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 시인作/ 사평역에서

2004.11.21 06:21

박경숙 조회 수:345 추천:18


사평역(沙平驛)에서
          

            곽 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젹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 시인이 중앙일보 신춘에 당선된 작품이다 1981년, 난 이 시를 읽고 참 담담하고

진솔한 표현 앞에 곽재구 시인의 내면에 깃든 삶의 여백을 확인했다 결코 서두르지

않으면서 그러나 주춤거리지 않는 詩心이 있기까지 시인이 얼마나 많은 인고의 세월을

갈음했을가?라는 생각을 했다 시란 아름다운 삶에 대한 열망이다고 나는 말한다 삶 속에

묻어나는 수 많은 이야기 중에 시로써 표현되기까지의 시인의 내면에는 숱한 되새김과

방황 고통 격정의 눈물을 흘린다 이 사평역에서는 80년대 풍경과 세상사를 그대로 옮겨

놓은 그림 같은 시다 정겹고 눈물나는 우리들의 세상사에 대한 반증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원망과 질책없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삶이 있다. 송이눈이 내려 그 찌든

일상의 모습을 덮고 따뜻한 톱밥난로에 한 줌 희망을 던져보는 시인의 심성을 읽을 수

있는 시다.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6.19

오늘:
1
어제:
4
전체:
104,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