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질주
내가 이렇게 늦은 것은
바람 때문도 아니었네
억수로 내린 비 때문도 아니고
흰 눈이 내려 쌓여
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네
몸이 아파 누워 있었거나
집안의 어려움 때문이 아니고
늦게 일어나는 잠버릇 때문도
허기진 배를 채우느라
머뭇거리고 있었기 때문은 더욱 아니네
같이 걸어야 할 사람을 찾거나
누구를 기다렸기 때문도 아니네
업어주고 위로해 주는 분이 계시지만
그와 함께 잠시 머뭇거릴 틈도 없었네
시계바늘이 미쳐서
까마득한 과거로 뒷걸음질 친 때문도 아니네
달리기선수같이 간단한 차림의 나에겐
아주 좋은 시계가 팔목에서 정확하게
세월을 짚어주고 있었지만
내가 이렇게 늦은 것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게 사실이었네
여린 풀잎의 울음을 듣고 가다가
하늘과 산과 바다 위에 드리운 무지개에게 끌려갔었네
더러는 개구리 뱀에게도 끌리며
돌멩이를 들고 가다가
그것들의 대가리를 내려치기도 했었네
아른아른 아지랑이 흐르는 봄길 위에
흐드러지게 핀 꽃
분명히 그 꽃들 때문이었네
나도 모르게 끌려가서는
흥건한 향기에 취해 있었네
너무도 분명하게
내가 이렇게 늦은 것은
나의 봄, 그 봄 때문이었네
내가 봄을 데리고 다니기도 했고
봄도 나를 데리고 어쩔 줄을 몰라했네
그때, 목숨을 뿌리치려 했었네만
좀 더 정확한 것은
그 아름다움에 입맛을 잃고
내가 먼저 봄을 떠난 때문이었네
봄이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내가 봄을 떠났네
봄은 해마다 붉은 입술, 따슨 가슴으로 다가오지만
다시 만날 수 없는 자리까지
내가 아주 봄을 떠났네
늦긴 했네만
떳떳한 과거가 있으므로
나는 늦지 않았네
지금, 내 가슴에 낙엽이 지고 있을지라도
이 마을에 당도해 있는 나는
정녕 늦지 않았네
내가 만나고 싶은 바람을 만났고
목청껏 부르고 싶은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한 자락 햇볕이 비춰주고 있기 때문이네
그리고, 이 저녁 나는
캄캄한 밤을 향해 떠나네
황혼의 울음바다를 건너
12월의 자정, 내 골고다까지
늦지 않은 길로 서둘러 떠나네
나의 질주는 늦지 않았네
참회의 눈물을 밟으며
여기까지 와서 오히려 가벼운 여행을 떠나는
나는 결코 늦지 않았네
피 흘릴 순간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635 | 싯딤나무 | 최선호 | 2016.12.05 | 2 |
634 | 통곡의 벽에 기대어 | 최선호 | 2016.12.05 | 3 |
633 | 아나니아여 | 최선호 | 2016.12.05 | 3 |
632 | 다마스크스 가는 길에 | 최선호 | 2016.12.05 | 3 |
631 | 광야, 그 사막을 달리며 | 최선호 | 2016.12.05 | 3 |
630 | Papyrus 상점에서 | 최선호 | 2016.12.05 | 3 |
629 | Pyramid에서 | 최선호 | 2016.12.05 | 3 |
» | 나의 질주 | 최선호 | 2016.12.06 | 3 |
627 | 안수 | 최선호 | 2016.12.06 | 3 |
626 | 낙엽 | 최선호 | 2016.12.06 | 3 |
625 | 가을 강 | 최선호 | 2016.12.06 | 3 |
624 | 석상 | 최선호 | 2016.12.06 | 3 |
623 | 방황 | 최선호 | 2016.12.06 | 3 |
622 | 이 세상 끝에 서서 | 최선호 | 2016.12.06 | 3 |
621 | 무화과 | 최선호 | 2016.12.07 | 3 |
620 | 하늘 가을에 | 최선호 | 2016.12.07 | 3 |
619 | 무심코 펴 든 시집 속에서 | 최선호 | 2016.12.07 | 3 |
618 | 실수 | 최선호 | 2016.12.07 | 3 |
617 | 계시(幻) | 최선호 | 2016.12.07 | 3 |
616 | 이 세상 다 가고 | 최선호 | 2016.12.07 |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