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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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3·1정신은 우리의 골고다·. 골방

 


「3·1절」보다 좋은 말은 「3·1운동」이요, 「3·1운동」보다 더욱 가슴을 뜨겁게 데우는 말은「3·1정신」이다. 이 정신이야말로 우리민족의 찬란한 정신적 봉화요, 우리 민족의 살 길을 손짓하는 유일한 청신호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1894년(甲午)부터 일본의 제국주의의 마수는 차차 우리 나라를 제 손아귀에 넣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1905년에는 욕된 보호조약을 맺고, 강제로 한일합병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부터 우리 겨레는 민족해방과 항일투쟁의 사상의 싹을 키워 결국 세계사에 빛나는 3·1 정신을 높이 들었다. 세월의 흐름을 따라 점점 퇴색되어지는 3·1절, 실패한 운동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적시고 있는 3·1운동. 그러나 실패한 것 같으나 실패가 아니다. 아직도 우리 민족의 가슴에는 그 뜨거운 3·1정신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비록 당시의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 1856-1924)이 부르짖은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되어 일어난 운동이기는 하나 3·1운동은 윌슨의 운동이 아니요, 우리민족의 사상과 전통을 이어 받음과 아울러 만인을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정신의 발로였기에 이 3·1정신이야말로 우리민족의 골고다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우리민족은 눈물의 민족이었다. 악마 같은 일제의 만행 속에 시달려야하는 고달픈 삶과 서양 낭만주의의 세기말적 증세인 감상주의(感傷主義)가 민족정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정서를 이끄는 문학이나 음악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따라서 우리의 삶도 말짱 눈물에 젖어 한(恨)풀이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더구나 설상가상 격으로 목숨마저 내놓고 투쟁한 3·1운동마저 빛을 보지 못하게 되자 암담한 나날만 계속될 뿐. 한 올의 희망도 찾을 길이 없었다. 이 때 우리의 기울어진 마음을 바로 세워 우리를 위로하고, 다시 우리를 일으켜 소망의 발자국을 띄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기독교사상이었다.
 
 기독교정신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때는 중국의 명(明)과 청(淸)의 교체기로 한국기독교사에 새 길을 열게 되었다. 1882년 조선과 미국과의 통상수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구미 각국과 국제관계가 근대적으로 조절되기 시작함에 따라 일본·중국 방면으로 향하던 미국선교사들이 새로운 선교개척지인 우리 나라에 많이 찾아오게 되면서 활발해졌다. 이후, 주로 미국의 장로교·감리교의 선교사들이 선교와 함께 우리 나라에 교육·의료사업 기타 서구적인 것들을 옮겨오기에 매우 바빴다.

 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이 희생을 당했다. 이것은 세상으로 좇아온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직 민족으로서 민족답게 살 수 있는 자주와 독립을 찾기 위함이었다. 또한 자유로운 신앙적 삶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면서 매를 맞고 죽임까지 당했던 것이다. 권력·명예·재물·기술은커녕 인권마저 빼앗긴 상태에서 신음만이 삶의 전부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헐벗고 굶주림에 빈손뿐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한없이 외롭고 고독했다. 꼼짝없이 골방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여기서 울부짖은 것이 3·1정신이요 우리 민족 통성 기도이다. 바로 여기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 우리민족의 골방인 것이다. 이 골방이야말로 세상과의 타협이 일체 없는 은밀한 곳이므로 은밀한 중에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헌데, 이토록 찬란한 역사와 빛나는 정신으로 참 삶의 골고다와 참 기도 처인 골방을 물려받은 우리는 이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교계·교단의 분열은 이제 그만하고, 사회도 한마음 한 뜻으로 뭉치고, 대한민국 국민의 매사 참여는 3·1정신의 총화로 이룩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바른 길이다.   (2003. 2. 27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