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불감증과 아이러니

2006.08.11 02:38

박경숙 조회 수:514 추천:49

고통의 불감증과 아이러니 / 이명원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부 교수) “일본에는 아이러니가 없다.” 이 문장은 일본의 문학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것이다.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문제적인 평론에서, 일본 문학의 종말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렇다면 근대문학의 종말과 아이러니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나는 ‘고통을 자각하는 의식’의 강렬함이 문제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는 주체와 세계의 부조화와 괴리에서 파생되는 미묘한 감각이다. 현진건의 단편 〈운수 좋은 날〉에 등장하는 인력거꾼의 하루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이러니의 전형이다. 오늘따라 참 돈이 잘 벌린다. 한 손님이 내리면, 연이어 다른 손님이 인력거꾼을 청하고 게다가 요금도 두둑하게 받는다. 그러나 이 일시적인 행복감의 배후에는 굶주림 속에서 홀로 죽어가는 아내가 있고, 개선의 여지를 모르는 한 시대의 총체적인 빈곤이 숨어 있다. 스스로를 운수가 좋다고 말하면 말할수록 인력거꾼의 상황적 비극은 밀도가 높아지는데, 정작 비극의 주인공이 자신인 줄 모르고 헤헤거리는 것은 인력거꾼 그 자신이다. 소설 속의 인력거꾼은 아이러니를 모른다. 반대로 그것을 몸으로 느끼는 자는, 인력거꾼의 상황 전체를 통찰하고 있는 우리 독자들이다. 아이러니가 사라진다는 것은, 괴로움을 온전한 괴로움으로 느껴야 할 주체의 의식이 무감각 상태로 빠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의 고통은 물론 타인의 고통에도 지극히 무심한 냉소적 인간의 출현이 가능해진다. 냉소적 인간에게 소통이란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고통의 불감증 환자가 제대로 된 환희의 희열을 알 수도 없다. 고통을 자각하는 의식이 집단적으로 실종된 사회에서 호모 에티쿠스(윤리적 인간)의 멸종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라타니의 진술은 일본적 지성의 무책임, 괴로움을 자각하는 의식의 실종, 이로 인한 타자와 공동체에 대한 관심의 전면적인 퇴각에서 비롯된 일본 문학의 종언이라는 궤도가, 단지 일본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지구적인 공통상황이 되었다는 비관적 진단으로 내게는 보인다. 그렇다면 내가 살고 있는 한국에는 아이러니가 있는가? 적어도 상황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넘쳐나는 것이 그 아이러니란 것이다. 문학의 위기를 논하는 담론이야말로 문학 담론의 매우 중대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 자체가 아이러니다. 교육의 개혁을 이야기하는데, 듣다 보면 학교를 회사로 만들자는 이야기다. 이 역시 아이러니다. 혁신의 전도사로 운위되었던 사람이 관행을 역설하면서 자신을 변호한다. 아, 놀라운 아이러니다. 학교의 비리를 고발하고 교과운영의 정상화를 외치는 교사와 교수들이 정작 학교에서 추방당한다. 참으로 흔한 사학의 아이러니다. 죄의 경중을 판단했던 판관이, 검찰 앞에서 자신의 범죄에 대해 고백해야 한다. 흔하진 않지만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아이러니다. 그러나 이 점증하는 상황의 아이러니와 무관하게, 주체의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 사회를 점차로 장악해 가는 것은 고통을 자각하는 의식의 무감각 상태, 즉 의식의 사물화라 아니할 수 없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그것이 다시 자기 고통을 휘발시키는 판단의 회피를 동반하고, 이를 통해 다만 ‘오늘도 무사하기를’ 마음속으로 다짐하면서 세상을 향한 눈과 귀를 닫아버리는 아이러니의 총체적 실종. 가라타니는 그래서 일본 문학이 종언을 고했다고 말하지만, 반대로 나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 문학이 분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통의 불감증이 한 시대 감각의 표준모델이 되고 있다면, 문사들이여 우리들의 문장은 송곳처럼 날카로워져야 한다. 벌침처럼 따가워져야 한다. 흐드러진 미문 따위야 파지와 함께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아이러니다. 이명원 문학평론가·<비평과 전망>편집주간 [한겨레/2006.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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