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없는 것들의 슬픈 여행/임혜신 시집 해설

2009.09.05 14:49

정효구 조회 수:702 추천:25

임혜신 시집 해설 / 욕망없는 것들의 슬픈 여행




정효구







임혜신의 시집 해설


                      욕망 없는 것들의 슬픈 여행


                                                   정 효 구

      차 례


1. 그렇게 나의 편애는 시작되었지요
2. 나는 어두운 내부에서 기다렸지요
3. 얼음꽃을 밟으며 걷기 시작했지요
4. 어둠의 껍질들이 사는 세상이었지요
5. 온갖 괴로운 것들을 꽃이라 했지요
6. 욕망 없는 것들의 여행을 잊을 수 없지요


1. 그렇게 나의 편애는 시작되었지요

편애하는 것만큼 쉬운 것이 또 있을까? 편애하는 것만큼 순진한 것이 또 있을까? 편애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또 있을까? 편애하는 것만큼 난폭한 것이 또 있을까? 편애하는 것만큼 인간적인 것이 또 있을까? 편애하는 것만큼 편리한 것이 또 있을까?
편애하는 대상이 선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든 아니면 악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든 간에,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가 무엇인가를 편애한다는 행위 속에는 위와 같은 속성이 들어있다. 그런데 인생은 편애하는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거칠게 말하자면 성인이 되어 이 세속의 주민등록증을 받고 세속인으로 살아갈 자격을 얻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편애할 능력을 갖추었다는 뜻이 되기도 하다. 그만큼 세상은 편애하는 사람을 양성하고 그런 사람을 옹호하는 세계이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슬프다.
임혜신의 시집 해설을 이와 같은 말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그가 <편애>한 일의 과거를 숨김없이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시집을 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편애하는 세계를 간직하고 살아온 것이 얼마나 철없는 일이었던가를, 얼마나 단순한 일이었던가를, 얼마나 순진한 일이었던가를, 얼마나 끝없이 자신을 방황하게 만든 일이었던가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임혜신의 편애에 대해 미리 편견을 가지면 안된다. 그가 편애한 것은 세속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거나 세상의 권력을 지향하는 것과는 다른 편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그가 무엇인가를 편애한 것은 분명하다. 그는 시집의 맨 앞에 실린 작품 「하얀 蘭」에서 다음과 같이 이 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편애하였다 나는 들꽃을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에
  덤불 덤불 피어있는 패랭이 제비꽃 싸리꽃을
  여느 욕망에도 매달리지 않을 듯이 작고
  터져 버린 번뇌처럼 가벼운 야생의 꽃을

  그리하여 그들이 있을 법한
  거친 들길을 헤매었다
  짐승처럼
  바람처럼
  그것이 욕망이며
  그것이 번뇌임을 알지 못한 채

  꿈꾸었다
  깊은 강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수십 년 어둡고 좁은 골짜기에서
  그 향기를,
  그 빛깔을,

                                 - 「하얀 蘭」의 부분

임혜신이 위 시에서 고백한 내용을 보면, 그가 편애한 것은 참으로 순하고 무해한 것들이다. 그는 <어느 욕망에도 매달리지 않을 듯이 작고 / 터져 버린 번뇌처럼 가벼운 야생의 꽃>과 같은 것들을 겨우 편애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순결한 편애인가? 그러나 세속의 한가운데서 이런 편애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유아적(?)이고 위험한 일이다. 아니 세상 사람들과 대화조차 나누기 어려운 외롭고 고독한 길을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임혜신이 편애한 것의 참다운 내용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이런 편애가 가진 지순한 가치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가 편애한 내용을 통하여 임혜신이야말로 얼마나 때묻지 않은 낭만주의자였으며 순정한 이상주의자였던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임혜신이 편애한 위의 내용은 현실적으로 무력하지만, 가치상으로 유력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자신들이 그 세계에 대한 편애를 포기한 것에 아쉬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임혜신의 예민한 영혼은 자신이 들꽃 같이 가볍고 욕망 없는 것들을 편애한 것조차 실은 욕심의 소산이며 번뇌의 원천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더 이상 그런 것들을 편애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세상에서, 그러나 그런 것들을 찾아 <수십 년 어둡고 좁은 골짜기에서 / 그 향기를, / 그 빛깔을> 꿈꾼 것은 분명 세상의 문법에 대한 무모한 반란임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런 행위는 세상을 비켜서거나 넘어서려는 자의 이기적(?) 욕망의 소산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그런 세계를 그리워하는 것이 제아무리 가치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적나라한 현실 속으로 몸을 담그는 행위로부터 저만치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순정한 편애가 실은 또다른 의미에서의 욕망이 낳은 산물이고, 더 나아가 세상의 이쪽과 구별하여 저쪽 편에 그만의 이기적인 안식처이자 방을 만들고자 하는 일임을 안 임혜신은 이제 그가 아끼고 편애해온 그 소중한 세계를 거두어들이고자 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남은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 속으로 용기있게 들어가는 일이이라. 그렇지만 오랜 세월 동안 편애해온 그 순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어찌 단번에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그가 세상 속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용기있게 들어간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만은 결코 아니다.

