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7.06 02:47

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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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가 무르익자 그녀는 옆에 앉은 기태의 어깨를 툭 쳤다.



어이! 사촌! 오늘 고마워. 이 자리 말야. 술값은 사촌이 계산하기로 했다며?



지천명을 앞두고도 조금은 수줍음을 나타내는 기태는 그저 씩 웃기만 할 뿐이다. 하긴 언제 그가 사촌지간이라도 콧대 높은 그녀와 쉬운 말 한 자락을 섞어 본 적이 있던가. 그녀는 기태가 자신의 초등학교 동기였다는 것조차 까마득히 잊고 있던 터였다. 고향 초등학교 시절, 이래저래 튀던 그녀에 비해 기태가 공부를 잘 했던 것도 아니고, 특별히 기억되는 외모를 지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용기 있게 싸움질을 잘하던 문제아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 기태에 비하면 그녀는 잘 재잘거리던 말솜씨에 공부도 잘 했고 얼굴도 예뻤다. 거기에다 고향 유지인 그녀의 아버지가 육성회장까지 했으니, 그 당시 고향 초등학교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흔한 말로 간첩이었다.



그때로부터 실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 어찌어찌 미국까지 흘러간 그녀가 서울에 다니러 왔다는 소문이 동창들 사이에 퍼지자, 알게 모르게 그녀를 보고 싶어 하던 남자 동창들이 먼저 서둘러 자리를 마련하였는데, 사촌인 기태가 무조건 술값은 자신이 계산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옛날엔 말 붙이기도 힘들던 여자 사촌 앞에 한 번쯤 광을 내보고 싶은 건 아닐까. 나름대로 출세를 한 그가 말이다. 기태는 탄탄한 직장에서 제법 높은 직급을 갖고 있었지만, 어린 시절 결코 눈에 띄지 않았던 사내아이처럼 조용하고 겸손하게 앉아 있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던가. 아직은 흐트러지지 않은 외모로 조금은 헐벗은 자신의 내부를 감싸고 있는 그녀는 내내 오만하다. 어릴 때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고향의 남자들은 그녀의 오만성에 열광하며 옛 추억에 젖어든다.




술잔을 들어 건배! 건배! 그 시절에 이 공주를 첫사랑 삼지 않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누군가 소리를 치자 자리는 술렁술렁 흔들리며 웃음이 넘쳐난다.



그래도 사촌 기태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을 뿐 크게 웃지도 않는다. 흘깃 그의 미소를 바라보던 그녀는 그와 자신에게 같이 흐르고 있는 핏줄을 더듬어 본다. 기태의 아버지와 그녀의 아버지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작은 아들인 기태의 아버지는 농꾼이 되고 그녀의 아버지는 정치일선에 섰다. 두 형제 사이에서 태어난 여러 자손들 중에 기태와 그녀는 또래의 사촌으로 얽혔지만, 기태의 이름을 공부 잘하는 옆 반 남자 반장보다도 기억 못하던 그녀였다. 그녀를 둘러싼 화려함의 뒤안에서 암울하고도 수줍게 성장하던 기태가 세월이 흐른 뒤 그녀에게 이런 자비를 베풀다니 그녀는 새삼 감격스러웠다. 더구나 결코 잊혀지지 않는 그 사건을 기억하면 말이다.



초등학교를 마치기 전에 서울로 전학을 왔던 그녀가 여중 2년 때였다. 그녀의 형제간들이 중, 고, 대학교를 다니며 모여 살던 서울 집에 기태의 누나 기숙이 살러왔다. 좋게 말해 사촌 형제간들의 가사를 도와준다고 했지만 막말로 하면 식모살이였다.



바로 윗대에서는 같은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났건만, 한 대 걸러 큰집의 자식들은 부모의 교육열에 서울 유학을 왔고, 작은집의 딸은 식모살이를 왔다. 그때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가슴이 아프다는 걸 몰랐다.



기숙과 그녀가 같은 방에 기거해온지 두 달 남짓 지났을 무렵의 봄날, 학교에서 돌아온 그녀가 대문 초인종을 여러 번 눌렀지만 분명 집에 있을 기숙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녀가 참다못해 문을 발로 차대자 그 소리를 들은 옆집 아주머니가 대문을 열고나왔다.



학생! 아마 사촌언니가 낮잠이 든 것 같은데 우리 집으로 들어와 장독대로 넘어가지 그래.



친절을 베푸는 듯 했지만 옆집 아주머니는 그녀가 문을 차대는 소리가 시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옆집 대문으로 들어가 날름 장독대로 올라갔다. 그리곤 낮은 담장을 넘어 그녀의 집 마당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집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녀는 먼저 기숙과 자신이 기거하는 방을 열어보았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부엌을 두리번거리다가 혹시나 싶어 오빠 방까지 둘러보았다. 화장실 문을 두들기다가 벌컥 열었어도 비어 있자 마지막으로 부엌 옆에 따로 붙은 목욕탕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그곳 역시 사람의 기척 없이 조용했는데, 귀퉁이가 깨어진 간 유리창에 헝겊 조각이 막혀 있는 게 이상했다. 목욕탕 문을 잡아 당겨 보았지만 안에서 잠겨 있는 듯 했다. 그녀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귀퉁이를 막은 헝겊 조각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금세 틈이 생긴 깨진 유리창 사이로 눈을 대고 목욕탕 안을 들여다보던 순간, 그녀는 악! 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젖가슴을 그대로 드러낸 기숙이 욕조 안에 비스듬히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게 아닌가. 벌어진 입에선 허연 밥풀이 쏟아져 나와 어깨까지 흘러 있었다. 그녀는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옆집으로 뛰어갔다. 발가벗은 기숙의 몸이 동네 사람들에 의해 담요에 둘둘 말려 종합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지만 결국 사망판정을 받고 말았다.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 그 구식 목욕탕은 욕조 밑으로 연탄을 넣어 물을 덥히게 되어 있었는데, 기숙은 연탄을 빼지 않은 채 목욕을 했던 것이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기숙의 열일곱 고운 몸이 흙이 될 때까지, 그녀는 대학을 가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며 때로는 행복해 하고 때로는 불행해 하다 미국까지 날아갔다.



기숙이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쉰이 넘어가겠구나.



그녀는 간사스럽게도 기태가 베푸는 술잔치 앞에서 사촌의 존재를 다시 인식한다.



저기 말야. 사촌! 그때 우리 집에서 죽은 기숙 언니 말야. 참 미안하게 생각…….



아따! 그 말은 하지 말어!



기태는 손사래를 치며 그녀의 입을 막는다.



사촌! 난 정말 미안하게…….



말하지 말래두!



새삼 생각나는 슬픔을 일부러 화난 듯한 표정으로 얼버무리는 기태를 보며, 그녀는 사촌이란 참 묘한 관계라는 생각을 한다. 묽어진 핏속에 남인 듯 남도 아닌…….



나는 혹시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죽은 기숙의 못 다 산 생까지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홀로 중얼대던 그녀는 문득 남들이 곱다하는 외모 속에 지옥 불처럼 펄펄 끓는 자신의 삶을 생각한다. 그리곤 거나하게 취해버린 기태의 어깨를 흔든다.



사촌! 사촌! 나 아무래도 벌 받았나봐.

                                        (한국소설 200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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