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시인 소개 - 이성선

2003.03.20 06:31

문인귀 조회 수:815 추천:31

-내가 좋아하는 시인소개-

'향(向)宇宙의 통로'와 '속(屬)宇宙의 방법'을 제시한
시인 이성선

- 문인귀

내가 어떤 특정시인을 좋아한다는 말은 내가 좋아하는 '그 詩'를 쓴 '그 특정시인'을 좋아한다는 말이 되겠지요. 이러한 측면에서 과연 내가 좋아하는 시인은 어떤 분일까 하고 생각해보았더니 미당 서정주시인을 비롯해서 많은 시인의 면모와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모두가 훌륭한 분들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시를 애송하며 그들의 문학정신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미리부터 결정이라도 해둔 일인 것처럼 이성선시인을 먼저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어째서냐구요? 글쎄요, 이성선시인이 다른 시인들보다 월등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그의 시가 나에게 던져준 충격의 그 파장이 아직도 내게 충일(充溢)해 있기 때문이 아닐지, 확실치는 않으나 대략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이성선은 초기(1977년)에 낸 시집<하늘문을 두드리며>의 서시(序詩)에서 이미 자신의 詩作의 방향과 길을 세상에 명명백백하게 들어내 알렸습니다. 그리고 이 길의 완주를 위해 24년간 한 번도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달리다가 간 사람입니다(1941-2001). 이 점은 내가 말로써 설명하는 것보다는 이성선의 1977년의 서시와 그가 작고하기 몇 달 전인 2000년 3에 <시와 시학>에 기고한 글들을 비교해본다면 더욱 바르게 이해되리라 생각되어 여기 옮겨놓습니다.

서시序詩

최초 땅속에 허리 구부리고 살던 벌레는 어둠에서 나와 땅위를 기어갑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몸 구부렸다 폈다 하며 지구의 한 부분을 기어갑니다.
그러나, 그의 내부는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일념, 우주를 소유하려는 정신으로만 불타, 아무도 모르는 사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 집을 짓습니다. 작은 벌레집을 짓습니다. 집을 짓고 천형을 무늬를 두르고 깜깜한 독방에 홀로 들어앉아 웅크리고 가다듬고 꿈꿉니다. 해탈의 순간을 기다립니다. 불타오르며 허물을 벗으며 끝없이 하늘문을 두드립니다.
우주의 위대한 침묵이 그를 감쌉니다.
드디어 그는 자기를 파괴하고 자기 안의 나를 파괴하고 한 마리 나비로 완성되어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우주를 소유합니다.
- 1977년 시집<하늘문을 두드리며>에

하잘 것 없는 벌레 한 마리의 존재, 그러나 이 존재의 가치란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을 날겠다는 꿈에 있습니다.
벌레는 우선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일념, 우주를 소유하려는 정신으로 불탔고
벌레는 이 일을 완성키 위해 -아무도 모르는 사이, 아무도 모르는 속에 집을 짓고 독방에 홀로 들어앉아 웅크리고 가다듬고- 해탈의 순간을 기다리며 고독을 씹으며 허물을 벗으며 끝없이 하늘문을 두드려댔던 것입니다.
벌레는 -드디어 자기를 파괴하고 자기 안의 또 하나의 나를 파괴하고 한 마리 나비로 완성되어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우주를 소유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철저한 자아파괴를 통해 해탈을 이루어내는 오도(悟道)를 환기시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과정을 자신, 시인으로써의 존재의미로 잡아 나아갈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2000년 3월 <시와 시학>에 다음과 같은 글로 그의 시작생활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나를 열고 저쪽을 여는 시
그 동안 나는 짧은 시를 주로 써 왔고 근래 출판한 시집 {산시(山詩)}도 짧은 시들만 모아 하나로 묶었다. 시는 짧아야 울림이 크고, 여백이 많을수록 독자와 함께 하는 감동이 크다는 생각에서다. 독자를 유도하고 홀리며 끌고 가는 시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독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시와 함께 전율하는 그런 시를 말한다.
신라의 월명이 피리를 불며 길을 가면 하늘을 지나가던 달이 갑자기 멈추어 서고 세상 모든 사물들이 소리를 죽이고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월명의 시는 결코 길지 않았다. 긴 시는 감동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순간 같은 전율과 침묵을 주지는 못한다.
'흰 구름 속에 절이 있는데/중은 그 흰 구름을 쓸지 않는다/손님이 와서 비로소 문을 여니/온 골짝의 솔꽃이 다 늙었다'. 조선 중기 이달(李達)의 시다. 그 생명이 단 몇 년을 버텨내지 못하는 현대시에 비하면 이 시는 몇 세기를 뛰어넘고도 오히려 현대시보다 더 생생한 감동을 준다. 이 시도 짧다. 그렇다고 짧은 시만이 모두 명시라는 뜻은 아니다. 명시는 반드시 짧아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시는 삶의 핵심과 영혼의 정수를 하나로 꿰는 어떤 것,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순간에 함께 보는 황홀이다. 시는 바로 그 문이고 이 문은 작을수록 눈앞에 펼쳐지는 감동이 크다.
이달의 「산사(山寺)」란 시는 작지만 광활하다. 나는 이런 시를 쓰고 싶다. 풀잎이 읽어보고 몸을 떠는 시. 나무가 읽어보고 춤을 추는 시. 달이 지나가다가 보고 빙그레 웃음 짓는 시.
'작은 날개로/길을 다 지우고 가 버려서//그가 떠난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가지 위에 떨림 하나/그것도 잠깐만에 사라졌다//그의 삶/不立文子//황홀한 鳥道' 「鳥道」라는 나의 시다. 보이지 않는 새의 길처럼 나를 열고 다시 저쪽을 여는 시를 쓰고 싶다.
- 2000년 3월 <시와 시학>게재