2. 나는 어두운 내부에서 기다렸지요

작고, 가볍고, 따스하고, 욕망 없는 들풀 같은 세계, 그런 세계를 자신이 편애할 대상으로 삼은 사람에게 거칠고 난폭한 세상은 감당키 어려운 곳이다. 세상의 밑바닥은 언제나 크고, 무겁고, 차갑고, 욕망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 사람이니 그러한 세계가 지닌 논리와 관습을 배우고 익히라고 강요한다. 아니 우리가 먼저 세상 사람임을 자인하고 그러한 세상의 논리와 관습을 배우고 익히려고 안달이다. 이렇게 하여 세상과 우리들의 야합은 세속의 논리와 관습을 더욱 공고히 만든다.
임혜신에게 그런 세상은 힘겨운 곳이다. 그는 세상이라는 가혹한 투쟁의 전선으로 나가 무작정 싸우고, 싸워서 마침내 승리하고, 승리한 후 드디어 이겼노라고 환희의 노래를 부를 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는, 세상이란 대낮에도 어둠의 껍질(「밝은 아침」에서)이 그대로 살아있는 곳이며, 존재가 쓰레기로 변하여 던져지는 세상(「그 섬에 남은 것들」에서)이고, 심장 없는 양철사슴이 사는 거리(「양철사슴이 사는 거리」에서)이며, 슬픔과 걱정과 번민과 부패가 서성이는 곳(「빵집의 테러」에서)이고, 누군가의 불행이 아이스박스로 가득히 담겨 있는 곳(「꽃」에서)이며, 바람도 꽃도 없는 샌드위치 바 같은 곳(「바람도 꽃도 없는」에서)이고, 이유를 물어 소용없는 날들이 연속되는 곳(「검은 비 1」에서)임을 안다. 그가 비록 고집스럽게 혹은 순진하게 그가 편애하는 곳을 지향하였다 하더라도, 세상이 이런 곳이라는 사실을 그는 지식으로라도 아니 풍문으로라도 배우고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임혜신은 이런 세상으로 직접 대어들지 못한다. 그는 이런 세상과 직접 맞대면하기 이전에 그만의 방을, 그만의 숲을, 그만의 신전을, 그만의 동굴을, 그만의 내부를 마련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맨 몸으로 덤벼드는 세상과 편애에 익숙한 자신 사이를 지키기 위하여 만든 완충지대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이런 곳에서 거름더미처럼 자신을 푹푹 썩히며 그가 세상으로 나갈 길이 만들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가 마련한 방, 숲, 신전, 동굴, 내부 등과 같은 곳은 모두 어둡고 혼란스럽지만 그가 세상과의 만남을 위하여 자신을 보살피고 키우며 다스리는 곳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정주가, <나를 키운 건 八割이 바람이었다>고 말했다면, 임혜신을 키운 것은 팔할이  숲이라는 동굴이자 어둠이라는 신전이었다고……. 그는 그가 만든 이곳에서 서두르지 않고 오랫동안 자신과의 투쟁 및 화해를, 그런가 하면 세상과의 투쟁 및 화해를 도모하였던 것이다. 그 장소와 그 시간은 임혜신에게 외로우면서도 행복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임혜신의 동굴, 숲속, 신전, 방, 내부 등은 매우 매혹적이다. 생의 비의를 담고 있는 것 같은 그곳은 많은 사람의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만큼 그가 만든 이 곳들에서는 여러 가지 진기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 일들을 보노라면 때로는 슬픔이, 때로는 아름다움이, 때로는 사무침이, 때로는 애수가, 때로는 연민이, 때로는 신비스러움이 느껴진다.

   이유를 물어 소용없는 날
  불을 끈다
  잎새들이 주렁주렁 열린
  정원의 달빛을 끄고
  나방이 나르는 현관의 불을 끄고
  거실의 쇠사슬에 매어 달린
  세 개의 등을 끄고
  부엌을 향해 난 복도
  높은 천장의 등불을 끄고 마지막
  가슴에 달깍거리는 촛불을 끈다

  더 없는 슬픔은
   어둠 속에 있다고 믿어온 까닭에
  앓거나 죽어버리기조차 가장 좋은 자리는
  어둠이라고 믿어온 까닭에
  눈물로 떨어진다
  한 방울 한 방울 깊은 밤의 핏줄 속을

  다 젖을 때까지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던 일들
  가르치고 배우던 일들
  모두 젖어서 흘러갈 때까지
  차가운 어둠의 신전에
  나의 것이라 믿어온 모든 것을 내어준다
  바르게 사는 법을 그러면
  다시 꿈꾸어보겠노라고

