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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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지금, 우리는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가?

 

 

 
  우리들은 무엇인가 무한히 잃어가고 있다. 끊임없이 잃어가고 있는 반면에 또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자꾸 얻어들이고 있기도 하다.

 

 

  우선, 고향을 떠난 우리들은 고향을 잃어가고 있다. 봄이면 앞산 뒷산에 진달래가 활활 타는 불꽃을 지피고, 가을이면 황금들판 넘실대는 우리들의 정경을 잃어가고 있다.

 

 

  여름이면 방죽에 나가 발가벗고 멱 감던 친구, 목덜미에 땟국물이 시커멓게 흘러도 다정하기만 하고 밉지 않던 그 친구들을 하나 하나 잃어가고 있다. 담 밑에 호박 심고 봉숭아도 심어놓고 애동호박 늙은 호박 때맞춰 따먹고, 봉숭아 꽃잎 따서 손톱 발톱에 곱게 물들이던, 그런 마음결을 잃어가고, 버들피리 꺾어 불며 온 동네를 쏘다니던 그 좋은 때를 모두 잃어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3월 1일의 하늘을 진동시키던 만세소리, 천지를 뒤흔들던 8.15의 함성도 어느 샌가 모르게 자꾸 희미해져만 가고, 4.19 묘지에 누운 대학동창들의 꿈 이야기도 자꾸만 사위어져 가고 있다.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 정 . 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였다고 울먹이던 젊은이들이 '부정부패 독재정권 물러가라고 목 울음을 터뜨리며 서울시가를 붉은 피로 물들이던 그 4.19도 자꾸만 퇴색되어가고 있다.

 

 

  그토록 소중하게 느꼈던 강재구 소령의 죽음, 이승복 어린이의 외침도 이제는 아침 이슬처럼 사라져 가는 것만 같다.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 남편을 공경하는 마음도 퇴색되어가고, 아내도 남편도 원래의 자리를 자꾸만 잃어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사랑이 제일인데 사랑까지 잃어가고 있으니, 이제 더 잃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잊지 말아야 할 것까지를 깡그리 잃어가고 있는 우리는 분명 슬픈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들을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잃어버리는 아쉬움보다도 쌓을 곳이 없도록 자꾸만 얻어들이는 데 있다. 잃어 가는 힘보다 얻어들이는 힘이 몇 배 더 강하다. 부정을 거둬들이고 물질이라면 동기의 선악을 불문하고 끌어안으려 하고 인명 경시 풍조의 바람을 불게 하는가 하면 사치와 방탕과 태만을 쌓을 곳이 없도록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온갖 못된 것은 어찌 그리 속도가 빠른지 걷잡을 수 없이 우리들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살다보니 사람들이 굶어 죽어도, 무더기로 인명이 희생을 당해도 조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는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마저 잊어버려서인지, 도대체 그런데는 관심이 없어지는 약을 먹은 듯, 현대인들이야말로 불치의 병에 단단히 걸렸음이 분명하다.

 

 

  과학자는 과학자대로, 정치인은 정치인들대로 종교인이나 각계 각층 지도자들은 지도자들대로 가슴속에 켜켜로 쌓인, 잃는 병과 얻는 병은 유행병으로 번져 날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무서운 병이다. 잃어버리고 계속 얻어드리면서도 매사에 무감각해지는 우리 자신들은 참 삶의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과연, 지금 우리는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가?
 아무래도 각박한 현실을 잠시 접고 간단한 차림으로 고향엘 가 보아야겠다. 이제는 할아버지가 되었을 그 친구들, 그 때, 방죽에서 멱 감던 그 친구, 목덜미에 땟국물이 주르르 흘러도 정답기만 했던 그 친구를 만나러,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을 옛 동산에도 올라보고, 그 때, 가슴을  울렸던 4.19의 그 함성을 들으러, 내 조국 방문 길에 오르고 싶어진다.

 

 

  고향 길을 걸으면서 버들피리를 불 수가 있을지, 오히려 귀 아프게 들리는 소리에 귀만 멍해질지도 모를 테니까. 내각책임제가 좋으니 대통령중심제, 대통령책임제가 좋으니 하는 소리가 귀를 때릴 것만 같다. 이런 제도들이 나빠서 그렇게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제도를 탓하는 것조차 무엇을 잃는 행위임에랴! 역사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고, 내일을 향한 밝은 눈을 뜨지 않고 너나없이 색안경들만 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무엇을 잃고 무엇을 거둬들였는지. 과연 소중한 내 것들을 어디다 두었는지…, 내 주위를 살펴보아야겠다. 금년 여름밤에는 봉숭아꽃잎 찧어 백반에 섞어 손톱에 물들이며 밤을 새우면서라도 '지금 우리는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가'를 곰곰 생각을 기우려 보아야겠다.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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