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는 작년 1월 30일에 2000페이지에 달하는 두 권짜리 <<문학비평용어사전>>을 펴냈다. 나도 몇 개의 항목을 맡아 쓰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나의 전공과 전혀 다른 ‘기호학’과 ‘기호학적 상상력’ 같은 것이 있었다. 기호학에 관한 책을 도서관에서 있는 대로 빌려 읽으면서 우리 인간이 까마득한 고대에 상형문자를 만들어 쓰기 시작한 이래 기호의 발명자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수학기호, 화학기호는 물론이거니와 언어와 규약(code) 같은 것도 넓은 의미의 기호이며 신호등 표시나 교통 표지판 같은 것은 가장 직접적인 기호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의사 소통을 보다 쉽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호를 만들어왔다. 특히 상업광고는 기호를 통해 인간의 뇌리에 오래 남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에 현대는 기호의 난장판이요 기호의 전쟁터요 기호의 지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호에 둘러싸여 나날을 살아가고 있는 기호 인간이 아닌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호모 사인. (기호는 영어로 sign이고 기호학은 semiotics이다.)


때늦은 기호학 공부를 통해 기호의 사전적 의미가 “어떤 개념이나 명제 혹은 수식 따위를 쉽게 전하기 위해 만들어 쓰는 부호”임을 알게 되었다. 기호학을 아래와 같이 정의해보았다. 물론 이런저런 책을 보고 종합 정리한 것이다.


기호학이란 사람들이 사용하는 기호를 지배하는 법칙과 기호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고, 기호를 통해 의미를 생산하고 해석하며 공유하는 행위와, 그 정신적인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기호학은 기호의 기능과 본성, 기호의 의미 작용과 표현 방식, 나아가 기호를 통해 인간 상호간 의사 전달을 하는 동안에 형성된 다양한 체계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기호라는 용어는 19세기 말 독일의 현상학자 후설이 처음 사용하였고 20세기에 들어와 스위스의 언어학자이자 기호학자인 소쉬르가 기호학의 토대를 세웠다. 오늘날 기호학은 독립된 학문의 한 분야로 성장하였고, 언어기호학?시각기호학?건축기호학?음악기호학?연극기호학?문학기호학?텍스트기호학 등 다양한 분야로 발전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적 삶을 포함하여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이 기호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기호는 문명사나 문화사적으로 보아도 인간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현대인들의 일상적 삶의 과정에서도 기호를 절대로 무시하고 살아갈 수 없다. 시를 쓰는 내가 시적 대상 혹은 제재적인 측면에서 기호를 바라봤을 때, 기호는 영화 ?괴물?의 괴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기호에 둘러싸여 살면서 기호 덕을 본다고 하여 기호를 옹호하고 찬양해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바로 이 열 편의 시를 쓰는 계기가 되었다.


집의 아이가 한때 ‘나이키 운동화’를 사달라고 생떼를 쓴 적이 있었다. 친구들 몇이 부메랑처럼 생긴 나이키 상표가 붙은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와서 자랑을 하자 자기도 신고 싶다고 조르기 시작한 것이다. 신발을 사는 기준이 신기에 편하다, 내구성이 있다, 값이 경제적이다가 아니라 유명한 상표가 붙어 있다라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 사주는 것을 차일피일 미뤘지만 결국 아이의 고집을 꺾지 못해 사주었다.


이른바 ‘메이커 있는 제품’은 다른 회사의 제품과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지만 값은 훨씬 비싸다. 부메랑처럼 생긴 상표가 하나의 기호로 만들어지기 위해 많은 돈이 투자되었을 테니 그 투자 자금을 소비자가 부담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이키라는 기호의 이름은 어린아이의 영혼을 완전히 제압한 것인데 어른이라고 하여 기호의 힘을 무시하고 사는가? 그렇지 않다. 똑같은 제품일지라도 상표만 바뀌면 값이 달라지는 세상이다. 그래서 짝퉁이 만들어지고, 소비자는 짝퉁을 찾기도 한다.