                                              - 「검은 비 1」의 부분

위 시를 보면 임혜신은 스스로 어둠의 동굴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둘레에 있는 불을 차례로 끄며 점점더 깊은 어둠의 집을 지어나아갔다. 그가 그 집짓기의 마지막 지점에서 만난 것은 그가 만든 집이 <차가운 어둠의 신전>과 같다는 것 - 그는 이 차가운 어둠의 신전에 자신을 남김없이 바침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자아를 보고자 했다. 이런 과정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하지만 그가 그의 손으로 직접 어둠의 신전을 축조해가는 과정은 얼마나 인상적인가. 그는 먼저 정원의 달빛을 껐다. 그리고 그는 현관의 불을 껐다. 다음으로 그는 거실의 불을 끄고 복도의 불을 껐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불끄기의 방식이며 차례이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 / 가슴에 딸각거리는 촛불을 끈다>는 말을 했을 때, 우리는 얼마나 깊고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되는가. 제아무리 바깥의 불빛을 꺼버려도 제 가슴의 불빛을 끄지 않는 한 어둠의 집은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아는 자이다. 이렇게 하여 시인의 가슴에 딸깍거리는 촛불까지 끈 지금, 그의 몸이 놓여 있는 곳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몸 자체도 완벽한 어둠의 동굴을 닮았다. 그는 앞서 말했듯이 이렇게 하여 만든 어둠의 동굴을 <차가운 어둠의 신전>이라고 불렀다. 이곳이 차갑지만 신전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자신의 몸 속에서 일어나는 빛조차 꺼버렸기 때문이다. 자아와 세계가 완전히 하나가 된 곳, 그런 곳을 가리켜 신전이라고 부른다면 임혜신이 만든 어둠의 동굴은 신전의 모습을 띠기에 충분하다. 이렇게 자신조차 어둠으로 만들어 버린 사람은 자아분열을 경험하지 못한다.그것은 자신을 완전히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자아분열이란 밝은 빛 속에서 하나의 자아가 다른 또 하나의 자아를 보고 의식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임혜신이 자신의 몸 속에 들어있는 마지막 불빛까지 꺼버린 것은 어둠을 신전으로 만드는 데 성공적인 방식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렇게도 철저한 어둠의 동굴을 만든 것일까. 위 시에 그 답이 나와 있다. 그것은 그가 어둠 속에만 있다는 슬픔의 한가운데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며, 그 속에서  자기자신이라고 불러온 욕망의 흔적들을 고요히 썩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어둠의 동굴 속에서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그는 <다 젖을 때까지>, <모두 젖어서 흘러갈 때까지> 그저 자신에 속한 모든 것을 어둠 속에다 다 내어주고 기다릴 뿐이다. 그것은 바로 어둠의 신전은 차갑지만, 그 신전 앞에 <나의 것이라 믿어온 모든 것을 내어>주고 날 때, 비로소 그 자신이 <바르게 사는 법>을  꿈꾸어볼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바르게 사는 법>일까? 임혜신은 그것에 대해 친절한 암시를 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단지 추측만이 가능할 것이다. 추측하건대 그것은 세상에 들어가 살면서도 세상을 넘어서는 법이 아닌가 한다. 달리 말하면 세상을 넘어서면서도 세상에 들어가 사는 법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어둠의 신전 속에서 다시 태어난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그는 한 차례 길고 난해한 儀式을 순결하게 감행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편애한 대가를, 그가 세상 사람으로 조건지어진 대가를, 그가 세상 사람이면서도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대가를 치르는 한 차례의 儀式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런 어둠의 동굴 속에서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세상 사람임을 영원히 부정하며 산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알만큼 그는 지혜롭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만들어낸 어둠의 동굴 속을 종착지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의 여러 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는 나갈 수 있는 길을 찾거나 만들기 위하여 거듭 노력한다. 그 노력의 여정을 잘 보여준 작품이 「환생 1」이다.

  거리는 침울했지만 나는 기다렸어요 벗어나고 싶은 만큼 침착하게 그가 내게 쥐어     준 나무의 이름처럼 둥근 알의 내부에서

  내부라는 것은 좁아 터져서 인파가 용암처럼 들끓는 지하상가처럼 시끄럽거나 싸우    는 날이 빈번한 다세대 주택처럼 답답했지요 몇 발작 걷지 못하고 고꾸라지는 온갖     냄새들로 종종 붐비더군요 어머니의 내부도 다를 바 없었지만 나는 기다렸지요 나무    의 푸른 이름을 타고 소년처럼 뛰어 다닐 드넓은 평원을

   기다리는 자에게 완벽한 배반은 없습니다 숲에서 방금 나온 햇살의 신선함으로 그가    다시 한 번 조용히 아주 조용히 나의 손목을 잡아 끌 때 나는 드디어 밖으로 나왔으    니까요 거기 가을이 오고 있더군요 속속들이 스미는 한기의 힘이 얼마나 빠르고 강하    던지 나는 순식간에 내 살던 곳을 뛰쳐나와 드높은 장작더미에 앉아 있었습니다만

  그가 나의 귓속에 불어 넣어준 나무의 이름이 이처럼 써늘하다니요 툭 툭 잘려 누운    밝음의 뼈마디에 흐르는 죽음의 향기 건조한 내 어머니의 무릎에서 나는 또르륵 또르    륵 귀뚜라미로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빅뱅처럼 온 세상에 깨어져 줍는 햇살의 유리      밭에서 그 때 나는 깨달았지요 이렇게 슬픈 것이 환생인 줄을

                                                    - 「환생 1」의 부분

위 인용 부분의 첫 줄에서 보이듯이, <거리는 우울했지만>, 그는 기다렸다. 그가 기다린 것은 밖으로 나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면 그가 나오고자 기다린 바깥이란 어떤 곳일까. 위 인용 부분에 나와 있는 한 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나무의 푸른 이름을 타고 소년처럼 뛰어 다닐 드넓은 평원> 같은 세계이다. 그는 이 세계를 기대하며 <내부>라는 어둠의 동굴에서 침착하게 인내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 내부라는 곳은 <좁아 터져서 인파가 용암처럼 들끓는 지하상가처럼 시끄럽거나> <싸우는 날이 빈번한 다세대 주택처럼 답답했>고, <몇 발작 걷지 못하고 고꾸라지는 온갖 냄새들로 종종 붐비>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기다렸던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나무의 푸른 이름을 타고 소년처럼 뛰어 다닐 드넓은 평원> 같은 곳을 꿈꾸면서 말이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면 그는 여전히 세상물정을 모른 채 꿈을 꾸는 사람이거나, 세상 너머만을 꿈꾸며 편애로 가득찬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꿈이 실현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가 내부를 견뎠다는 사실과 그 내부에서 나오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두 가지 사실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부터이다. 그가 아수라장 같은 내부를 견디고 넘어서, 그 누군가의 혹은 그 무엇인가의 손길에 이끌리어 이 세상에 나왔을 때, 그 세상은 그가 기대한 것과 달리 이미 <가을>로 접어든 황량한 땅이었고. <한기>가 파고드는 차가운 땅이었다는 사실이다. 기다림의 끝에 그가 세상에 나와서 맞이한 것이 이렇게 황량하게 조락하는 가을풍경 같은 모습이라니……. 더군다나 뼈속까지 한기가 스미는 동토 같은 풍경이었다니……. 그렇다면 그는 어찌해야 할까?
임혜신은 이 놀라움 때문에 그만 순간적으로 드높은 장작더미 위로 올라가 앉아버렸다고 말했다. 그것은 본능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놀라움의 과정을 거쳐 세상의 실상을 꿰뚫어보게 된 것이다. 그가 꿰뚫어본 내용이란 바로 세상이야말로 밝음 속에 죽음이, 그 죽음 속에 향기가 흐르는, 참으로 <슬픈> 곳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말하는 <슬픔>이란 이 말은 인생사 전체의 모순과 아픔을 음미하게 만드는 복합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그는 이렇게 내부에서 나온 것을 <환생>이라고 불렀다. 나는 이 <환생>이란 말을 그만의 닫힌 밀실에서 슬픈 인간들이 살아가는 마을의 한가운데로 나온 것이라 해석한다. 이런 나옴이, 아니 환생이, 실은 <슬픔>을 맞이하는 행위임을 안 이상, 그에게는 적어도 더 이상 순진한 편애나 환상이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남은 것이 있다면 <슬픔>의 지대를 어떻게 그의 땅으로 삼고 그곳에 뿌리를 내릴 것이냐 하는 문제뿐이다.

