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

2004.12.27 11:14

박경숙 조회 수:605 추천:43




-검은 들판의 살빛 동그라미-


 


잠들어야 할 시간이 찾아오면
나는 깨어있고 싶어집니다.


바쁘게 휘몰아칠 내일 아침 위해
허둥대며 벼개를 베고 누운 그들을 비켜
홀로 오두마니 앉아 밤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몸색 붉은 촛불이 있다면
붉은 촛농을 흘려 빛을 태우며
밤의 고요를 혼자서 온통 움켜쥐고 싶어집니다.


생활의 무게를 저만치 비켜간 헛된 몸짓이라고
손가락질 한다면
나에게도 토하고 싶은 말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이 아침의 바쁜 외출을 걱정하며
내일 하루의 수확을 위해
낡은 가죽지갑의 헐어빠진 옆구리를 벌려두었다면,
나는 우리 죽는 그 순간을 걱정하며
일생 내내 수확을 위해
생기 없이 비틀어진 내 영혼의 한 옆구리에 문을 내어
사색의 물기를 뿜어 올리려 함입니다.


모두가 몇 마디 잠꼬대 속에 몸을 뉘었기에
나는 깨어있어야만 합니다.
그들이 밀쳐낸 사색의 의무를
홀로  다 짊어진 무거운 착각에
나는 이 밤 속에 몸을 웅크려 앉았습니다.
어둠이 되지 못하는 살빛 동그라미가 되어......
(1993.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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