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7.03 03:35

사랑의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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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 사람은 사랑이란 바이러스에 한 번도 감염된 경험이 없는 사람. 이런 사람은 언제라도 그 지독한 열병에 걸릴 위험을 안고 있다.



두 번째 사람은 그 열병에 대한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위험수위까지 도달했던 열병을 앓고 나서 가슴 안에 사랑의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가 형성된 경우이다. 사랑에 대한 면역성이 강한 이 사람은 다시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다. 그 혹은 그녀의 가슴엔 사랑에 대한 상처의 딱지가 굳어져 그 누가 흔들어도 요지부동인 사람이 된다.



세 번째 사람은 선천적으로 사랑의 바이러스를 보균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외부에서 침범해 오는 것보다 오히려 자기 내부에서 발병할 위험이 높다. 선천적 보균자는 아무리 지독한 열병을 앓아도 쉽사리 사랑에 대한 항체가 생기지 않는다. 끝없이 사랑의 아픔을 거듭하는 사람, 이런 타입의 사람을 눈 여겨 보아야한다.



말하자면 그녀는 세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날 때부터 사랑의 바이러스를 보균하고 있는 사람, 그녀의 가슴은 늘 일렁인다. 영원히 굳지 않는 서글픈 유동체이다. 한두 번 사랑의 경험이 그녀를 울부짖게 한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그 열병을 견디지 못하고 곧 죽고 말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났고, 사랑은 그렇게 지나가버렸다. 그때 그녀는 친구와 마주앉아 이렇게 말했다.  



“절대로 사랑 같은 건 다시 하지 않을 거야. 만약 내가 누군가를 또 사랑하게 된다면 그때는 네가 나를 죽여줘!”



친구는 비웃음을 날렸다. 그녀의 가슴은 영원히 아픔의 딱지가 앉지 않는 특수한 유동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친구는 그녀가 또 사랑에 빠질 거라는 알고 있었다.



얼마 후 친구의 예감처럼 그녀는 또 사랑에 빠졌다. 그녀 내부의 바이러스가 활동력을 증강하고 외부로부터의 침범도 대단했다. 그녀는 눈에 띄게 아름다워지고 옷차림도 화사해졌다. 사랑의 바이러스가 초기 활동을 시작할 때 모든 것은 아름다워 진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천상의 음악과 같으며 그녀는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픈 줄 몰랐고, 잠을 자지 않아도 힘이 솟았다.



한껏 아름다워진 그녀 앞에서 친구는 말했다.



“사랑은 아드레날린 주사와 같은 거야. 갑자기 힘이 솟게 만들지. 하지만 궁극적으론 에너지를 낭비하고 지치게 돼 있어. 마치 있는 힘을 다해 화를 내고나서 맥이 빠지는 거나 똑같아. 너는 또 위험해!”



그러나 그녀는 듣지 않았다. 또 다시 사랑을 하게 되면 자신을 죽여 달라고 친구에게 말했던 것도 잊은 채 감미로운 표정에 젖어들었다. 친구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정말 그녀를 죽여 버릴 수는 없었다. 사랑이 내리막길에 접할 때 그녀가 무사히 그 아픔을 견디기를 바랄 뿐이었다.



정해진 공식처럼 사랑의 바이러스는 감미로운 초기 활동에서 조금 강도를 높여 중기 활동을 개시했다. 그녀가 가슴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다 갖고 싶어. 그의 모든 것을……. 그러나 가질 수가 없어. 왜냐면 사람은 서로 소유하도록 정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야.”



친구는 알고 있었다. 사랑의 중기 단계는 끝없는 욕심이 된다는 것을……. 친구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사랑의 말기 단계를 기다릴밖에…….



드디어 사랑의 바이러스가 말기 활동에 접어들었을 때 그녀는 울부짖었다. 기어이 사랑이 파멸이 되고 만 것이다. 그녀의 가슴엔 구멍이 뚫리고 사랑은 욕심을 견딜 수 없어 갈가리 찢어졌다. 친구는 울다, 울다 무표정해져 버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가 사랑을 다시 시작할 때 정말 내가 죽여 버릴 걸 그랬나봐.”



그녀는 친구를 바라보며 쓰고 공허한 웃음을 날렸다. 친구는 알고 있었다. 결코 아픔의 딱지가 앉지 않는 대신 유동성이 강한 그녀의 가슴에 난 구멍이 곧 메워지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의 가슴이 다시 사랑의 바이러스에 일렁이리라는 것을…….



두 번의 사랑이 지나갔지만, 그녀는 여전히 바이러스의 발병 위험을 안은 보균자 일 뿐 아픔의 항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두 번째 사랑이 끝났을 때 그녀는 친구에게 다음에 자기가 또 사랑을 하거든 죽여 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또 사랑할 것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아무리 부탁해도 친구는 결코 자기를 죽이지 못할 것이므로…….



그녀가 만약 세 번째의 사랑에 빠졌다면 이번엔 그녀 자신이 그 바이러스의 속성을 염두에 두고 조심할 일이다. 그녀를 지켜보는 친구도 이제는 심드렁해져 더는 그녀를 위로할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친구가 사랑에 빠졌다. 그것도 난생 처음으로……. 친구는 바이러스 보균자도, 항체를 지닌 타입도 아닌, 말하자면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친구는 어쩔 수 없이 사랑의 바이러스가 감미롭게 활동하는 초기 단계를 거쳐, 소유의 괴로움이 팽창하는 중기 단계도 거쳤다. 그리고 마지막 말기 단계에서 사랑을 성공시키지 못한 친구는 정체불명의 약을 한 움큼 먹고 위세척을 당했다.



오랜 시간 동안 고무호스를 입에 우겨넣고 있던 친구는 정신이 들자 엉망이 된 입술로 힘없이 그녀에게 말했다.



“처음부터 우린 잘못 인식하고 있었어. 사랑이 단지 감염 바이러스라는 생각에서 너 같은 보균 타입을 늘 경계했거든. 아니야! 사랑은 할 수 있는 한 끝없이 경험해야 하는 것이야. 그것이 단지 바이러스가 아니라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것을 알 때까지……. 그래서 우리가 새로워질 수 있다면…….”



주르르 눈물을 흘리던 친구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는 다시는 사랑의 아픔을 당하지 않을 면역성도 얻지 못했고,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만들어 내지도 못했어. 다만 그것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을 알아냈을 뿐이야. 너는 할 수 있을 거야. 다시 아름다운 사랑을……. 소유하지 않고 성공할 필요도 없는 다만 사랑 그 자체를……. 그렇게 해서 네가 나날이 새로워질 수 있다면 그 아픔을 견뎌! 꼭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항체를 만들어 낼 필요는 없는 것이야. 네가 부러워! 부러워……. 사랑은 더 이상 바이러스가 아니야! 그것이 참된 것이라면…….”



위세척을 했지만 친구가 삼킨 독약은 이미 온몸으로 펴져갔다. 친구는 괴로운 표정을 짓다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녀는 얼굴에 시트가 덮이는 친구를 보며 눈물 속에 그 마지막 말을 중얼거렸다.



사랑은 더 이상 바이러스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 그녀는 바이러스의 속성을 지니지 않은 참된 사랑을 친구 몫까지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미주한국일보 2000년 6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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