3. 얼음꽃을 밟으며 걷기 시작했지요

내부를 막 빠져 나온 임혜신에게 이 세상은 내부보다 더 혼란스러운 <슬픔>의 지대이다. 그는 이곳에서 무서울 정도의 한기를 느낀다. 그는 한때 젊은이의 단견과 패기 때문에 이 한기와 추위가 자신을 향해 오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그것을 부정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았다. 세월이 한참 지난 어느날, 그는 자신이 밀쳐놓곤 했던 그 한기와 추위가 실은 자신을 향해서 다가온 것이며, 자신이 감당할 몫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은 그의 삶을 뒤바꿔놓는 엄청난 대사건이다. 이것은 이미 이 세상이 <슬픔>의 지대인 줄을 알면서도 그 슬픔의 지대 속으로 온전히 몸을 들여놓지 않았던 그가, 그의 몸을 슬픔의 지대 한가운데로 기꺼이 들여놓고자 마음먹게 된 계기이기 때문이다.
그가 세상으로의 외출을 시작한 것은, 달리 말해 세상 속으로 적극적인 태도를 갖고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이런 계기에 의해서이다. 그는 이 계기를 통하여 단순히 내부에서 바깥으로 나온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냉기 흐르는 동토의 땅, 곧 바깥을 자신의 삶 속으로 포용해들이게 된 것이다. 몸으로의 포용은 지식으로 아는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차원이다. 그것은 바깥이라고 부른 동토의 땅과 직접 맨몸을 섞는 일이기 때문이다. 임혜신의 시 「빙판」을 보면 그의 이런 실상이 매우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 해
  근 이십 년만의 추위가 오기까지
  나는 알지 못했어
  무서운 한기가 분향처럼 온 방에 넘실댈 때까지
  숨 다 거둔 햇살 따위가
  나와 대체 무슨 관련이 있기나 한 것인지
  믿지 않았어.
  힘줄이 잘리고 피부가 벗겨진 빛
  그것의 냉혹함,
  그것의 잔인함,
  그것의 자유로움, 그러므로 나는 믿었어
  작고 따스하고 자주 목이 마른 나는
  그것과는 다르다고

  이십 년 만이었어,
  슬며시 내가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혹시 길이 아닌가, 이 끈질긴 추위가.
  삶과 죽음 사이에 가늘게 놓였다는
  그 신비의 줄이 아닌가, 라고

  나는 문을 열었지
  어디로든 나가 봐야겠다고
  삭풍은 빠르게 거실로 안방으로 들이닥치고
  쉽게 허물어지는 집 밖에서
  아, 나는 처음으로 보았어
  햇살의 식어가는 얼굴을
  붉고 자비로운 꽃물처럼 땅으로 흘러내리는
  빛의 차가운 몸둥아리를.

  땅에 이르자마자 꽝꽝 얼어버리는 그것은
  햇살이라기보다 하얀 꽃이었지.
  피어난 자리에서 한 발작도 물러서지 않는
  얼음꽃, 그 해 겨울 나는
  그렇게 꽃을 밟으며 걷기 시작했어. 참으로
  아름다운 인연의 시작이었어.

                                      - 「빙판」의 전문
  
위 인용시를 보건대 임혜신은 <무서운 한기가 분향처럼 온 방에 넘실>대어도, 그것이 자신과 무관한 세계일 거라로 생각해왔다. 그는 이때까지도 그 무서운 한기가 분향처럼 감도는 세상을 그와 다른 지대로 간주하였다. 그러기를 20년, 그렇지만 추위와 한기가 감도는 세상은 언제나 그 앞에서 넘실대고 있었다. 정말로 혹독한 추위가 그의 방 속을 침입해 들어온 어느날, 임혜신은 도저히 사라지지 않고 엄습해오는 이 혹독한 추위와 한기에 대하여 다른 시선을 보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위의 인용시 제2연에 나와 있는 것과 같다. 그 해당 부분을 다시 한 번 옮겨본다.