과연 풀잎이 읽어보고 몸을 떠는 시, 나무가 읽어보고 춤을 추는 시, 달이 지나가다가 보고 빙그레 웃음 짓는 그런 시가 세상에 있을까요? 참 시인만은 알 것입니다. 그런 시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쨌든 이성선은 23년 전에 선언한대로 한결같은 시정신을 가지고 詩作生活을 해왔습니다. 그것이 佛道이던 어떤 다른 길이던 간에 생명의 '향(向) 宇宙의 통로'를 그리고 '속(屬) 宇宙의 방법'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이 정도면 그의 시는 사람에게도, 나무에게도, 풀에게도, 달에게도, 바람에게도, 구름에게도 충분히 읽히고도 남는 시가 된 셈이지요.

<주>여기에 나오는 두 낱말의 뜻을 적습니다. -도서출판 은광사간 <크라운 국어사전>에서 퍼왔습니 다. 참고하세요.
寸鐵殺人 : 촌철(작고 날카로운 쇠붙이나 무기)로 살인한다는 뜻으로 어떤 일의 급소를 찔러 사람
을 감동시킴의 비유.
不立文字 : 悟道(번뇌를 해탈하고 불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길)는 문자나 말로써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뜻.

다음은 이성선의 시 몇 편을 소개합니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詩들입니다.


달무리

하늘 땅 흔들며 바람이 불고 간 다음날
매일 바라보던 미류나무 위
까치집이 사라졌습니다.
어느 하늘로 누가 옮겨 가져갔나.
미류나무 만나면 쳐다보며 찾습니다.

까치집은 없고 달무리만 보입니다.
하늘에 옮기어다 새로 지은 듯
물기 아직 마르지 않은 채
깨진 알 껍질만 하나 감싸고 떠 있는
저녁의 달무리만 보입니다

(1985년 발표)


기도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삶은 기도이어라.

하늘에 자신을 비추어보고 다시 비추어보고
별에게 비추어보고 또 비추어보고

사람에게 비추어보고 사람에게 비추어보고

잎 다 떨어진 나무처럼 홀로 될 때
마지막 제 영혼에 비추어보는 기도이어라
(1987발표)


달을 먹은 소

저무는 들판에
소가
풀을 베어 먹는다.

풀잎 끝
초승달을 베어 먹는다.

물가에서 소는
놀란다.
그가 먹은 달이
물 속 그의 뿔에 걸려 있다.

어둠 속에
뿔로 달을 받치고
하늘을 헤엄치고 있는 제 모습 보고
더 놀란다.

