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 시인/문학평론
2004.12.03 03:04
목의 가시
고재종의 시 '첫사랑'에서
강인한
첫사랑
고재종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보았겠지
난분분 난분분 춤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 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 시집 『쪽빛 문장』에서
이 시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특히 3연입니다. 눈이 꽃나무 가지에 햇솜 같은 마음을 퍼부어 준 다음 황홀(꽃)을 피워낸다는 것.
2연에서 주목할 점은 그 음악성입니다. '싸그락 싸그락, 난분분 난분분,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에서 보게 되는 첩어 또는 동어 반복이 자아내는 음악성. 난분분이라는 한자어가 어색한 듯하면서도 그 반복적 음악성에는 효과를 북돋우고 있다 할 것입니다.
끝 연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이라는 구절은 문득 김춘수를 떠올리게 합니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數千) 수만(數萬)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三月)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네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이 시의 결구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연상하는 건 무리가 아닙니다. 김춘수의 이 '제일(가장) 아름다운'이라는 표현은 사실 많은 후배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모방을 불러왔습니다.
고재종의 이 시에서 내가 가장 껄끄럽게 느끼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 연의 두 줄입니다. 그 때문에 이 시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 무척 안타깝습니다. 꽃나무 가지에 눈이 여러 차례 많이 내렸다는 표현을 이렇게 '눈의 도전'으로 쉽게 써버린 모양입니다. 국어 사전에는 '도전'이라는 말 풀이가 이렇게 나옵니다.
도전 (挑戰)[명사][하다형 자동사] 1.싸움을 걺. ¶감히 나에게 도전하다니. 2.(승부의 세계에서) 보다 나은 수준에 승부를 걺. ¶챔피언에게 도전하다.
어제 고재종의 시집 출판 기념회에 갔습니다. 초대장 한편에 내놓은 이 시를 읽으면서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가 못내 목에 걸려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나무에 눈이 내리는 게 눈의 도전이라니. 내 옆 좌석에 앉은 고성만 시인에게서 볼펜을 빌려 그 구절을 이렇게 고쳐보았습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이 부딪치고 부딪쳤을까
마음에 흡족한 표현은 아닐지라도 목의 가시 같은 껄끄러움은 한결 덜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옆 자리의 고 시인도 훨씬 나아진 것 같다면서 빙긋 웃었습니다.
고재종의 시 '첫사랑'에서
강인한
첫사랑
고재종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보았겠지
난분분 난분분 춤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 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 시집 『쪽빛 문장』에서
이 시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특히 3연입니다. 눈이 꽃나무 가지에 햇솜 같은 마음을 퍼부어 준 다음 황홀(꽃)을 피워낸다는 것.
2연에서 주목할 점은 그 음악성입니다. '싸그락 싸그락, 난분분 난분분,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에서 보게 되는 첩어 또는 동어 반복이 자아내는 음악성. 난분분이라는 한자어가 어색한 듯하면서도 그 반복적 음악성에는 효과를 북돋우고 있다 할 것입니다.
끝 연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이라는 구절은 문득 김춘수를 떠올리게 합니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數千) 수만(數萬)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三月)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네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이 시의 결구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연상하는 건 무리가 아닙니다. 김춘수의 이 '제일(가장) 아름다운'이라는 표현은 사실 많은 후배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모방을 불러왔습니다.
고재종의 이 시에서 내가 가장 껄끄럽게 느끼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 연의 두 줄입니다. 그 때문에 이 시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 무척 안타깝습니다. 꽃나무 가지에 눈이 여러 차례 많이 내렸다는 표현을 이렇게 '눈의 도전'으로 쉽게 써버린 모양입니다. 국어 사전에는 '도전'이라는 말 풀이가 이렇게 나옵니다.
도전 (挑戰)[명사][하다형 자동사] 1.싸움을 걺. ¶감히 나에게 도전하다니. 2.(승부의 세계에서) 보다 나은 수준에 승부를 걺. ¶챔피언에게 도전하다.
어제 고재종의 시집 출판 기념회에 갔습니다. 초대장 한편에 내놓은 이 시를 읽으면서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가 못내 목에 걸려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나무에 눈이 내리는 게 눈의 도전이라니. 내 옆 좌석에 앉은 고성만 시인에게서 볼펜을 빌려 그 구절을 이렇게 고쳐보았습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이 부딪치고 부딪쳤을까
마음에 흡족한 표현은 아닐지라도 목의 가시 같은 껄끄러움은 한결 덜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옆 자리의 고 시인도 훨씬 나아진 것 같다면서 빙긋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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