  이십 년 만이었어,
  슬며시 내가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혹시 길이 아닌가, 이 끈질긴 추위가.
  삶과 죽음 사이에 가늘게 놓였다는
  그 신비의 줄이 아닌가, 라고

이것은 그의 삶에 엄청난 전환을 가져온 대사건이다.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해온 그 혹독하고도 끈질긴 한기와 추위 속의 세상을 <삶과 죽음 사이에 가늘게 놓였다는 / 그 신비의 줄이 아닌가>라고 의심하기 시작하였으니 말이다. 다시 말하건대 이것은 사유의 대전환이자 존재의 대전환이 이루어지는 계기이다. 그렇다면 그 추위와 한기의 세상을 받아들이고 건너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또 있겠는가.
임혜신은 위의 인용시 제3연에서 보이듯이 드디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봐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문을 여는 순간 추위와 한기는 그의 집안으로 몰려들어와 그를 놀라게 만들었지만, 그가 차분히 세상 안으로 들어갔을 때 세상은 어느 곳이나 한기와 추위로 몸을 떨고 있는 곳이었다. 여기서 그는 그 자신이 세상으로 나가 그 세상 속에 몸을 담근 사람이 된 것만이 아니라 그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한기와 추위까지도 자신의 것이라고 아파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런 그에게 세상은 모든 것이 꽝꽝 얼어버리는 곳으로 보였다. 햇살조차도 얼음꽃으로 딱딱해지고 차가워지는 곳으로 느껴졌다. 어느 것 하나 말랑말랑하고 따스한 방 속이나 빵 속 같지 않았다. 삭풍과 한기와 추위와 결빙만이 횡행하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세상을 그가 맞이할 <꽃>이라고, 그리고 그가 가야할 <길>이라고 불렀다. 그는 더 이상 냉동공장 같은 세상을 자신과 무관한 세상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임혜신은 참으로 인상적이게도 그의 이런 전환을 가리켜 <얼음꽃, 그 해 겨울 나는 / 그렇게 (그)꽃을 밞으며 걷기 시작했어. 참으로 / 아름다운 인연의 시작이었어>라고 말을 한다. 세상의 삭풍 속으로 나가는 길을 이렇게 아름다운 역설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니……. 이렇게 말하기까지 그는 참으로 아프고 힘들었겠지만, 그의 사유 속에 대전환이 일어난 이상, 그는 자신이 문밖으로 나가서 맞이해야 할 혹독한 세상과의 인연을 <아름다운 인연>으로 승화시키고 싶은 것이었으리라.
한 발작도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얼음꽃, 도저히 녹을 것 같지 않은 얼음꽃, 피자마자 꽝꽝 얼어버리는 얼음꽃도 그것을 길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의 발길 밑에서는 순한 짐승처럼 몸을 내어주는 비밀이 이 세상 속에는 있다. 그리하여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을 것 같은 얼음꽃에서 냇물이 흐르고, 그 얼음꽃에서 먼 곳까지 이르는 향기가 번진다. 그러나 실상 이것은 얼음꽃을 길로 만들고 받아들인 사람의 열정과 온기와 성실성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니 언 길을 녹이는 것은 언제나 대상이라기보다 주체라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4. 어둠의 껍질들이 사는 세상이었지요

세상에 나온 임혜신은 한기와 추위로 가득한 이 세상과 동침한다. 그가 이런 세상과 동침하는 까닭은 이미 그 세상이 피할 수 없는 그의 길이자 우리의 길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요컨대 그는 이 추위와 한기의 세상이 자신의 땅이자 우리의 땅임을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와 세상과의 동침이 깊어질수록 그가 세상으로부터 보고 느끼는 현실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고, 그는 이 적나라한 표정들 앞에서 신음하게 된다. 그가 신음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한기로 가득 찬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음은 절대로 과장된 포즈를 취하지 않는다. 그는 과장이나 연기라곤 모르는 사람처럼 참으로 조용한 목소리로 그가 어떻게 신음하고 있는가를 알려준다.
그러면 임혜신이 그런 세상으로 나와 보고 체험하며 신음한 내용들은 어떤 것들일까. 이런 내용들은 그의 시집 제2장에 주로 수록돼 있는데, 나는 페이지를 넘기면서 눈에 보이는 대로 그 내용들을 열거해보고자 한다.
그가 나와서 본 세상은, 우리가 여기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작위적인 인공문명의 도시이다(「이상한 아침」)에서), 소외된 인간들이 우글대는 정글이다(「밝은 아침」에서), 소유와 욕망의 극대치를 지향하는 탐욕의 바다이다(「작은 거북섬」에서), 총기사건으로 한 해에 수만명이 죽어가는 살인과 살생의 땅이다(「마지막 희망」)에서), 인간까지도 쓰레기로 버려지는 오염된 쓰레기장이다(「그 섬에 남은 것들」에서), 구원을 포기한 사람들이 체념을 익힌 공간이다(「바다 위의 달」에서), 서로 마주치는 것이 차갑고 무서운 가면 쓴 사람들의 세계이다(「양철사슴이 사는 거리」에서), 나무들이 산 속에서도 마음 속에서도 베어져나가는 무자비한 나라이다(「사라진 스윗베이 나무 숲」에서), 서랍 가득히 상처가 담겨있는 슬픈 역사의 땅이다(「눈먼 해양학자」에서), 걱정과 슬픔과 번민과 부패 속에서 일상이 시드는 공간이다(「빵집의 테러」에서), 표정 없는 사람들의 불행이 아이스박스로 가득 담겨있는 곳이다(「꽃」에서), 버려진 주검들이 덮여버리는 매립지와 같은 곳이다(「아침 江」에서), 갑남을녀가 모여들어 잡화상처럼 버라이어티쇼를 벌리는 일회용 전시장이다(「한 지붕 아래」에서),
에이즈가 사랑의 결실인 비애의 땅이다(「개경주」에서), 수없이 감기약을 먹어야 몸을 지탱할 수 있는 나라이다(「감기약」에서) .
나는 더 많은 예를 더 구체적으로 들 수도 있지만 이 정도만 하여도 그가 세상에서 보고 만나고 체험한 것들이 무엇이며 그의 신음소리에 어떤 내용이 실렸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임혜신이 세상을 체험한 내용과 세상에 대해 인식한 내용을 조금 더 깊이 느껴보기 위한 마음으로 아래의 시를 인용하고 살펴보고자 한다.