(1991년 발표)


하늘의 백사(白蛇)

메밀꽃 하얗게
안개꽃 희미하게 흩어진
삼경의 하늘

갑자기 백사 한 마리
직진으로 복판을 가로질러서
긴 꼬리 거느리고

뒷산에 내리 꽂힌다
죽은 듯한 세상

그 후에 나는 그 산에 가지 못했다
백사가 내려와 사는 곳
하늘과 땅이 둘이 아님이 두려워

그 산에 가지 못했다

(2000년 발표)




고요하다

나뭇잎을 갉아먹던
벌레가

가지에 걸린 달도
잎으로 잘못 알고
물었다

세상이 고요하다

달 속의 벌레만 고개를 돌린다

(2000년 12월 발표)

세찬 바람이 불고 간 다음 날 미류나무 위에 있던 까치집이 사라지는 사건은 흔히 볼 수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사라진 그 까치집을 달이 떠있는 하늘에 옮겨놓을 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달무리
사람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남을 속이고 거짓말을 합니다. 우리 중에 거짓말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나 내 인간적인 의지를 죄다 벗어버린다면 사람에게나 자연에게나 떳떳이 내 보일 수 있는 거짓이 없는 아름다운 삶이 되겠지요. 신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자신을 비우는 행위란 가장 아름다운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기도
이러한 순수들은 이제 맑은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풀잎 끝 조그만 물방울에 담긴 초승달을 베어먹는 소, 그런데 자기가 먹은 달이 물 속에 있고 아, 그 물 속에 있는 하늘은 놀란 소, 자신까지 담아버립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달을 먹은 소
하늘로부터 뒷산에 내리 꽂힌 그 공포의 번개가, 아니 번개 보담 더 무서운 흰 뱀이 되어 뒷산에 산다는 그 일, 그 무섬을 어찌해야 합니까. 인간의 속내는 어쩌지 못하는 약함입니다. 하늘과 땅이 내통하고 있는 그 비밀을 알고서도 이 약골의 사람이 어찌 나의 것으로 버틸 수 있다 소리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백사
이제 이성선, 그가 말하던 동양의 정신 보석인 새벽 이슬처럼 받들고 싶은 일을 마무리짓는 그의 독특한 시 생활 여정을 마감함에 앞서 그는 "고요하다"라는 말로 매듭을 짓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그 넓은 우주의 한 구퉁이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다시 그 광활한 우주 속으로 옮겨가는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라는 소리를 남기며 나를 열고 저쪽을 여는 삶을 산 것입니다.
땅 속에서 나온 벌레는 나비가 되었고 나뭇잎을 갉아먹던 벌레는 가지에 걸린 달도 갉아먹을 줄 알았기에 그는 달 속으로 건너가 지금 고개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요하다.



