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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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2004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유적


                                   예현연

 


금간 항아리 사이로 그녀와 내가 교차한다
비어있는 것들을 배경으로 그녀는 흐릿하다
先史보다 아득하게 먼지 낀 세월이
두터운 유리벽으로 앞을 가로막는다
古代의 여인이 회갈색 머리로 누워있다
유폐된 황녀의 마지막은 고통뿐이었다
벌린 입 속 수천 년을 견딘 치아들이 온통 틀어졌다
푸른 비소 알갱이 갈 앉은 자기병이 그녀의 유품이다
벽옥 파편들은 멸망당한 족속의 文字처럼 어지럽다
지하 전시관에서 부식되는 황녀의 초상
흩어진 채색, 이제는 밑그림만 남았다
낯선 유적에서 마주치는 그녀와 나의 낡은 눈동자
저 자기병에 맺힌 유약은 수천 년 전부터 글썽여 온 울음이다
그녀도 엇갈리는 因緣 속에서 때론 그 실오라기를
애써 끊으며 살았을 것이다 붉게 힘준 잇바디
고리 끊어진 장신구는 한때 그녀의 저녁을 치장했다
가슴팍에서 사그락대던 벽옥 구슬들은
한순간 쉽게 끊어져 내렸다
멀리까지 굴러가는 구슬을 멍하니 보고 있는 그녀
그러모아도 쥐어지지 않는 것들을
놓아버린 순간이 遺蹟의 저녁이다 불이 꺼진다
폐관을 알리는 안내방송만이 어지럽고
출구를 가리키는 비상등은 꺼져버린다
어둠 속에서 모든 금간 유물들이 무너져 내린다


  폐관을 알리는 안내방송만이 어지럽고 출구를 알리는 비상등이 꺼져버릴 때까지 유적전시관에서 시인이 유적을 감상하고 있다. 시인 자신이 직관하고 있는 얽히고 설킨 사연들을 묘사하면서 유적에서 볼 수 있는 그녀와 시인 사이에 교차하는 詩情을 시간이라는 쟁반에 담아 읊어내고 있다.

  유적에 대한 글이긴 하지만 평소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 용어들이 詩語로 등장하고 있어, 독자들에게 친밀감을 더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비록 이 시를 감상하는 독자들의 앞에는 유적이 놓여있지 않을지라도 이 한편의 시를 통하여 시인이 감상하고 있는 유적을 추출해 볼 수 있을 만큼 묘사의 섬세함을 보이고 있다.

  先史보다 아득하게 먼지 낀 세월로부터 지금 막 유적전시관 출구를 가리키는 비상등이 꺼져버리기까지의 시간의 흐름이 역사의 쟁반에 놓여있고 그 위에 소중한 유적들을 올려놓았다. 금간 항아리, 회갈색 머리로 누워있는 古代 여인(황녀)의 벌린 입 속 수천 년을 견딘 치아들, 푸른 비소 알갱이 갈 앉은 자기병, 고리 끊어진 장신구, 가슴팍에서 사그락 대던 벽옥 구슬들 등에 얽힌 사연들을 유적과 유품 사이로 연결하면서 시인 자신과의 연관을 짓고 있다. 보기 드문 자상한 묘사로 시정을 읊어내고 무엇인가 지울 수 없는 아쉬움을 독자들에게 안겨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유적과 유적 사이에 놓여있는 정신적 유산이다. 

  끝 부분인 "폐관을 알리는 안내방송만이 어지럽고/출구를 가리키는 비상등은 꺼져버린다"의 두 행은 이 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놓아버린 순간이 遺蹟의 저녁이다 불이 꺼진다/어둠 속에서 모든 유물들이 무너져 내린다"로 끝맺음이 오히려 압축과 생략에 도움이 될 성싶다. (2004. 최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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