  깊은 어둠이 사라질 때
  남아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첫 햇살에 쩍 하니
  어둠의 늑골이 열릴 때
  이름 없는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라지는 어둠과
  쉼 없이 열리는 당당한 빛 사이에서
  몹시 혼동되어 당신께 물었습니다
  이 구석 저 구석에 남아있는 이들이 다 무엇이냐고
  당신은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어둠의 껍질이니라

  허물어진 건물에서 거미처럼 기어 나오는 흑인 노인도 어둠의 껍질입니까, 공사장     근처에서 담배를 물고 이민국 눈치를 살피는 큐바인 청년도 어둠의 껍질입니까, 잡풀    우거진 네거리에서 'Work For Food ' 주인을 기다리는 빼빼 마른 피리쟁이도 어둠의    껍질입니까, 햇살을 미끄러져 오는 칼날 같은 바람소리 쓰레기 흐트러진 골목으로 우    수수 떨어지는 연꽃 같은 여인들도 어둠의 껍질입니까, 머리핀에 새겨진 호랑이와 잿    빛으로 바래어 가는 중국인 웨이추레스도, 그녀를 기다리는 열 살 짜리 소녀, 소녀가    홀로 TV를 보는 빈집도, 빈집에 새벽까지 서성이는 불빛도, 불빛을 삼키는 낮은 안개    도 모두 모두 어둠이 벗어버린 껍질입니까, 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은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또한 생명의 허물이니라.
허물들이 어둠을 나누어 지니고
여기 저기 흩어졌으므로
찬란한 새벽이 온 것이니라

그러면 어둠은 사라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 「밝은 아침」의 전문

위 시는 작품으로서의 긴장도와 완결성이 뛰어나다. 임혜신의 이 작품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실은 어둠이 사라지지 않은 세상을, 햇살 아래서도 존재가 결빙되어 떨고 있는 세상을, 어둠은 사라진 게 아니라 잠시 몸을 감췄을 뿐임을 여실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이 작품의 내용에 기대어 말하자면 그가 본 세상은 어둠의 껍질들이 흩어졌다 모였다 하며 모양만 바꾸는 어둠의 땅이다. 이런 세상 속에서 시인 임혜신도, 이 글을 쓰는 나도 어둠의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어둠과 그 어둠의 껍질들을 온전히 거두어낼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시인 임혜신은 물론 우리들로 하여금 더 깊은 신음소리를 내게 하는 요인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임혜신이 어둠에 관한 문제를 직접 풀지 않고 <당신>이라 부른 우주의 관리자에게 상의했을 리가 없을 것이다.

5. 온갖 괴로움들을 꽃이라 했지요

순정한 편애를 지나, 어두운 내부를 지나, 차가운 세상을 지나, 이제 임혜신이 다다른 경지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차가운 세상을 관망하는 것도, 지적하는 것도, 고발하는 것도,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것은 차가운 세상을 괴롭지만 포용하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차가운 세상을 그의 체온으로 따스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의 품 속에서 세상의 딱딱한 것들이 부드러운 것으로, 냉냉한 것들이 온화한 것들로, 어두운 것들이 밝은 것들로, 혼탁한 것들이 투명한 것으로, 이그러진 것들이 온전한 것들로, 번잡한 것들이 정연한 것들로, 버려진 것들이 숭고한 것들로 다시 태어난다.
이런 신비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임혜신의 시집 맨 앞에 수록된 작품 <하얀 蘭>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임혜신은 이 작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편애하였다 나는 들꽃을

     (중략)

  그러나 어느 날 나를 깨운 것은
  커피테이블 위의 분,
  분 속의 하얀 난이었다
  한 줌의 먼지와 몇 가지 화학약품으로
  입술과 어깨와 턱을 빚어 올린
  냉혈의 꽃
  그가 한 번
  첫겨울의 빗발처럼 단 한 번
  아주 깊고 차겁게 나를 꿰뚫어보던
  이후로 나는 들꽃을 찾지 않는다
  아니, 꽃을 찾지 않는다
  하얀 난의 창에 꽂혀
  그렇게 나의 편애는 끝이 났다

  남은 것은 이제
  세상 온갖 괴로움을 꽃이라 부르는 일이다
  생명의 한가운데 피어나는 번뇌의
  싸늘한 살과 뼈를 꽃이라 부르는 일
  저 외로운 욕망의 삽질들을 다, 꽃이라
  부르는 일…….