단순한 삶은 크다

이성선

너무 원론적인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인은 아름다워야 한다. 모든 것이 산업화되고 새 시대에 정보화라는 이름으로 그 가치와 질서가 더욱 가닥을 잡기 어려울 때, 자연은 파괴되고 삶은 급변하여 어제의 가치가 오늘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할 때, 그래서 너도나도 세속적인 것에 의존하려 하고 분별력을 상실할 때, 거기다 많은 이론가들이 그걸 무슨 자랑거리이기나 하듯 앞다투어 문학의 죽음을 말하고 시의 죽음을 말하여 마침내 시의 존재마저 부정되고 있을 때, 이런 혼란의 도전 속에서도 시인은 다시 아름다워야 한다. 시인이 업수이 여겨지고 그 가치가 어느 때보다 하락할수록 시인은 현실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삶과는
조금 떨어진 넉넉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가꾸고 자신을 꽃피우며 살아가야 한다.
시인은 차라리 다른 길을 가야 한다. 모두가 승용차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이 땅에서도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거나 의젓이 걸어야 한다. 그것이 불편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짜증나며 모욕감이 느껴질지라도 시인은 아파트에 승용차로 거기서 다시 사무실로 그래서 박스에서 박스로만 이동하는 철저히 궤짝 속에 갇힌 인생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하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늘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시인은 세상에서 소외되어야 한다. 문명을 비판하고 환경보존을 외치는 사람들이 그런 모임에 참가하는 때조차도 승용차를 몰고 가고 그것이 당연시될 때, 말과 행동이 전연 다르게 살면서도 그것이 아무 거리낌없거나 어디서나 정상으로 통할 때, 그 사회는 바로 의식이 마비된 사회이고 그 속의 삶의 각각은 그런 가치 속에 자기도 모르게 오염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이중의 삶은 얼른 보면 매우 세련되고 활달한 것 같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삶으로부터 멀리 있어야 한다. 작지만 자기를 철저히 들여다보며 살아야 한다. 자기가 세상과 어떤 타협을 하고 있는지 자기가 자기와 어떤 묵계 속에 넘어가고 있는지를 잘 지켜보고 감시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가 시인이라 할 때 진정 아름다운 시인이라 할 때 그는 비구(比丘)여야 한다.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산야신(sanysin)이어야 한다. 비구는 출가한 자이고 혼자 걸어가는 자이다. 출가란 단순히 집을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가치로부터 떠나 자유로운 상태를 말한다. 머리를 깎고 하늘을 유유히 소요하는 보름달처럼 비구는 길 없는 길을 가야 한다. 구름을 만나면 구름 속을 걷고 천둥 비바람을 만나면 또 그것을 밟고 가야 한다. 구름 속을 가는 달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천둥을 밟는 달의 발은 얼마나 무한한가.
산야신이란 구도자를 뜻한다. 구도자는 밖의 걱정거리로부터 떠나 있어 자신이 자유롭고, 부나 명예에 유혹 받지 않으며, 성공에 우쭐대지도 실패에 좌절하지도 않는다. 영적인 상태에 사는 사람이다. 이런 자는 고독한 혼이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다. 전 지구의 광막함을 수용하고 사랑 속에 거하며 정의 안에 활보한다. 무엇보다도 마음의 사막에서 들려오는 깨친 자의 목소리를 향해 전신이 열려 있다. 내부 깊숙이 샘솟고 있는 생명의 물줄기를 열어 그것을 목마른 다른 생명의 그릇에 부어준다.
그런 비구가 바로 월명사일까. 그런 사람이 피리를 불면 하늘을 걷던 달도 지상을 흐르던 바람도 강물도 걸음을 멈추고 듣는다. 시인의 시가 사회에 널리 회자되지 않고 문단적 평가나 신문 같은 매체에 대서특필되는 일이 없으며 그래서 그의 존재가 밖으로 별로 알려지지 않더라도, 그가 진정한 시인일 때 그는 아름답다. 아름다울 때 그는 위대하다. 그리고 이 시대는 바로 그런 아름다움을 지키는 위대한 시인이 필요한 때다. 그런 시인이 시인으로 살아야 한다. 시인마저 권력을 얻으려 하고 붕당을 이끌며 명예를 위하여 무슨 짓이든 하려 할 때 이 세상은 누구에게 기댈 수 있겠는가.
시인은 작아야 한다. 세상과 조금 멀리 있어야 한다. 옷은 적을수록 하늘에 가깝다. 맑은 영혼으로 살 때 우주는 그의 그림 속에 시인을 넣어 작곡한다.
- 2000년 6월 <시와 시학>게재



이성선(李聖善)[1941-2001]


▣ 1941년 강원도 고성 출생
▣ 고려대 농학과 및 교육대학원(국어교육)졸업
▣ 1970년 『문화비평』과 『시문학』으로 등단
▣ 정지용문학상 수상
▣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 시와시학상 수상

▣ 시집;
『시인의 병풍』(1974.10)
『하늘문을 두드리며』(1977.11)
『몸은 지상에 묶여도』(1979.10)
『밧줄』(1982.12)
『나의 나무가 너의 나무에게』(1985.6)
『별이 비치는 지붕』(1987.2)
『별까지 가면 된다』(1988.2)
『새벽꽃 향기』(1989.12)
『절정의 노래』(1991.9)
『벌레시인』(1994.10)
『산시山詩』(1999.9)
『내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2000.10)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2 실상에 대하여 - 그림자.둘 문인귀 2003.07.02 216
21 허상에 대하여 -그림자.하나 문인귀 2003.07.02 203
20 거울을 보며 문인귀 2003.06.29 241
19 아직 떠도는 섬 문인귀 2003.06.25 215
18 뻐꾸기가 울었습니다 문인귀 2003.06.20 285
17 눈빛 있네 문인귀 2003.06.11 311
16 사막일지 * 하나 문인귀 2003.06.04 251
15 우리 엄마 문인귀 2003.05.10 251
14 욕쟁이 할머니 문인귀 2003.05.08 351
13 R 그렇고 말고요. 문인귀 2003.05.04 279
12 육순(六旬)의 노래 문인귀 2003.05.02 430
11 부재(不在) 문인귀 2003.04.17 212
10 길 . 둘 -이무기- 문인귀 2003.04.03 171
9 길 . 하나 문인귀 2003.04.02 175
8 진심이라는 것 문인귀 2003.03.31 235
7 방향감각 문인귀 2003.03.27 192
6 사랑 싫소(失笑) 문인귀 2003.03.26 266
» 좋아하는 시인 소개 - 이성선 문인귀 2003.03.20 815
4 촛불 문인귀 2003.03.20 272
3 봄 이슬 문인귀 2003.03.20 251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1
전체:
45,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