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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산문 커피 한 잔

2016.12.11 14:59

최선호 조회 수:20

 

 

 커피 한 잔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일은 매우 손쉬운 일 같지만 말하듯이, 또는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따뜻하게 끓여서, 마시는 이의 기호에 맞게 농도를 조절하고 커피 잔에 부어 잔 밭침 위에 올려놓고 마음 편히 감상에 젖어 자기 생활의 한 자락이라도 반성해 보고, 살아 온 날이나 살아 갈 날에 대하여 깊이 사유해 보면서, 그 따끈한 한 잔의 커피에 목을 축여 보는 일이 아주 쉬운 일 같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그게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우선 이민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는 차분히 앉아 커피를 마실 만한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생각처럼 쉽게 마련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실상 커피 한 잔 여유 있게 마련하여 마실 만한 생활의 틈조차 없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 고달픔을 안은 채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다.

 

  커피 한 잔을 제대로 마시려면 잔과 잔 밭침은 물론, 앉아서 마실 만한 공간도 있어야 하고 탁자와 의자도, 적당히 꽂아 놓은 꽃도 있어야겠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막힘 없이 펼쳐진 밖을 끝없이 내다 볼 수 있는 창가에 앉을 수 있다거나, 저녁 노을이나 해질녘의 바다라도 감상할 수 있는 위치에서 한 잔의 찻잔을 기울일 수 있다면 그 또한 그 만큼의 행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커피 한 잔을 마실 만한 마음의 여유와 그런 공간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을 우리 일생에 몇 번이나 만나게 될까?

 

  그저 차 한잔 마신대야 목이 마를 때 물 마시듯 자판기에서 뽑아 꿀꺽꿀꺽 마시거나, 아니면 무엇에 쫓기는 사람 마냥 훌쩍 마시고 내가 언제 차를 마셨더라- 하는 망각 속에 묻혀 버리고 마는 경우가 우리의 일상에 얼마나 많은가?

 

  따뜻한 커피는 날씨가 더울 때보다는 약간 선선한 때가 제격이고, 닫혀 있는 실내보다는 탁 트인 창가가 더 어울리고, 산이나 바다나 해변에서 마시는 커피는 그야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정갈한 맛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흠뻑 적셔 주기도 한다. 게다가 연한 바람이라도 코끝을 스쳐 줄 양이면 금상첨화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커피는 혼자 마시는 것보다 두 사람이 마실 때가 좋다. 세 사람이나 네 사람이 마실 때보다도 두 사람이 다정히 앉았을 때 커피는 더욱 제 맛을 낸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마주 앉은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통하게 되고, 마시기 전보다 마시고 난 후에 느끼는 따뜻함은 아주 귀하게  남아 오래 오래 기억되어 지기도 한다. 푸근하다. 안도감마저 느낀다. 한 잔의 커피가 안겨주는 숨결이 이렇게 마음속을 파고든다.

 

  우리 생애에 닥치는 무수한 세월들이 한 잔의 커피만큼이라도 따스하고 여유 있고 정갈하게 다가와 준다면 훨씬 우리의 삶은 풍요로와 질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누가 한 잔의 커피라도 내 앞에 놓아주겠는가? 그 만한 시간과 공간이 마련되도록 여유를 짜 내려서 그 진액을 모아야 하리라.

 

  늘, 지친 대로 고달프게만 살아간다면 커피다운 커피 한 잔 제대로 마셔보지 못하는 우리 인생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커피 한 잔 속에 무슨 인생의 철학이나 종교의 이념이나 하는 깊고 넓은 뜻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하찮아 보이는 한 잔의 커피일지라도 우리 삶의 식탁에서 어느 위치에 놓이게 하느냐 하는 데에 삶의 지혜가 되는 줄 안다.

 

  머지 않은 날에 아내의 손을 잡고 바다와 석양이 어울려 보이는 커피숍으로 가  보고 싶다. 커피 맛이 제격인 11월이 가기 전에 이런 시간을 마련해 보도록, 찻잔 기울이듯 마음을 기울여 보아야겠다. (1996.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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