                                     - 「하얀 蘭」의 부분

이 시를 읽은 사람은 이해하리라. 그가 왜 재창조와 재탄생의 신비를 발휘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위 인용시를 보면 임혜신은 들꽃이 상징하는 욕망 없는 것들의 작은 세계를 편애하였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커피 탁자 위에 놓인 화학의, 인공의, 냉혈의 꽃, 그가 말하는 <하얀 蘭>을 보고 더 이상 이 땅에 그가 편애해왔던 <들꽃> 같은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을, 더 나아가 존재하더라도 이땅에서 그것을 온전히 편애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깨달음은 <창에 꽂혀> 통증을 느끼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들꽃 같은 것은 물론 일체의 꽃과 같은 것조차 다 편애하지 않겠다며 반납해버렸다. 그것을 그리워하는 한, 그는 온전하게 세상을 포용할 수 없다는 인식이 그를 지배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자리에서 그가 내린 결론은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을 온전히 포용하고자 하는 자가 안간힘을 다한 끝에서 힘겹게 얻어낸 고귀한 결론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내린 결론 앞에서 우리는 <슬픈 감동>을, <슬픈 아름다움>을, <슬픈 평화>를, <슬픈 기쁨>을 맛본다. 이런 역설과 모순어법이 아니면 그 감정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렇다면 그가 내린 결론의 구체적 실상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앞 인용시의 맨 뒷 연에 들어 있다. 그것을 여기 다시 한 번 옮겨보자.

  남은 것은 이제
  세상 온갖 괴로움을 꽃이라 부르는 일이다
  생명의 한가운데 피어나는 번뇌의
  싸늘한 살과 뼈를 꽃이라 부르는 일
  저 외로운 욕망의 삽질들을 다, 꽃이라
  부르는 일…….

그래, 꽃이라는 게 저 들녘에 달리 피어 있는 것만이 아니다. 임혜신이 위 인용 부분에서 말했듯이 이 세상의 온갖 괴로움이 다 꽃이다. 존재하는 생명의 한 가운데 피어나는 번뇌가 다 꽃이다. 그들의 번뇌 속에 들어있는 싸늘한 살과 뼈가 다 꽃이다. 사는 날까지 우리가 해대는 외롭고 가여운 욕망의 삽질들이 다 꽃이다. 그래 다 꽃이다, 다 꽃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아픔과 상처와 고통과 고단함과 지루함이 다 꽃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
그럼으로써 임혜신의 마음 속에서, 더 나아가 그의 삶 속에서 세상의 크고 작은 일들, 좋고 나쁜 일들, 기쁘고 화나는 일들, 웃고 우는 일들, 박수치고 절망하는 일들, 속고 속이는 일들, 사랑하고 질투하는 일들, 그 모든 일들은 다 꽃으로 승화되고 만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일로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그는 웃음과 울음을 그가 가진 몸속의 가장 깊은 해저에 담담히 담아둘 만큼 강인하다. 아니 넉넉하다. 아니 지혜롭다.
이런 단계에 도달한 임혜신에겐 세상의 양면성과 입체성이 무척이나 잘 보인다. 그는 세상이 가진 이런 양면성과 입체성 때문에 어둠의 이면에 잠시잠시 깃드는 짧은 밝음의 순간도 포착하고, 생명의 광포한 무력(武力) 속에서 생명만이 가진 그 힘의 신선함도 느끼며, 좁고 삭막한 샌드위치 바 속에서도 순간의 기쁨을 찾아낸다. 그런가 하면 그는 세상이 지닌 양면성과 입체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존재의 어느 한 면만을 보고 성급하게 느끼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그의 이런 통찰력은 그로 하여금 시집 곳곳에서 역설이나 아이러니 같은 모순어법을 능숙하게 활용하도록 만든다. 달리 더 예를 들 것도 없이 앞의 인용시에서 괴로움과 번뇌와 욕망을 꽃이라고 부른 일 자체가 모순어법을 능란하게 사용하는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서야 임혜신은 조금 편안해진다. 그것은 인생의 풀 길 없는 비극적 모순성을 승화시킬 수 있는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인간일 뿐 다른 어떤 존재일 수 없다. 그러므로 죽는 날까지 그가 꽃이라고 불렀던 괴로움과 번뇌와 욕망들은 수시로 반란을 일으키며 달려들 것이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하는 말이란 '내가 어디 꽃이냐'는 식으로 반항성을 띠고 나타날 것이다. 그때마다 그는 곤욕을 치를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는 그 반항아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고 있다. 그는 이 사실을 그의 작품 여기저기에서 보여주었다. 그러니 그가 설사 이런 곤욕의 시간을 만난다 하더라도 그는 곧 평정을 찾을 것이고 그들을 달래어 다시 꽃이라 부르며 꽃으로 피워낼 것이다.

6. 욕망 없는 것들의 여행을 잊을 수 없지요

앞에서 보았듯이 임혜신은 세상의 이분법을 넘어서 있다. 그는 세상 속에서 세상을 끌어안고 세상을 꽃이라 이름부르며 담담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못한다. 그의 꿈은 너무나 높기 때문이다. 그 꿈이 임혜신의 시를 이끌고 가는 원동력이지만 그 꿈을 이루고 싶은 소망 때문에 그는 걱정(?)이 많다.
그 꿈이란 무엇일까? 임혜신의 시 「검은 비2 」, 「감기약」, 「작은 방」, 「폭설」, 「낡은 나무 부두」, 「초대」, 「숲」, 「저녁 식사 후의 나무들」, 「코스모스」, 「붉은 뱀 2」 등과 같은 작품들을 보면 그 꿈의 실체를 잘 읽어낼 수 있다.
이 작품들 속에 나타난 공통점은 인간사 속에 깃든 모든 욕망의 흔적들을 뿌리째 넘어서 보고 싶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번뇌와 고통과 아픔을 꽃이라고 이름 붙이는 그 단계까지도 넘어서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욕망이 온전히 무화된 하나의 말없는 사물, 욕망이란 이름조차 거론할 필요가 없는 무형의 물질, 선택과 시비를 말하기도 이전인 완전한 본마음, 인간적 기운을 넘어선 우주적 존재, 너와 나 사이의 거리를 느끼지 않는 全一性의 존재, 탈속의 햇살 속에 무심히 몸을 기대고 잠드는 나비, 영원히 잡히지 않는 라벤다 향기 등과 같이 살고 싶고, 되고 싶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것이야말로 욕망 중의 가장 큰 욕망인지 모른다. 욕망이라고 이름붙일 수조차 없는 고단수의 이기적 욕망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런 것을 두고 욕망이라고 말할 때, 더욱이 이기적이라고 말할 때, 그 욕망과 그 이기성은 얼마나 드높은 인간성의 한 자질인가! 이런 자질을 보여준 대상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맨몸 전체를 내놓고 무방비 상태가 되거나 무장해제한 아름다운 바보(?)가 된다. 그와 더불어 모처럼만에 몸 전체를 뒤흔드는 고요한 평화의 감정에 빠져들게 된다. 이런 평화로운 감정 속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하고 행복하다는 말을 조용히 꺼내볼 수 있다.
여태껏 건조한 말로 설명한 것을 느껴보기 위하여 이와 관련된 임혜신의 여러 작품 가운데 한 편을 인용해보기로 한다.

