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학식 날 아버지와

2004.08.02 05:25

박경숙 조회 수:875 추천:37




아버지



당신이 떠나신 봄,
흐드러졌던 개나리
그 눈부심마저도 눈물이었습니다.


여기 봄마다
이름모를 꽃이 피고지는 땅,
당신이 옮겨주신 모종도 아니건만
내 발바닥에서 실뿌리가 돋습니다.


흙 속에 누우신지 어느새 십 년,
당신의 미소, 백골로 나마 남아
내 먼 삶을 위로하실지.


한 때는 당신의 입신출세로
나는 호사스런 계집아이였습니다.
그 어느 때
한 줄기의 혹독한 바람에
역사의 대열에서 순번이 바뀌어 버리던 날,
우리 집에 다섯 대나 설치되어 있던 실내 인터폰을
보자기에 싸들고
당신은 을지로 4가 전자판매장으로 가셨습니다.
소용이 없어진 물건,
버려도 그만이련만 물질적 효용성에 당신은
그 다섯 대의 인터폰을 사천 원에 파셨습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좋은 기회가 되라며........


사천 원을 받아드는 당신의 고요한 모습에서
나는 등을 돌리고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열일곱 살 계집아이의 허영심에
상처가 났던 까닭이었지요.


들썩이던 내 어깨를
당신의 고요한 미소가 가라앉혔습니다.
당신은 신기하게도 내 아픔의 치유이셨습니다.


가시박힌 오만으로 하얗게 밤을 밝히던 내가
하는 수 없이 그렇구 그런 대학 문 앞에 다달았을 때
우울함을 지나쳐 무심한 내 얼굴을
당신의 미소가 다시 붙들었습니다.
- 아버지하고 입학기념으로 사진 한 장 박자!-
내 손목을 잡고 올라가시던 학교 앞 사진관,
나무계단의 삐그덕거림 뒤에
환한 아버지와 무표정한 딸이
한 장의 인화지에 박혀 나왔습니다.


- 아무도 축하 안 해줘도 마음 상해하지 마라. -
- 아버지는 너를 믿는다.-
- 글을 써서라도 나를 기쁘게 해 다오. -
하옇게 웃으시던 당신의 희망.
그대로 상한 내 젊음의 치유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머리카락이 자꾸만 바래가는 동안
나는 조금은 행복한 듯 했습니다.
그러나
허릿살이 늘어난 옆구리에
병든 둘째 아이를 끼고 당신을 방문했을 때
당신은 다시 나를 보고 웃으셨습니다.
- 우리 딸, 아이를 둘이나 낳고서도 저렇게 이쁘구나!-
- 미스코리아라도 내보낼 걸.-


오척 단신인 내가 미스코리아가 웬말.
앓아쌌는 내 삶을 쓰다듬는
당신의 사랑임을 나는 앓았습니다.


병든 내 아이가 더 깊은 병에
병원 침대에서 붙박이가 되던 어느 5월,
당신은 홀연히 내게 오셨습니다.
환한 웃음을 머금으셨지만
이제는 내게 할 말을 잊으셨던지
옆 자리 남의 갓난 아이만 어르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고향집 아랫목에 붙박이로 누우셨습니다.
끙끙대는 딸의 삶을 위로 할 말을 찾으시다
그렇게 누우셨습니다.


그해 깊은 가을엔
국민훈장 동백장도 하나 받아 병든 몸에 걸치시고
어머니와 금혼기념 사진도 찍어 놓으시더니
이듬해 꽃샘 바람에
당신은 힘없이 눈을 감으셨습니다.
아파쌌는 딸의 삶을 팽개치신 채
내 치유되기를 마감하셨습니다.


당신없이 앓아온 내 십 년의 삶 속에서
나는 이제야 알았습니다.
늘 아픈 내 삶은 내가 고쳐야 하는 것임을.......
내 삶의 마디마다 당신께서 흘려놓으신 그 사랑이
어느덧 내 안에서 영약으로 흐르고 있음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내 안에서
아픔의 순간마다 다시 살아나십니다.


나는 늘 아파싸도 걱정이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에 길들여진 스스로의 치유가
날마다 생성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늘 아파싸도 걱정이 없습니다.
당신께서 내게 걸어주신 희망이 어느새 가지를 뻗고
이렇게 글을 쓰는 당신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너무나 뵙고 싶습니다.
 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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