닙니다.
8월이면 결혼 35주년이 되는 아내하고 함께 어려운 산맥들도 많이 넘었습니다. 예쁜 딸 하나와 썩 잘 생긴 아들 하나를 낳아 잘 키워 출가도 시켰고 이제는 모이면 셋씩이나 되는 손자녀석들하고 노는데도 몸살이 날 지경이지만 늘 기분만은 썩 좋은 할아버지가 되어있는 지금인데도 집 없는 달팽이를 보고는 "저 녀석은 참 위험하게도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안쓰러워지는 것은 우리들 가슴속에 무언가 남겨 둔, 갈증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이민의 삶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봅니다.


2. 우리는 한민족, 세계에 산다


우리가 사는 곳은 어디일까
우리가 자란 곳은 어디일까
해와 달, 별들이 하늘에 있고
산과 들 강물이 땅 위에 있어
어디에 산다해도 한결같은 꿈
우리가 사는 곳은 하나의 세계

색동옷 없이도 색동 마음은
우리의 웃음소리 같게 만들어
우리의 노래 소리 널리 퍼지네
손에 손 마주잡고 일구어 내는
세계는 아름다운 하나의 집
우리는 한민족 세계에 산다


<자작동시 -세계에 산다- 전문 / 참고: 이 동시는 동요작곡가 서지혜선생이 작곡해서 한국 KBS TV방송국 창작동요제 대상을 수상했음>

고향생각이다, 고국에 대한 정이다 하는 이야기를 하다보면 왠지 기분이 갈아 앉고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물론 좋은 감정 쪽에서 하는 말이지만 밝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지요. 자, 그렇다면 이제 보다 밝은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요?
1997년도의 일입니다. 이곳 LA에 사는 동요작곡가 서지혜 선생으로부터 동시를 하나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마침 구상하고 있던 동요가사가 있던 터라 어렵지 않게 '세계에 산다'를 써서 넘길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분단 상태인 지금, 남북한에서 함께 유일하게 불려지고 있는 노래는 '우리의 소원'이라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만약(실은 머지않아 그렇게 될 일이지요) 우리 나라가 통일이 된다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더 이상 부를 필요가 없어질 것이니 이를 대비해 통일 후에도 불려질 수 있는 노래 가사를 써야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하고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으로 쓰여진 이 동시에 다행히도 좋은 곡이 붙여져서 한국의 KBS TV 방송국이 주최한 창작동요제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그 바람에 한국에서 많이 불려지고 있다니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합니다.

이 '세계에 산다'는 우리가 사는 곳이 어디이든 우리 한민족은 하나의 가족으로써 마음을 합쳐 살아간다면 우리 한민족을 위하는 일뿐 아니라 세계와 인류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뜻을 담은 노래입니다.
세계는 지금 각종 미디어를 통해 안방에까지 드나드는 하나의 그로발 시대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급속도로 발달하고있는 통신망은 과거의 시時, 공간空間의 어제와 오늘의 개념에서 '지금'의 개념으로, 그리고 아득하기만 하던 그곳과 이곳이 바로 '여기'가 되는 개념으로 바뀌고 있으며 나라와 나라끼리의 철벽 개념에서 담이 허물어지고 없는 이웃 개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의 세계 속에서 우리 한민족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며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라 생각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조국에서만 살아야 한민족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기에 미주에 살거나, 유럽, 아프리카, 아세아 각 지역 그 어느 곳에서 살고 있다 해도 우리의 말, 우리의 문화, 우리의 미소는 우리를 한데 묶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세계는 단일화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한 민족으로써 남기를 바라는 주장은 바람직한 생각이 아닐 거라는 이의異意도 있겠지만 각기 자기만의 고유固有한 것이 그 고유한 독특한 빛을 발할 때 새로운 아름다움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면 그러한 의문은 풀릴 것입니다.
우선 한민족이 하나가 되어야 타민족과의 평형이 유지되어 하나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글은 한민족포럼에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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