  나는 왜 아닌가,
  미명의 부드러운 손끝에서
  이 세상 가장 느린 속도로 옷을 벗는
  저 섬이 왜 아닌가,

  때묻고 이끼 낀 가슴
  소금기 절은 천공을 향해 여는 돌섬
  잿빛 물안개를 가르며
  죽은 이처럼 편안히 바다 위로 떠오르는
  입 없고 손 없고 부끄럼 없는
  저 여자가 왜 아닌가,

  구불거리는 해안을 따라
  빗줄기처럼 흘러내리는 나,
  나는 왜, 아직도 섬이 아닌가,
  굴껍질에 살을 베이며
  온 밤을 걸어 다니는 나의 몸은
  왜, 아직도 비인가,
  아픔인가,
  눈물인가,

  거리낌없는 자,
  크고 바르게 누운 자,
  깨어나도 눈뜨지 않는 저 여자가
  왜 아닌가 나는,
  영원도 소멸도 두렵지 않은 듯  
   검은 물위로 꺼멓게 제 몸을 드러내는
  저 거칠도록 장로운 돌,
  섬이 아닌가,

                               - 「검은 비 2 : 제부도」의 전문

위 작품에서 화두를 이루는 것은 '왜 나는 저 섬이 아닌가'라는 물음이다. 여기서 섬은 <여자>로 변주되다, <돌>로 변주되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으로 변주되든지 간에 시인 임혜신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적인 세계 너머의 사물 그 자체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임혜신이 꿈꾸는 인간세계 너머의 사물 그 자체란 그의 말대로 진정 <거칠도록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들은 입도, 귀도, 코도, 눈도, 감정도, 이성도, 관습도 넘어서 그냥 <있다>. 그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그것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임혜신이 보기에 <거칠도록 자유로운> 존재의 방식이다. 그는 그런 존재의 방식의 살고 싶고 닮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여전히 뛰고 그는 그렇게 뛰는 심장 앞에서 그가 인간임을 다시 확인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것은 또한 그를 슬프게 하는 일이다.
임혜신 스스로가 그의 작품 「작은 방」에서 밝혔듯이 그는 <식물성>의 인간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몸속에 잠들었던 식물성이 깨어나는 순간에 가장 행복하다. 그가 행복하다는 것은 그도 그 주변의 것들도 식물성의 존재가 되어 비로소 <거칠도록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물인 인간이 식물성의 세계에서 행복해한다는 것은 모순된 일이다. 그렇지만 앞의 인용시를 읽은 우리들은 그 말의 속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임혜신은 이렇게 인간적 기운을 넘어선 <섬>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 그것은 있되 없는 <無의 존재>가 되고 싶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그는 너무나도 철저하게 자기점검을 계속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가 이처럼 있되 없는 <무의 존재>가 되고 싶다는 사실 그 자체에까지도 마음을 쓴다. 겨우 3행으로 구성된 작품 「無」를 보면 그가 가진 정신세계의 핵을 보게 될 것이다.

  한 세상을 끝낸 자가
  또 한 세상으로 떠나가는      
   오, 저 비밀스런 욕망의 속도

                                     - 「無」의 전문

바로 이것이다. 그는 <無의 존재>가 되고 싶다는 소망에서까지도 <저 비밀스런 욕망의 속도>를 읽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탈속이니 초월이니 해탈이니 득도니 하는 무겁고 과시적인(?) 말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그가 목숨을 가진 인간임을 인식하고 그 바탕 위에서 <無의 존재>가 되기를 꿈꾸는 것까지도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의 한 형태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욕망 없는 것들의 여행>(「작은 방」에서)을 꿈꾸고 즐기는 것까지도 그는 '욕망 있는 것들의 삶'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정직하고 비약 없는 자기이해와 인간이해의 한 양식이다.
바다에서, 숲속에서, 작은 방에서, 햇살 속에서, 어둠 속에서, 또 다른 그 무엇 속에서 그가 인간인 자신의 몸을 잊고 무심한 사물이 되고자 하는 그 소망까지도 그에게는 또 하나 그가 넘어가야 할 인간적 도정이자 과제인 것이다.
그 과제를 푸는 동안 임혜신의 시는 더욱 성숙한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다. 나는 그의 이 과제가 숲속 같은 그의 내부에서 잘 발효되기를 기대한다. 숲속을 닮은 그의 내부는언제든 그가 과제를 안고 찾아들어 가 자신을 푹푹 썩히기에 좋도록, 아주 잘 지어진 한 채의 집과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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