기호는 기업의 로고일 수도 있고 이미지일 수도 있다. 이 세상에 많고 많은 표지판이 다 기호가 아닌가. 우리의 삶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기호, 기호, 기호의 신호로 작동되고 굴러간다. 유통되고 보관된다. 우리들이 하루에 수십 번씩 행하는 상업적 행위 어느 하나에 기호가 개입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21세기인 지금, 기호의 권능은 더욱 막강해졌다. 기호가 컴퓨터?휴대폰?디지털카메라?MP3?DMB 등 전자제품과 제휴를 했기 때문이다. 이제 기호는 인간의 삶 일거수일투족을 제어하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었다. 기호의 예정조화로 나는 밥을 먹고 잠을 자니, 나는 기호의 하수인인가 기호의 노예인가.


우리가 지금처럼 편한 세상, 편리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 다 기호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기호의 손에 놀아나지 말아야지 하는 반항심이 불끈 솟구친다. 기호의 질서를 거역하면 큰 혼란이 올 것이라는 우려와 기호의 명령에 부응하면 노예의 굴종을 감내해야 할 것이라는 반감 사이에서 나는 지금 갈팡질팡하고 있다. 이런 방황의 부산물이 연작시 ?기호의 천국에서? 10편이다.


요즈음 들어 ‘의미 작용’과 ‘기호 작용’에 대해서도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인간은 문자를 포함한 상징(symbol)과 도상(icon), 지표(index)를 갖고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며, 의사 소통을 한다. 여기서 자기 생각을 표현하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는 행위를 의미 작용(signification)이라 하고, 의미 작용과 기호를 통해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행위를 커뮤니케이션이라 하며, 이 둘을 합하여 기호 작용(semiosis)이라 한다. 기호학은 이 기호 작용에 대한 학문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시조차도 기호가 되고 있는 듯하다. 전에는 글을 쓰다가 어느 시인의 시를 찾아서 인용해야 할 때면 의자에서 일어나, 서가의 시집 코너로 가서, 책을 빼들고, 펼쳐놓고서, 자판을 두드려 시를 입력하는 작업을 하였다. 지금은 내가 찾고자 하는 시의 90%는 컴퓨터에 들어 있기 때문에 다운을 받아서 쓰면 된다.


김소월처럼 일제 강점기 때의 시인일 경우 작품이 발표 당시의 표기와 현대적 표기가 좀 다른데, 둘 다 나와 있으므로 골라서 쓰면 된다. 컴퓨터를 키면 전문 낭송가가 시를 낭송해주기도 하는데 그럴듯한 장면이 화면에 펼쳐진다. 이제는 시가 우유처럼 집집이 배달이 된다. 이것은 무료이므로 시가 상품이 아니라 기호가 된 것이다. 시를 시집을 통해 읽지 않고 ‘다운 받아서’ 보고 낭송가의 낭랑한 음성을 통해 듣는 시대가 되었으니 시의 기호화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현대는 기호간의 전쟁 시대이기도 하고 기호의 천국이기도 하다. 빨리 전달되고 오래 기억되기 위하여 기호는 적자 생존하고자 발버둥을 치고 위기의 순간에는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른다. 종교지도자처럼, 아니 선지자나 예언자처럼 청중을 끌어 모으기도 한다. 기호의 말에 우리는 ‘아멘!’이라고 대응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기호에 둘러싸여 살다보니 내가 기호가 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간밤에 텔레비전 개그 프로에서 한 여성이 “김 기사, 운전해~”라고 말하면 그 다음날 아침에 이 땅의 수많은 초?중?고등학생들이 학교에서 “김 기사, 운전해~”라고 말한다. 어른들은?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장난 삼아 그 말을 따라한다. 기호의 전파력이 나는 무섭다.


기호학을 시적으로 풀어보려는 시도를 이번에 해보았지만 애당초의 의욕과는 달리 결과는 이렇게 초라하다. 시발점에서는 이렇게 미약하게 썼지만 앞으로도 나의 의식과 무의식을 옥죄고 있는 기호와의 싸움을 계속해보고 싶다.





  ㅡ<<현대시학>> 2007년 3월호에 연작시 <기호의 천국에서> 10편을 발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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